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11화 (111/172)

#111.

극비 임무 3

세 번째 기회라는 말을 들은 안식의 신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평소의 그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만약……, 내가 이번에 또 실패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지?”

“오, 나의 벗이여…….”

눈앞에 아름다운 띠를 두른 행성 머리에겐 눈코입이 없었지만, 안식의 신은 그가 자신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덩달아 침울해진 행성 머리는 잠시 말을 고른 후 이건 제 추측이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번에도 지구별 구제에 실패하면…… 말한 대로 다음은 없을 걸세. 위에선 나의 벗처럼 유능한 어린 신이 더는 조각나길 원치 않을 테니까.”

“…….”

안식의 신이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행성 머리는 그런 안식의 신에게 상체를 더 가까이 숙였다. 행성을 두른 띠가 안식의 신의 이마와 볼에 스치며 회전했다. 안식의 신은 간지럽다며 질색했지만, 그는 여전히 얼굴을 가까이 기울인 채 직전보다 진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만약 그대가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최악의 경우…… 위에선 그대를 봉인해 두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깨울 수도 있겠지. 벗의 마음속에 후회라는 감정이 흐려지고, 더는 별에 대한 애착을 갖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말일세.”

“만약 내가 후회를 지우지 못하고, 애착을 버리지 못하면. 영원히 봉인되는 건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어쨌든 만일을 대비해야 한다네.”

“난 그 ‘대비’라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내 힘닿는 대로도 아니고, 한 사람만 빼 올 수 있다는 게 말이 돼?”

“규칙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어쨌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후보를 확정해 두게. 그대는 아마 불의 가호를 받는 그 아이로 이미 확정 지었겠지만, 막상 선택의 순간이 오면 망설여지기 마련이니.”

행성 머리의 말에 안식의 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구제에 실패해 소멸하기 시작한 세계에서 후원자의 권한으로 구출할 수 있는 건 오직 단 한 사람. 아무리 대단한 절대자라고 해도 그 많은 생명체 중 오직 하나의 생명만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이 절대적인 규칙 때문에 안식의 신 역시 후보를 미리 가슴에 새겨 둔 터였다. 그 후보는 행성 머리가 말한 불의 가호를 받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마음에 정해 둔 후보 외에 신경 쓰이는 후보도 많아서, 제 성미에 맞지 않게 다른 후원자들과 친분을 다져 두었다. 혹시나 지구별의 구제에 실패할 경우, 재앙을 막지 못한 별이 그대로 조각나기 직전에 하나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서.

하지만,

“똑같은 실패는 없어.”

직전까지 침울해하던 것에 비해 안정감 있게 들리는, 평소 안식의 신의 목소리였다.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은 것처럼 단단해진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 변화를 느낀 행성 머리는 만족한 듯이 안식의 신의 옆에 나란히 누워 배 위에 손깍지를 올린 채 나긋하게 웃었다.

“하하. 그렇지. 내 벗에게 똑같은 실패는 없지.”

“그래. 한 번 실패했으면 됐어. 그리고 알잖아. 난 편법에 능해.”

“그것도 맞네. 내 벗은 경이로울 정도로 편법에 능하지. 하지만, 벗이여. 위에서도 몰라서 방치하는 건 아닐세. 물론 모르는 것도 몇 개는 존재하겠지만, 영원히 모를 수는 없는 일이고.”

안식의 신은 짧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초월신들이 제 편법을 눈감아 주고 있는 건 저도 알고 있었다. 이러다 대대적으로 제가 쓴 수들이 전부 드러나게 되면 아마 징계받게 되리라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의 신은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몰래 쥐여 준 그 위태로운 편법이, 홀로 다른 시간 선을 걷는 어떤 이에게 있어선 유일한 버팀목이 되기도 하니까.

* * *

거대한 이종족 시체가 까마득하게 쌓인 협곡.

거인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산을 응시하던 제자는 문득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르뒤옌 행성에 도착해 행성 구제를 시작한 지 대략 2년째. 각기 다른 우주의 시간 선들은 잔뜩 꼬여 있는 탓에 지구의 시간은 지금 얼마나 지났을지 알 수 없었다.

-제자 네가 지구 소식을 조금이라도 확인할 수 있도록 내가 편법을 써 보마. 시간이 좀 걸릴 거다. 기다리거라.

지구와는 채도가 조금 다른 연보랏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스승이 했던 말을 곱씹은 제자는 문득, 희미한 소음에 고개를 돌렸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무슨 소리일까? 그 궁금함이 채 가시기도 전, 허공에 익히 아는 활자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2…

월…

2…

일…

맑…

음…

[2월 2일 맑음]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허공에 생겨난 활자가 문장을 완성하자마자 그대로 무너지며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제자는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다 이내 제 스승이 말한 편법이 저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혹시나 놓치는 글자가 있을까 봐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으니 또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글자가 천천히 생겨났다.

[1. 꿈을 꿨는데, 안식이 일기를 열심히 쓰라고 시켰다. 원래도 재윤이 형이랑 약속해서 쓰고 있던 건데, 왜 남의 일기를 쓰라 마라 시키는 건지 모르겠다. 내 사생활이다. 혹시나 이 글을 훔쳐보고 있다면 보지 마라. 안식. 이건 재윤이 형과 나의 약속이니까.]

하나의 문장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걸 반복적으로 읽어 내던 제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제 스승의 편법은 아마 후원자 내에서 최고일 게 분명했다. 어떻게 또 이런 루트를 만들어서 제게 보여 주는 걸까. 어찌 보면 정말 제자를 굴리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래서 저녁에 결국 토토를 훈육했다. 혼내고 나서 미안해서 꼭 안아 주고 뽀뽀도 10번 해 주고 간식도 많이 줬다. 이러면 혼내는 게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 재윤이 형이라면 아마 효율적으로 훈육하지 않았을까? 늘 그렇지만, 오늘도 재윤이 형이 보고 싶다. 보고 싶은 마음은 정말 평생 사라지지 않나 보다.]

제자는 바스러지며 증발하는 활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활자는 제자를 약 올리듯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렸다.

“하…….”

야속한 일이었다.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몇 번이고 시도한 제자는 결국 포기한 채 거인의 시체 위에 걸터앉아 이어지는 활자를 눈에 담았다.

그렇게 제자가 걷는 별의 세월은 쏜살같이 흐르고,

사각사각- 사각사각-

닿을 수 없는 하늘에 종종 제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제자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삼키며 미소 짓곤 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홍해가 피로 물든 날에도,

사각사각- 사각사각-

벼락이 멈추지 않고 태풍이 휘몰아치던 날에도,

사각사각- 사각사각-

낯선 별의 종족들이 제자를 믿고 따르기 시작한 날에도,

사각사각- 사각사각-

행성에 닥친 재앙의 목을 꺾은 날에도 제자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제자 말고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보여 주는 문학을 홀로 독점하며.

또 많은 계절이 바뀌고,

늘 그렇듯 거대한 재앙을 죽인 제자는 저를 향해 환호하는 이들을 모두 물린 채, 홀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조금이라도 편히 눈에 담고자, 왕의 정원에 누워 있던 제자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읽었던 날로부터 몇 달 만에 울리는 소리에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별이 무수한 밤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으니, 늘 그렇듯 동글동글 예쁜 글씨가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5월 12일 흐리다 맑음]

제자는 지난 8년간 제 스승이 쓴 편법이 아직 막히지 않은 걸 보며 피식 웃었다. 가능하면 허공에 나타난 글자가 사라지기 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런 시도로 인해 이 편법의 존재가 들킬까 하는 마음에 오늘도 그저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1. 호주에 무사히 도착했다. 정하진 에스퍼가 산 집은 바다 근처에 있는 고층 집이었다. 바다도 보이고 야경도 끝내준다. 토토랑 하율이랑 정하진 에스퍼랑 포포랑 다 같이 거실 바닥에 앉아 야경을 감상했다. 아름다웠다. 높고 야경도 멋져서 그런지 재윤이 형 집이 떠올랐다.]

늘 그랬던 것처럼 혹시나 놓치는 글자가 있을까 봐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으니, 또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글자가 천천히 생겨났다.

[2. 예전에 재윤이 형이 호주 커피가 맛있다고 했었는데, 진짜였다. 건물 1층 카페에서 파는 커피가 정말 맛있었다. 그런데 저녁에 커피를 마셔서 그런지 일기를 쓰는 지금도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약을 먹으면 금방 잠들겠지? 오늘도 좋은 꿈을 꿨으면 좋겠다.]

제자는 오늘을 포함해 꽤 오랜 세월 동안 하늘을 보며 종종 웃고, 입술을 꾹 깨물기도 하고, 중간중간 누군가에게 대답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르뒤옌 행성의 선민 종족 사이에서는 새로운 별의 지도자가 종종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3. 하율이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내일 바다에 갈 것 같다. 토토는 벌써 전용 유니콘 튜브를 꺼내 정하진 에스퍼에게 내밀었다. 예전엔 저 튜브를 재윤이 형이 불어 줬었는데…… 좋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젠 형을 생각하며 일기를 쓰고, 보고 싶다고 속으로 불러도 눈물을 참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보고 싶은 마음이 작아진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형이 너무 보고 싶다.]

“……나도 마찬가지야.”

제 목소리가 닿지 않을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제자는 늘 그래 왔듯이 오늘도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아 읊조린다.

“나도 매일 너를 생각해. 하루도 널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어. 보고 싶어.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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