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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16화 (116/172)
  • #116.

    드래곤과 용사와 요정 4

    정하율이 들려준 이야기는 단순히 책 내용일 뿐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지수는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음, 그 초월자는 작가에게 왜 다른 세계가 나오는 이야기를 쓰게 했는데?”

    그 물음에 정하율이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작게 도리질하며 말했다.

    “그게, 초딩 때 보다가 중간에 멈춰서 완벽하게 기억나진 않는데……, 대충 사람들이 책을 읽고 그 세계를 인식하게 되면, 실제 존재하는 그 세계에 어떤 힘? 이 생긴다는 이유였던 것 같아.”

    지수가 경청하자 정하율은 기억을 더듬으며 드문드문 말을 이었다.

    “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러니까 그 세계가 멸망하지 않고 계속 유지될 수 있는 힘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사람들에게 책으로 그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거랬어.”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지수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눈앞에 펼쳐진 수몰 도시를 응시했다. 정하진과 정하율이 들려준 이야기가 모두 진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앞에 펼쳐진 멸망한 문명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술렁였다.

    ‘피핀의 여정은 고향에서 자길 기다리는 약혼녀에게 돌아가며 끝났는데…….’

    다시 목동으로 돌아가 앞으로 남은 생은 고향에서 행복하게 보낼 게 분명한 그런 결말이었다. 드래곤과 피핀이 나눈 우정 덕분에 드래곤은 인간 세상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고, 정령왕 역시 그러했다.

    인간과 드래곤과 정령이 화합하고, 모험하고, 함께 아름다운 우정을 다지고, 확실한 행복을 그리며 끝난 이야기라서 좋았는데, 책의 내용과 비슷한 이 공간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했다.

    ‘우연이겠지. 책 속의 세상이 실제 존재한다니, 말도 안 되는…….’

    거기까지 생각하던 지수가 일순 주먹을 꾹 쥐었다.

    과연 말이 안 될까?

    지구도 원래는 평범한 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대격변이 일어나고, 던전이라는 재앙이 터지며 일부 사람들은 초능력자가 되지 않았던가. 자신만 해도 그랬다. 아이돌이라는 특수한 직업을 가진 게 아니라면, 그저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일 뿐이었다.

    그랬던 자신부터가 가이드로 각성하고 에스퍼라는 존재를 도울 수 있는 힘을 얻지 않았던가.

    ‘속이 울렁거려…….’

    기분이 이상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감정의 동요가 생기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실재하는 멸망한 세상의 흔적을 봐서? 아니, 그건 말이 안 됐다. 제가 고대 도시 던전을 처음 들어온 것도 아니고 말이다.

    지수는 어떻게든 던전에 자주 들어가려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던전 경험은 꽤 있었다. 다른 고대 도시 던전도 세 번 정도 공략했지만, 그땐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멸망한 문명을 보며 이 던전을 ‘만든’ 존재가 참 악질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토할 것 같았다. 왜 이렇게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걸까? 지구가 멸망한 모습을 본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런 말로 표현 못 할 기분이 드는 걸까? 기어이 꾹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곁에서 내내 지수의 안색을 살피던 정하율이 괜찮냐고 물으려는 순간, 정하진이 먼저 천천히 지수의 등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한지수 가이드.”

    “……으, 흐으…….”

    “괜찮습니다. 천천히 숨 쉬어요. 괜찮습니다.”

    쿵쾅쿵쾅 심장이 요동쳤다.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하자 덜컥 겁이 났다.

    “삣! 삐삐잇!”

    “으, 으읏…….”

    “삐에엣!”

    “토토. 괜찮다. 하율아 잠시만.”

    “응!”

    무릎에 앉혀 두었던 정하율을 옆자리로 옮겨 앉힌 정하진이 아예 지수에게 몸을 돌려 앉았다. 그는 한 손으로 지수의 벌벌 떠는 손등을 덮어 잡고, 다른 손으론 연신 등을 보듬었다. 호흡이 가빠지던 지수는 이제 숨 쉬는 게 괴로운지 정하진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가슴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으, 수, 숨……, 숨이…….”

    “한지수 가이드. 괜찮습니다. 천천히 숨 쉬어요.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고, 그때도 한지수 가이드는 잘 해냈습니다. 겁내지 말고 천천히 숨 쉬어요.”

    정하진은 지수가 제 몸을 때리지 못하게 손목을 잡은 채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고, 호흡엔 문제없으니 마음 편히 먹고 내 손길을 따라 깊이 숨을 내쉬라고. 하지만 지수는 예전처럼 그의 말을 따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빠지는 호흡 탓에 이지러지는 시야가 더욱 혼란스러웠던 지수는 가슴께를 움켜쥐며 눈을 꾹 내리감았다.

    이명 같은 진동음이 들리고, 다시 눈을 뜬 지수의 앞에 펼쳐진 건 낯선 공간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제가 앉아 있는 곳은 절벽 근처 벤치였는데, 발밑으로 잔디가 아닌 갈라진 아스팔트가 보였다. 당황해 고개를 치켜들자, 먹구름이 둥글게 모여들기 시작한 새빨간 하늘이 보였다.

    ‘뭐지? 갑자기 하늘이 변했어?’

    쿵쾅- 쿵쾅-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정하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 등을 보듬어 주던 규칙적인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다. 놀라 제 손을 내려다보니 손목을 잡아 주던 그의 큰 손도 보이지 않았다.

    “저, 정, 흐윽, 정하진, 에스퍼?”

    고개를 돌리자 정하진도, 정하율도, 토토도 보이지 않았다. 수몰된 도시는 증발한 듯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무너진 빌딩과 풍비박산 난 도시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 도시는 지수가 너무도 잘 아는 곳이었다.

    “……뭐야? 서, 서울?”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지수가 놀라 고개 들자, 응집한 먹구름이 파지직- 파지직- 스파크를 튀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황한 지수가 급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곁에 있어야 할 이들의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 하율아……! 토토야……!”

    우르르릉-!

    “정하진 에스퍼!”

    애타게 그들을 부르며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쿠콰과과과과광-!

    저 멀리 반쯤 휘어 있던 빌딩이 무너지며 지수가 있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으아악! 또 다른 재앙이 소환됐어! 도망쳐!!!”

    “뒤로! 뒤로! 저쪽으로 도망쳐!!!”

    “으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길거리엔 시체가 널렸고, 건물 잔해에 깔려 하반신이 으깨져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신체를 심각하게 훼손당한 채 신음하는 이들도, 끔찍한 몰골로 죽은 이들이 너무 많았다.

    “정, 정하진 에스퍼……! 하율아아아! 토토야아악!”

    아무리 불러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지수는 이게 환영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던전을 보고 갑자기 자극받아 제 정신이 또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거라고 여겨 그대로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았다.

    ‘가짜야. 이건 다 가짜야. 눈 감고……. 눈 감고, 숨 고르게 쉬다 보면, 그럼, 분명 괜찮아질…….’

    퍼억!

    “아악!”

    누군가가 지수를 거칠게 밀치고 달려갔다. 그대로 나동그라진 지수는 제 몸에 느껴지는 고통에 기겁하며 눈을 떴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누군지 모를 사람이 치고 간 부위도, 넘어지면서 부딪친 부위도 전부 아팠다.

    지수의 코앞에 마찬가지로 쓰러진 사람들이 보였다. 미동도 없는 채,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이들은 이미 체온이 식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로 생기 없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으, 흐윽……. 제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일어나지도 못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을 때, 하늘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던전 게이트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진 균열이었다.

    불길한 균열이 점점 더 길게 찢어지더니, 그 틈새로 새하얗고 거대한 손가락이 삐져나왔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며 또 다른 재앙이 강림하려 한다며 비명을 질렀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와중에도 지수는 끊임없이 주변을 살폈다. 각성자나 초기 대응 드론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하늘로 시선을 옮기자, 밖으로 삐져나온 손가락이 균열을 잡아 찢듯 벌리기 시작했다. 시뻘건 하늘과 달리 균열 너머는 새하얀 빛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수는 그게 빛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거인?’

    새하얀 피부를 가진 거대한 존재의 코와 입이 보였다. 균열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강제로 균열을 벌리던 거인이 입을 크게 벌리자, 수없이 많은 뾰족한 이가 드러났다. 그리고,

    키에에에에에---!!!!

    “……!!!”

    “으아아악!”

    “꺄아악!”

    “크아아아아악!!!”

    “귀, 귀 막, 귀를 막아야……!”

    균열을 벌린 괴물이 찢어지는 것 같은 비명을 내지른 순간 달리던 이들이 모두 귀를 틀어막으며 주저앉았다. 마찬가지로 고막이 파열될 것 같은 끔찍한 고통에 귀를 틀어막고 몸을 웅크린 지수는 저 비명을 단번에 떠올렸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끔찍한 소리…….

    바로 강재윤을 삼켰던 태종대 던전이 내지르던 비명이었다.

    ‘숨 막혀, 누가 제발……. 재윤이 형……. 정하진 에스퍼…….’

    그러자 그때,

    “한지수 가이드!”

    “!!!”

    절실했던 목소리에 번쩍 눈뜬 지수는 저를 내려다보는 정하진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흐, 흐윽, 저, 정하진, 에스퍼어…….”

    “한지수 가이드. 괜찮습니다. 여기 제가 있어요.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온몸이 벌벌 떨리는 와중에 지수는 정하진의 목을 놓지 않으려 팔에 힘을 꽉 줬다. 정하진 역시 한지수를 품에 안은 채 등을 도닥이며 공황일 뿐이라고, 괜찮다고, 진정하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지수는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두려웠다. 무엇이 두려운지 몰라도 그저 두려웠다. 환상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너무 두려웠다.

    게다가 지수는 강한 충동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제정신 아닌 와중에도 지수는 저가 느끼는 이 충동이 왜 일어나는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지수는 지금 그저 사과하고 싶었다. 정하진에게 너무도 사과하고 싶었다. 대체 무엇을 사과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그에게 꼭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지수는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와중에 흐느끼며 생각 없이 흘러나오는 말을 전부 토해 냈다.

    “미, 미안해요……. 으흑, 미안해요, 하진 씨, 미안해요, 정말 미안…….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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