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드래곤과 용사와 요정 2
당연히 들어가 본 적 없는 던전이었다. 그런데 저 석상 삽화가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다. 정하율이 팸플릿을 다음 장으로 넘기자 이번엔 거대한 신전 같은 건물 안에 벽화처럼 보이는 삽화가 나왔다.
<관람 포인트 2. 영웅의 연대기가 기록된 거대 벽화>
신전을 지키고 있는 석상 영웅들의 연대기가 그려진 벽화 감상. 벽화는 총 29개 발견되었음. 그 외 훼손된 벽화도 다수 있으나 안전 문제로 접근 금지. (벽화 관람 시엔 인솔자의 안내를 따라야 함. 거부 시 던전 밖으로 퇴장당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투어 비용 환불 불가)
사진이 아닌 삽화다 보니 벽화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삽화 내 관람객으로 보이는 사람의 실루엣으로 미루어 볼 때 벽화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왜 그럽니까?”
“……!”
화들짝 놀라 고개 들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살피는 정하진이 보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일단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꾸준한 시선에서 자신을 향한 염려가 느껴졌다. 토토 역시 정하진의 어깨로 옮겨가 지수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수는 괜히 정하진을 신경 쓰게 했다는 생각에 잡념을 털 듯 고개를 흔들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 * *
“오, 이런! 세상에, 정말 큰 석상이네요!”
“웬만한 빌딩보다 높은 것 같은데?”
“엄마, 저기! 용 위에 사람이 있어!”
거대한 조각상을 구경하기 위해 열기구에 탑승한 투어 관람객들의 감탄사가 쏟아졌다. 정하율 역시 정하진의 품에 안겨 누구보다 높은 위치에서 석상을 감상 중이었다.
“우와, 진짜 크다. 그치, 토토야.”
“삐…….”
입장하면서 투어 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 피곤해진 토토가 대충 대답했다. 평소 같으면 그런 관심을 즐겼을 텐데, 유독 어린아이들이 많은 투어 팀이라 그런지 내내 시달린 탓에 초췌해 보였다.
피곤한 몰골로 대충 보고 늘어져 있는 토토와 달리 지수는 열기구 그물 너머로 보이는 조각상을 살피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 팸플릿 삽화로 봤을 때도 느꼈지만, 묘하게 생김새가 눈에 익었다. 아까는 평소에 종종 떠오르던 기시감 같은 건가 싶었는데, 직접 보니 기시감과는 조금 달랐다.
‘익숙함……이라고 해야 하나. 뭘까.’
처음 보는 조각인데 어째서 저 조각상을 보자마자 기묘한 기분이 들었던 걸까. 상념에 빠지려는 찰나, 같은 열기구 바구니에 탑승한 에스퍼가 기구를 조종하며 말했다.
“자, 이제 다음 코스로 이동하기 위해 열기구를 내리겠습니다. 흔들릴 수 있으니 주변에 있는 손잡이를 잡아 주세요.”
관람객들은 아쉬워하며 저마다 어떻게든 저 석상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대부분 던전이 그렇듯 이 던전 역시 내부에 흐르는 기운 때문에 평범한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로는 촬영물이 남지 않았다. 찍힌 사진은 전부 흐릿하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추상적인 덩어리처럼 기록되는 수준이었다. 정하율도 정하진이 사 준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찍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열기구가 착륙한 후 투어 팀은 두 번째 코스인 벽화가 있는 신전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 수단은 길드에서 제공하는 지붕 없는 8인승 셔틀이었다. 얼핏 보면 지프차처럼 생긴 셔틀이 여러 대 줄지어 있었다.
투어 팀이 각각 지정받은 셔틀에 탑승하고 모두 벨트까지 착용한 순간. 셔틀을 운전하는 에스퍼들이 꽉 잡으라고 소리치더니 급발진하기 시작했다.
“끄아악!”
어마어마한 속도로 출발한 셔틀에 놀란 지수가 저도 모르게 가장 단단한 버팀목을 끌어안았다. 정하진의 왼팔이었다. 레이싱 경기라 해도 무방할 속도에 기함하면서도 혹시나 정하율이 놀랐을까 봐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적어도 이 셔틀에선 정하율이 제일 신나 보였다. 건너편으로 쌩 지나가며 저들을 추월한 셔틀에 탑승한 아이 역시 롤러코스터 타듯 양팔을 쭉 뻗고 격한 환호를 내지르고 있었다.
‘다들 겁이 없네…….’
그때 갑자기 셔틀이 뭔가 밟은 듯 위로 크게 튀어 올랐다.
“끄아악!”
“우와아~!!!”
환호하는 정하율과 상반되게 질겁한 지수가 단단한 팔을 더 꽉 끌어안았다. 어쩐지 일반적인 안전벨트가 아니라 어트랙션에서 사용하는 안전 바처럼 양쪽 어깨를 압박하며 다리 사이로 넣어 꽉 고정한다 싶었는데, 이런 스릴이 있을 줄이야…….
격한 이동 방식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품고 있을 때, 큰 손이 지수의 가느다란 허벅지를 덮듯이 부드럽게 잡아 왔다. 지수는 반사적으로 손의 주인을 바라봤다. 정하진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지수를 내려다보며 허벅지를 꾹 눌러 주었다.
“…….”
다들 환호하며 즐기는데 혼자 겁먹은 것처럼 보일까 싶어 괜찮다는 듯이 웃으려 했지만, 그때 또 셔틀이 크게 튀어 올랐다.
“으헉!”
중간중간 몸이 붕 뜨고, 셔틀이 뒤집히는 게 아닌가 싶은 정도로 격한 운전이 이어졌다. 다행스럽게도 정하진이 허벅지를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눌러 준 덕분에 지수의 몸은 좀 전처럼 덜컹거리지 않았다. 옆자리 정하율은 오히려 엉덩이가 살짝 떨어졌다 내려오니 더 신이 난 것처럼 보였지만.
대격변 전, 사막을 달리는 광신도들이 나오는 영화가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신전까지 1등으로 도착하는 셔틀 팀에 상품이라도 걸린 건가 싶었다. 각 셔틀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린 덕분에 신전까지 도착한 데는 3분 정도가 걸렸다.
‘체감상 30분 같았어…….’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정하진에게 부축받아 땅으로 내려온 지수는 출발할 때와 달리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토토 역시 깃털이 전부 뒤로 넘어가 오목눈이라고 하기엔 퍽 희한한 꼴을 하게 되었다. 정하율은 그런 토토의 깃털을 하나하나 정리해 주며 키득거렸다.
투어 팀은 인솔자를 따라 신전 내부로 들어갔다. 팸플릿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신전을 보고 감탄하느라 모두 바쁜 와중에 지수는 그중에서도 거대한 벽화에 시선을 빼앗겼다.
“…….”
가장 처음 나온 벽화는 새카만 그림자 같은 괴물에게 습격당해 불타는 궁전과 눈물 흘리는 인간들의 모습이었다. 하늘엔 날개 달린 몬스터가 날아다니고, 어린아이는 피눈물 흘리는 부모의 품에 안겨 늘어져 있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법한 벽화였다. 그런데 두 번째 벽화는 조금 달랐다. 전쟁과 참혹한 벽화와 달리 평온한 초원이 나왔다. 푸른 초원 언덕엔 한 남자가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는데, 그는 풀 뜯는 양 떼를 지켜보고 있었다.
“양…….”
지수의 눈이 가늘어진 순간. 정하진의 어깨에 목말 탄 정하율이 세 번째 벽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형, 저기 봐. 아까 밖에서 본 석상에 나온 요정인가 봐.”
세 번째 벽화 역시 알록달록한 꽃밭이었는데, 귀가 길고 뾰족한 요정이 가득했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투명한 날개를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요정들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요정들 사이에 유독 큰 날개를 가진 요정이 보였다.
‘……요정. 정령?’
순간 지수는 정하진과 정하율에게서 떨어져 네 번째 벽화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이동했다. 네 번째 벽화엔 아까 목동이 있던 풀밭처럼 보이는 곳으로 날아오는 거대한 드래곤이 보였다.
“목동, 정령, 드래곤…….”
작게 중얼거린 지수가 제게 다가오는 정하진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정하진 역시 지금 지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이 벽화를 바라보는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다음에 이어진 벽화들의 내용은 드래곤과 만난 목동이 날개가 큰 정령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내용처럼 보였다. 셋은 여러 거대한 몬스터를 물리치고, 아름다운 자연을 걷고, 산을 넘고,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첫 번째 벽화에 나왔던 전쟁에서 승리한다. 목동은 검을 내려놓고 지팡이를 들고 떠난다. 정령은 하늘로 날아가고 드래곤은 둘이 떠난 장소에서 오랜 세월 깊은 잠에 빠진다.
“정하진 에스퍼……. 이거……. 이거 설마…….”
작은 목소리를 그를 부르자, 더 가까이 붙은 정하진이 지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잡으며 말했다.
“예. 저도 한지수 가이드와 같은 걸 떠올리고 있는 것 같군요.”
두 사람이 의미심장한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정하진의 어깨에 앉아 있던 정하율이 “어?”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보이는 벽화부터 찬찬히 쭉 둘러보더니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형! 이 벽화! 형이 나 자고 있을 때 읽어 줬던 책이랑 내용 비슷하지 않아!? 다 기억나진 않지만, 그래도 대충 드래곤이랑 목동이랑 정령왕이 같이 여행하는 내용이었잖아?”
“…….”
들뜬 하율의 목소리를 뒤로한 지수는 가장 마지막 벽화가 목동이 떠난 자리에 엎드린 드래곤이 잠들어 계절이 바뀌는 장면이라는 걸 확인하고 다음 벽화를 보기 위해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다음 벽화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로 가는 길 앞에서 길드 에스퍼들이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이 뒤로는 이동하실 수 없습니다. 붕괴된 구역으로 이어져 있어 위험합니다.”
“아, 붕괴가 심한가요? 아까 셔틀 타고 올 땐 무너진 부분은 보이지 않아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지수가 차분하게 묻자, 길드 에스퍼들 역시 그 정도는 답해 줄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밖에서 볼 땐 멀쩡해 보여도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완전히 무너져 있습니다. 위험하니 이 뒤로는 가지 마십시오.”
길을 막고 있는 에스퍼들에게 알려 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지수는 미미하게 굳은 얼굴로 정하진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런 우연이 다 있다고 마냥 신기해하며 까르르 웃는 정하율과 달리 지수는 혼란한 시선으로 벽화들을 재차 확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벽화의 내용과 구성이 전부 정하진이 읽어 주었던 전통 판타지 소설 <정령왕과 드래곤 로드와 어떤 목동>을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