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드래곤과 용사와 요정 3
신전 구경을 마친 투어 팀은 신전 밖으로 나가 잘 조경된 정원을 구경했다. 유럽 왕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멋진 정원이 보였다. 넓은 정원엔 돌을 깎아 만든 산책로,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기둥 등 조경물이 가득했다. 정원 곳곳에 파손된 흔적도 꽤 있음에도 이 공간이 얼마나 공들여 관리된 곳인지 알 수 있었다.
“형, 여긴 다 큰 것 같아. 건물도 크고 계단도 높고, 문도 크고, 나무도 커.”
“응, 그러네.”
“이거 봐. 화분도 엄청 커서 무슨 돛단배인 줄 알았어.”
“그러네. 하율이가 알려 주기 전까진 형도 돛단배인 줄 알았어.”
“삐, 삐잇?”
토토가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보든 말든, 정하진은 제 동생이 하는 말에 꼬박꼬박 맞장구쳤다. 지수도 평소라면 저 둘과 함께 웃고 떠들었겠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럴 수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몰라 앞으로 쭉쭉 걸어가던 지수의 발걸음은 어느새 저 멀리 에스퍼들이 지키고 서 있는 산책로의 끝으로 향했다.
정하진 역시 정하율을 안아 든 채 지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토토는 내내 지수의 정수리에 앉아 주변을 경계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는데, 오목눈이 새치곤 그 모습이 퍽 늠름해 보였다. 가슴을 당당히 내밀고 주위를 쭉 둘러보던 토토가 저 멀리 에스퍼들을 보더니 “삣!” 하고 울었다.
“응? 토토야, 왜?”
“삣! 삐삣!”
지수의 정수리에서 날아오른 토토가 산책로 끝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지수는 토토의 이름을 부르며 후다닥 쫓아갔다.
“토토야! 그쪽은 넘어가면 안 돼, 이리 와!”
“삐잇!”
산책로 끝을 지키고 있던 에스퍼들이 맹렬하게 달려오는, 아니, 날아오는 오목눈이 새를 발견하고 팔을 들어 올려 저지하려 했다. 지수는 B급과 A급 에스퍼에게 토토가 몸통 박치기라도 날릴까 싶어 초조해하며 이름을 불렀다.
“토토야! 멈춰!”
다행히 토토는 에스퍼들을 공격하거나 지나치지 않고 그 앞에 멈춘 채 날갯짓했다. 토토가 멈춘 사이 후다닥 달려와 에스퍼들에게 사과하려던 지수는 눈앞에 보인 광경에 얼빠진 소리를 뱉어 버렸다.
“허억…….”
함께 달려온 정하진은 말없이 지수의 곁에 서서 토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토토는 정하진의 손가락 위에 앉아 그가 옮겨 주는 대로 정하율의 어깨 위에 앉았다. 정하율은 토토를 어깨에 올린 채 에스퍼들의 어깨 너머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헉? 형! 저거……! 저 밑에! 혹시 건물이야?”
“응. 건물이 많이 보이네. 도시 같아.”
“그럼…… 그럼 도시가 전부 물에 잠긴 거야?”
“응.”
에스퍼들이 지키고 서 있는 산책로 뒤쪽은 무너져 내려 그리 높지 않은 절벽이 된 채였는데, 그 아래로는 물에 잠긴 도시가 보였다. 원래라면 저 도시에서 쭉 언덕을 걸어 올라오며 다리를 건너면 이 신전이 있었을 텐데, 그 길과 다리가 끊기고 대신 맑은 물이 차올라 있었다.
호수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끝이 보이지 않는 물속에 수장된 도시의 규모는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반짝이는 윤슬을 품은 거대한 호수에 가라앉은 도시는 거짓말처럼 아름다웠고, 동시에 가슴이 묵직해지는 기분을 들게 했다.
언덕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늘어선 건물들은 얼핏 보면 상점가처럼 보였다. 간판이 있는 건물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건물도 있었는데, 그보단 건물 자체가 주거보다 상업화된 느낌이 강했다. 건축 양식이 전혀 다른 세계였음에도 그런 구분이 되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조금 더 먼 곳에는 아마도 주택일 듯한 실루엣이 넘실거리는 윤슬에 반사된 밝은 빛 탓으로 시야가 가려져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뭐가 보여요?”
곁에 에스퍼들이 있었기에 지수는 정하진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정하진은 눈을 살짝 가느스름하게 뜨고 말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꽤 큰 도시입니다.”
“역시 도시였군요.”
“예. 이곳까지 오는 길을 중심으로 큼지막한 건물이 꽤 많은데, 그 건물들이 끝나는 지점엔 광장이 있고, 그 광장 너머로 구역이 나뉜 주거 지역이 보입니다.”
투어 길드 소속 에스퍼들은 흘러나오는 기운으로 정하진이 에스퍼임은 알았지만, 주고받는 대화로 생각보다 꽤 등급이 높은 것 역시 눈치챈 듯 조심스럽고도 정중하게 설명했다.
“맞습니다. 저희가 탐색했을 때 이곳에 수몰된 도시는 꽤 거대했습니다. 여기서 정방향으로 두 시간 정도 가면 왕궁 같은 곳도 있습니다.”
통역 아이템 덕분인지, 원래 영어를 잘하는지 바로 알아들은 정하율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왕궁도 갈 수 있어요?”
“아쉽게도 왕궁은 코스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왕궁엔 보스 몬스터가 있거든요.”
“아, 진짜요? 왕궁도 보고 싶은데…….”
정하율이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본 정하진은 다음에 왕궁이 있는 던전 투어가 열리면 꼭 데려가 주겠다며 등을 도닥였다. 그는 동생을 달래면서도 한지수의 안색을 살폈다. 한지수는 산책로 끝에 도착한 순간부터 수몰 도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근처를 더 둘러볼까요?”
정하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수는 물에 잠긴 도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가능하면요. 자유 시간이 아직 좀 남았는데, 여기 물가에 근처까지 내려가 봐도 괜찮을까요?”
그러자 이번엔 정하진이 아닌 근처를 지키고 서 있던 에스퍼 중 한 명이 끼어들어 대답했다.
“물가 근처로 내려가는 건 안 됩니다. 대신 저 벤치에 앉아 구경하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아, 네.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지수는 정하진의 팔을 잡아끌며 함께 벤치로 향했다. 벤치는 에스퍼들과 약간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B급 이상 에스퍼의 가청 범주를 알고 있던 지수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공간 제어 아이템을 사용했다.
지수의 옆에 앉은 정하진은 내내 안고 있던 어린아이 모습의 정하율을 무릎에 앉힌 채 지수를 계속 살폈다. 물에 잠긴 도시를 응시하는 지수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고민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괜찮습니까?”
“형, 괜찮아? 피곤해?”
“괜찮아, 하율아. 정하진 에스퍼도 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요. 그냥……. 그냥 물에 잠긴 도시를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서요…….”
“삐잇. 삐삐삣.”
지수의 허벅지로 날아와 앉은 토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귀여움을 어필했다. 어떻게든 나를 보고 기운 내라는 무언의 애교였다. 수몰 도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지수는 토토에게 시선을 내리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토토야, 아빠 괜찮아.”
“삐이?”
“그때…… 정하진 에스퍼가 읽어 준 책 내용이랑 여기가 너무 비슷해서……. 그런 구절이 있었잖아요, 정하진 에스퍼. 피핀이 작위를 받고 교황에게 축복받기 위해 퍼레이드 행렬을 따라 신전까지 가는 이야기 기억나죠?”
“예.”
“어, 난 그 부분은 기억 안 나는데……. 무슨 내용이었지?”
정하율이 그건 잘 모르겠다며 갸웃하자 정하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피핀이 황제에게 작위를 받고, 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 신전을 방문하는 내용이 있었어.”
정하진은 당시 읽어 주었던 한 페이지를 떠올리며 설명했다. 목동이었던 피핀이 영웅이 되고, 황궁과 마주 보는 신전으로 축복을 받으러 가기 위해 퍼레이드 행렬 선두에 서기로 했으나 긴 거리에 사람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서 결국 드래곤과 정령왕과 신전까지 날아갔다는 내용이었다.
설명을 들은 정하율이 고개를 돌려 수몰 도시를 바라봤다. 아까 에스퍼들의 설명과 정하진의 설명을 떠올려 보면 바로 맞은편 방향으로 두 시간 거리에 왕궁이 있다고 했으니, 이야기 속 도시와 정말 비슷한 형태여서, 마치 그 책 속의 인물들이 살았던 세계의 일부에 들어온 것 같았다.
“정하진 에스퍼.”
“예.”
“우연일까요?”
“…….”
“목동에서 용사가 된 인간, 드래곤, 정령왕의 모험과 세계를 수호한 벽화. 그리고 이 도시 구조. 이게 전부 다 우연일까요……?”
“…….”
그 물음에 정하진은 무언가 말하려다 잠시 멈칫했다. 그리곤 망설이듯 입술을 조금 달싹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뱉었다.
“확답하긴 어렵지만, 이런 비슷한 일이 이전에도 있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비슷한 일이요?”
“예. 대격변 초기 멕시코에서 발견된 던전이 어떤 책의 내용에서 서술된 것과 흡사한 고대 도시였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공략팀 에스퍼가 마침 그 책의 독자였다고 하더군요. 완결까지 읽진 않았지만, 던전 내 고대 도시를 보니 딱 책에 나온 특징적인 부분들이 보여서 던전을 나와 작가를 수소문해 찾았다고 합니다. 결국 작가와 연락이 닿았고, 공략팀 에스퍼의 이야기를 들은 작가도 놀라 까무러쳤다더군요.”
“그럼 꽤 큰 사건 아닌가요? 그런 것치고 소문이 크게 나진 않았나 봐요?”
“해외 길드들은 대부분 던전 정보를 길드 대외비로 다루다 보니, 애초에 정보가 퍼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시엔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더 그랬을 겁니다.”
“혹시 작가도 각성자였나요?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거나……. 그런 도시가 있는 던전이 나타날 걸 알고 쓴 거라면…….”
“아뇨. 작가는 비각성자였습니다. 인터뷰 당시 작가는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세계와 캐릭터들이 선명하게 떠올라 며칠 만에 책을 완성했다고 했습니다. 이야기 속 요정이 자신을 이용해 책을 쓴 게 아니냐는 말을 했다더군요.”
“…….”
지수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이후로 두 사람 모두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토토 역시 가만히 부리를 닫고 얌전히 있는 덕분에 주변은 조용했다. 정하진의 무릎 위에 앉아 눈치 보던 정하율은 그런 셋을 번갈아 가며 살피다 곧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있잖아. 예전에 내가 읽었던 책에 나왔던 내용인데, 거기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어.”
“비슷한 내용? 어떤 부분이 비슷했는데?”
“어, 그러니까, 그 책은 주인공인 작가가 죽어서 자기가 쓴 책에 빙의하는 내용이었거든? 근데 알고 보니 책 속의 세계가 진짜 있는 세계였고, 초월자가……, 음, 후원자 같은? 하여간 그런 존재가 작가에게 책을 쓰도록 신내림 같은 걸 했던 내용이었던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