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드래곤과 용사와 요정 1
오늘은 정하진, 정하율, 그리고 토토와 함께 던전에 입장하는 날이었다.
정확히는 ‘던전 투어’였다. 던전 투어는 보스를 제외한 필드 몬스터 공략이 모두 끝난 D급 혹은 그 이하 던전에 입장해 가이드를 따라 특정 구역을 구경하고 나오는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에선 안전을 이유로 열리지 않는 이벤트지만, 호주와 몇몇 국가에서는 각 대형 길드가 맡아 관리하며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었다.
물론 보스가 살아 있어 위험하지 않겠냐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상품이기도 했다. 그러나 투어 용으로 개방하는 던전의 등급이 워낙 낮은 데다가 보스 방 입구를 A급 각성자들이 지키고 있어서 안전하다는 게 이벤트를 담당하는 각 길드의 입장이었다. 애초에 일반 관광 입장은 던전 입구 근처에서만 머물기 때문에 보스 방까지 갈 일 자체가 없다는 것도 그 의견이 힘을 얻는 데 한몫했다.
거기에 던전 내부를 볼 수 있고, 투어 도중 소동물형 반려 몬스터를 받을 수 있는 추첨 이벤트도 있다 보니 당연하게도 이 관광 상품은 비각성자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많았다.
‘어지간해서는 투어 티켓 구하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들었는데…….’
그 구하기 힘들다는 티켓을 정하진은 누군가에게 연락 한 번 하는 것만으로 구해 왔다. 정하율이 ‘나도 던전 구경해 보고 싶어……. 우리 넷 중에 나만 던전 못 가 봤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는 이유로 말이다.
저기서 정하율이 말한 ‘우리 넷’은 정하율 본인을 포함해 정하진과 한지수와 토토였다. 그 말을 듣자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우리 넷’에서 배제당한 포포가 방긋 웃는 얼굴을 패널에 띄우며 ‘저도 들어간 적 없어요, 정하율 님.’ 하고 상냥하게 위로해 주기도 했었다. 다만 정하율은 그 말은 아예 못 들은 척하고 제 형을 애절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정하율의 앙큼한 반응을 떠올린 지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제 동생 한지율도 본인에게 불리한 이야기가 나오면 저런 식으로 못 들은 척하거나 말을 돌리곤 했는데, 애들은 다 비슷하구나 싶었다.
결론적으로 던전 투어에 참여하게 된 정하율은 저녁 내내 들떠 있었다. 그리고 던전에 들어가면 뭘 하고 싶은지도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때 나눈 대화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억이 저 부근에서 또 끊긴 모양이었다.
약 부작용은 여전했다. 여전할 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기억이 소실되는 빈도가 늘어난 것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지수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제 곁엔 한결같이 든든한 정하진이 있었으니까.
‘뭐,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으면 다시 알려 주겠지.’
저녁 약을 먹기 전후로 기억이 흐릿한 일이 많다 보니, 중요한 대화를 나눴을 경우 정하진이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한번 더 짚어 주기로 했다. 정하진이라면 어길 약속을 굳이 할까 싶어 먼저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면 중요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의미로 생각하기로 한 터였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정하율은 아침잠이 많아 늦게 일어날 테니, 정하진과 모닝 커피를 마시고 씻고 준비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던전 투어에서 특별 간식을 제공한다고 했으나, 양에 차지 않을 수도 있으니 간단히 아침을 먹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방문을 연 순간.
“……!!!”
지수는 저도 모르게 멈춰 선 채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거실 소파에 정하율이 앉아 있었다. 그것도 아이템을 사용해 4~5살 정도 어린아이 모습으로 변신한 상태로.
“형! 잘 잤어?”
벌떡 일어나 묻는 정하율은 벌써 다 씻고 준비를 끝낸 것 같았다. 귀여운 아동용 코트도 갖춰 입고, 비각성자도 사용할 수 있게끔 개량한 인벤토리가 적용된 작은 도토리 가방까지 메고 있었다.
“……잘 잤어. 하율이도 잘 잤어?”
“응! 형은 지금 씻고 있어! 형도 씻어!”
“어, 그, 그래. 나도 금방 씻을게……. 그런데 하율아. 투어는 10시부터 아냐?”
혹시 제 기억이 혹시 잘못된 건가 싶어 조심스레 묻자, 정하율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투어 입장 전에 일찍 가면 A급 에스퍼들이랑 사진 찍고 사인도 받을 수 있대! 그 보스 룸 지키려고 투어 전에 먼저 들어가는 에스퍼들! 근데 이건 선착순이래! 그래서 빨리 가야 해!”
“…….”
하율아, 네 형이 SS급 에스퍼잖아. 심지어 호주엔 SS급 에스퍼가 없어서 네 형에게 SS급 레이드 용병 참여 의뢰한 적도 많았다는 말이 목울대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정하율이 제 형이 SS급 에스퍼라는 걸 모를 리도 없고, 아마 따로 보고 싶은 에스퍼가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다만 정하율의 저 들뜬 모습을 보고 이 시간부터 샤워 중인 정하진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정하율은 지수를 재촉하는 대신, 천진난만하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저 눈빛에서 빨리 씻으라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아 지수는 웃음을 참으며 토토를 내밀었다.
“형 씻고 나올 동안 토토랑 놀고 있어. 금방 씻고 나올게.”
“응!”
지수는 잔뜩 들뜬 정하율에게 토토를 맡기고 욕실로 들어선 후에야 참고 있던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 * *
“우와~! 형, 저기! 저기 줄 서나 봐!”
지수는 정하진에게 안긴 정하율이 저리 흥분하다 떨어질까 싶어 옆에 찰싹 붙어 걸었다. 정하진이 제 동생을 놓칠 일은 없겠지만, 한 팔로 안고 있는 데다 정하율이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고개와 몸을 휙휙 돌리고 있어 괜히 보는 제가 다 불안했다.
오목눈이 새로 변한 토토도 혹시나 위험 요소가 있나 파악하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경계했다. 생각보다 각성자가 많았다. 대부분 이번에 입장하는 던전을 관리하는 길드에서 파견 나온 이들인 것처럼 보였다.
“괜히 안전하다고 장담한 게 아닌가 보네요. D급 던전에 에스퍼가 이리 많을 줄은…….”
“게이트 주변을 관리하는 에스퍼들은 C급 수준이고, 내부 진입팀은 B급부터 A급이군요.”
주변 환경에 대한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그리팅 줄로 다가가자 관리하던 에스퍼가 흠칫하며 정하진을 올려다봤다. 기운을 갈무리했지만, SS급 에스퍼의 압박감이 느껴졌는지 긴장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에스퍼는 세 사람의 목에 건 투어 목걸이를 보곤 능숙하게 요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진 찍고 사인 받는 것도 돈이구나.’
투어 참가자면 당연히 무료일 줄 알았는데, 안일했었나 보다. 정하율이 원하는 대로 최고 옵션 상품으로 결제한 정하진이 이번엔 지수를 바라봤다. 혹시 당신도 할 생각 있냐는 듯한 그의 얼굴을 본 지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쓰게 웃어 버렸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던 지수는 정하율의 말대로 일찍 오길 잘했다 싶어졌다. 주변은 완전 축제의 현장이었다. 게이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다양한 푸드 트럭이 모여 있었고, 그보다 더 먼 곳엔 영화에서 자주 보던 축제형 놀이공원도 있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돌아가는 관람차를 지켜보던 토토가 “삐!” 울며 꽁지를 세웠다. 타 보고 싶다는 듯이 눈을 빛내는 모습을 본 지수는 쿡쿡 웃으며 토토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탈까?”
“삐!”
“형, 나도 저거 토토랑 탈래!”
“하율이 무서운 거 못 타잖아. 괜찮아?”
정하진이 다정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정하율은 문제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있으니까 괜찮아. 혹시 무너져도 형이 구해 주겠지~!”
“하율아. 무너진다는 소리 하지 마. 난 무서워.”
지수가 솔직하게 말하며 끼어들자 정하율과 토토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정하진은 여전히 웃지 않았지만, 다정함 가득한 눈빛으로 지수를 내려다봤다. 그리곤 가슴이 간질거릴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율이 말대로입니다. 무너져도 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아, 무너진다는 소리 하지 말라니까요.”
“삐삣! 삣!”
“뭘 걱정합니까. 혹시 튕겨 나간다고 해도 제가 꼭 낚아채겠습니다.”
“아, 진짜~ 사람 낚을 생각하지 말아요. 그리고 안 무너져요. 안 튕겨 나가요.”
“푸흣~!”
“삐히힛~!”
정하율과 토토가 또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늘은 아직 흐렸지만, 겨울치고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었다. 하늘만 맑았더라면 놀기 좋은 날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하는 동안 정하율은 아까 받은 팸플릿을 꺼내 펼쳤다. 던전 투어 일정과 던전 내에서 투어로 방문하는 곳, 이동 수단 등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함께 팸플릿 내용을 보던 지수는 던전 내부를 표현한 그림을 본 순간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뭐지?’
이번에 열린 던전은 ‘고대 도시’라고 불리는 던전이었다. 고대 도시란 다른 던전에도 종종 붙는 이름인데, 말 그대로 고대 문명으로 보이는 것 같은 건축물이 보이거나 문명의 흔적이 있는 던전을 주로 저렇게 부르곤 했다.
팸플릿에 그려진 삽화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올 것 같은 거대한 신전과 그 앞을 지키듯 서 있는 석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거대한 드래곤 석상 위엔 검을 찬 인간과 요정으로 보이는 작은 종족의 석상도 있었다.
<관람 포인트 1. 드래곤을 탄 인간 용사와 요정의 석상>
거대한 드래곤 석상의 높이는 무려 70M! 드래곤의 위에 올라탄 인간과 요정의 석상 포인트까지 비행 아이템으로 한 바퀴 순회 예정. (던전 내부 날씨 변동 및 특이 사항 발생 시 도보 관람으로 변경될 수 있음) 드래곤의 눈은 루비로 추정되는 거대한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설명을 다 읽고 다시 삽화로 시선을 돌린 지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낯이 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