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극비 임무 4
기분 좋은 꿈이다.
이 사실을 어렴풋이 느낀 순간, 한지수는 자신이 꿈을 꾸는 걸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이대로 꿈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척하고 있으면 이 꿈이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주변에 사계절 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해 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렇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통일성 없이 섞여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탓에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자각몽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이유는 마음대로 몸이 움직여지지도 않았고, 하고픈 말을 할 수도 없었던 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수는 행복했다.
이 꿈이 영원했으면 하고 바랐다. 이유는 하나였다. 곁에 너무나도 그리운 이가 있었으니까. 문득 정신 차려 보니 나란히 앉아 제게 어깨를 빌려준 이와 손을 깍지 껴 잡고 함께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바다가 어딘가 이상했다. 아니, 바다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넓은 들판이었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이 마치 파도 넘실거리는 바다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바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수풀이 모습을 바꾼다. 마치 난 바다라고 말하고 싶어 하듯이. 푸른 물결로 바뀌는가 싶더니 이내 새카만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람에 흩날리던 들판이 어느새 은하수 가득한 밤하늘로 변한 걸 본 한지수는 작게 웃었다. 이 사람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그것이 비록 꿈에서 보여 주는 엉터리 바다든, 들판이든, 우주든 강재윤과 함께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 외엔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한지수는 은하수가 반짝이는 길 저 끝엔 뭐가 있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괜한 질문을 해서 이 꿈을 해치게 될까 봐. 그래서 꿈에서 깰까 봐. 다만 최대한 조심조심하며 맞잡은 손을 내려봤다.
상처가 많은 큰 손, 그중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와 똑같은 반지였다. 같은 반지를 나눠 낀 후 두 사람 모두 단 하루도 뺀 적 없는 반지. 그 반지를 보자 고개 들어 이 크고 따뜻한 손의 주인을 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그래서 한지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상대는 내내 저만 보고 있던 건지 고개를 들자마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맞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생생한 체온과 달리 흐릿하고 이목구비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한지수는 그가 누군지 잘 알기에 환하게 웃었다.
그리곤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제 슬슬 꿈에서 깨게 되리라는 것을.
한지수는 보고 싶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 그와 함께 보낸 수많은 날 중 평범한 어느 하루의 순간으로 여겨지길 원했기 때문에.
그런 한지수의 바람을 눈치챈 걸까? 이대로 꿈에서 깨겠거니 싶었던 순간이 지나도록 어째서인지 꿈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뭐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한지수가 눈을 뜨려던 순간.
“괜찮다. 더 자라.”
‘……!’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근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제 곁에 있는 소중한 이의 목소리는 확실히 아니었다.
누구지?
아는 목소린데?
누구였지?
“신경 쓰지 말고. 더 자.”
‘……아. 기억났다. 안식의 신…….’
“그래. 나다. 걱정하지 말고 자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자. 조금 더 행복한 꿈을 꾸도록 해.”
그의 말이 주문이 되었던 건지 한지수는 그대로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젠 꿈속에서 하늘을 날기도 하고 바다 위를 걷기도 했다. 갑자기 훅 치솟는 땅으로 파고들자 별의 바다가 나타나 폭포처럼 쏟아지는 유성 사이를 유영했다. 사랑하는 이와 손을 맞잡은 채.
말도 안 되는 행복한 꿈 덕분에 한지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안식의 신은 조심스럽게 한지수의 기억에 섞인 작은 조각들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섞여선 안 되는 기억의 조각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제거하던 한 순간, 마냥 행복하게 웃던 한지수가 얼굴을 찡그렸다.
“집착하지 마라. 이건 네 기억이 아니다.”
거미줄 위에 걸쳐진 또 다른 거미줄을 제거하듯 조심스러운 작업이었다. 여기서 삐끗하면 건드리면 안 될 것까지 건드려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더 골치 아파진다는 걸 잘 아는 안식의 신이 한지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리곤 그답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로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아가. 이건 어쩌다 섞인 거야. 네가 가지고 있지 않아도 돼. 괜찮아.”
나긋나긋하고도 다정한 어조 덕분인지 살짝 찌푸리고 있던 한지수의 얼굴이 다시 부드럽게 풀어졌다. 기억을 대체할 더 구체적인 꿈을 선사하고 싶었지만, 섣불리 꿈을 조작했다간 오히려 안에서 엉키게 될까 그저 조심스럽게 파편만을 뽑아냈다.
이내 작은 기억의 파편들이 한지수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파편은 침대에 누워 종일 햇빛도 보지 않고 울던 날의 한지수를 담고 있었다. 또 어떤 파편은 정하진과 병실에 앉아 책을 읽는 날이 한지수를 담고 있었다.
천천히 추출된 파편들이 허공을 부유한다. 안식의 신은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 작은 인간에게 섞인 불순물을 뽑아내려 애썼다. 깊은 곳에 박힌 파편 중 하나를 겨우 뽑아내자, 그 안에서 한지수의 비명이 울린다.
파편이 고통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깊은 슬픔을 토해 내며 웅- 웅- 진동한다. 안식의 신은 그 파편이 제거된 자리 옆 다른 파편 역시 제거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다른 파편은 마치 한지수의 기억에 융합되고 싶다는 듯이 반항하며 나오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게 필요한 녀석에게 돌려준다고 약속하마. 그러니 반항하지 말고. 어서 내게 맡겨.”
말한다고 알아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안식의 신은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그렇게 어르고 달랜 덕분일까? 마침내 한지수의 정신에 꽤 깊은 곳까지 파고든 조각 하나를 꺼내는 데 성공했다.
꽤 큼지막한 조각은 뽑혀 나오자마자 새하얀 공간에 우울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고작 파편 하나가 내뿜는다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독히 많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다른 후원자가 본다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지독한 슬픔이 쌓일 수 있을까 의아해할 정도로 많은 슬픔이었다.
만일 운이 나빠 이 정도 슬픔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꼈다면 불길하니 싹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한지수라는 존재 자체를 지우려 들지도 모를 만큼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안식의 신은 누구보다 한지수를 이해했다. 그 역시 사랑하는 이가 없는 세계를 홀로 걸으며, 너무도 많은 시간을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버텼던 적이 있었으므로.
한지수를 온전히 이해하는 그가 신중하게 처리한 덕분에 안식의 신은 가장 위험한 위치에 박힌 파편 하나를 더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추출한 파편에선 멍한 얼굴로 터덜터덜 걷는 한지수의 모습이 보였다. 안식의 신은 한지수의 저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파편에 각인된 기억만큼은 잘 알았다.
파편에 남은 한지수는 고통에 울지도 못한 채 초점 없는 눈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자신이 걷는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모른 채 그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저 멀리서 쿠구구궁- 우르릉- 굉음이 울리기 시작한 후에야 눈에 이채가 돌았다.
먼 곳에서부터 들리던 파멸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한지수의 지척까지 다가왔건만, 파편 속 한지수의 눈빛엔 두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기 시작한 세상의 끝을 발견한 후에야 환하게 웃는다.
“쯧.”
그 무엇보다 절망스러운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웃게 된 아이를 지켜보던 안식의 신이 혀를 찼다. 못마땅한 기색을 애써 억누르며 추출한 파편을 전부 은은한 빛을 내는 유리병에 담아 마개를 닫았다. 병엔 조금 전 넣은 것과 비슷하면서도 각각 다른 크기의 조각이 절반 정도 차 있었다.
조금 더 추출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짧게 한숨을 내쉰 안식의 신은 잠든 한지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썩 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신기한 일이지.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를 아주 작은 티끌에 불과할 텐데, 그 티끌 하나 때문에 순리의 흐름이 어긋나기 시작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
꿈에 취한 아이가 제 푸념을 듣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는 안식의 신은 더 말하는 대신 꿈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모든 생명의 영원한 잠을 관장하는 어린 신이 선사한 꿈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그의 아이가 작게 웃는다.
“잘 자라. 이미 잘 자고 있지만. 더 잘 자.”
나지막한 속삭임이 귓전을 울린다.
천천히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부드러운 손길에 한지수가 부스스 의식을 떠올렸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뭐가 고마웠더라?
의아함이 번진 순간, 한지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도 잊은 채 눈을 떴다. 막 눈을 떠서 시야가 흐릿했지만, 제 앞에 보이는 아이보리 색의 덩어리를 알아본 한지수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토토야…….”
“쮜!”
“잘 잤어?”
“쮜잇! 쮜이잉~!”
“으응, 아빠도 잘 잤어. 엄청 좋은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대체 무슨 꿈을 꿨기에 정신을 차리기도 전부터 웃고 있던 걸까? 신기한 일이었다. 게다가 머리도 맑아진 기분이었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아침일 텐데, 무엇이 달라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꿈에서 지율이나 형들이라도 만났나?’
저를 행복하게 웃게 만드는 사람은 세상에 몇 없으니, 타당한 추론이었다. 대체 무슨 꿈인지 기억나지 않는 게 아쉬웠지만, 이상하리만큼 후련하고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이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늘 제 머릿속에 희미하게 껴 있는 것 같던 안개가 걷힌 그런 기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드리워져 있던, 희뿌옇고 탁한 장막이 사라진 것 같은 그런 기분이라 해야 할까.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자,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 보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런 하늘을 보면 하루의 시작이 우중충해 울적하다고 느꼈을 텐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날이 흐리구나, 정도로 넘기며 담담하게 오늘 일과를 떠올릴 수 있었다.
‘비라도 내리려나…….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오늘은 종일 던전 안에서 보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