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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10화 (110/172)
  • #110.

    극비 임무 2

    비밀 임무 내용을 들은 정하진의 눈매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안식의 신은 피후견인의 저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고도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들키면 안 돼. 자연스럽게 넣어. 아, 그렇지. 이불 뒤집어쓰고 넣는 게 안전할 거야. 혹시나 지나가는 신이 보면 곤란해지니까.”

    “…….”

    “뭐. 왜 그리 불경한 눈으로 보는 거냐?”

    “……지금 혹시 농담하신 겁니까?”

    “아니? 진심이거든? 이것도 다 필요해서 그래.”

    “드시고 싶으신 거면 그냥 드시고 싶다고 솔직히 말씀하시면 될 것을…….”

    “아니라니까!? 최근 나한테 붙어 간 보는 후원자 놈들이랑 한 내기에 필요한 거야! 그것들이 지들 눈에서 눈물을 쏙 뽑을 만큼 마음에 동요를 일으킬 수 있다면 지구에 도움을 주겠다고 하잖아. 그러니 지구의 매운맛으로 눈물 나게 해 줘야지. 안 그래?”

    “하아…….”

    결국 내내 참아 왔던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그것도 질색하는 기색을 잔뜩 담아 말이다. 안식의 신은 제 피후견인이 황당해하는 걸 지켜보며 뭐 그리 재미있는지 히죽 웃더니 그의 넓은 어깨를 토닥였다.

    “뭐, 신파를 좋아하는 멍청이들이긴 해도, 나보다 훨씬 먼저 후원자가 된 녀석들이라 힘만큼은 어마어마하거든. 내 편으로 끌어들이면 확실히 지구에 도움될 만한 녀석들이니까. 네가 좀 협조해.”

    “이게 정말 지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걸 먹여서 눈물을 짜내는 게 과연 같은 편이 될 수 있는 길일까요?”

    “어쨌든 눈물만 짜내면 내기에선 내가 이기는 거니까.”

    매운 치킨 볶음면은 그렇다 치고, 레몬 젤리는 그럼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모르겠으나 정하진은 일단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절대신이라 불리는 푸른 달, 붉은 달, 은하수, 태양의 신을 제외하면 안식의 신만큼 유능한 신도 드문 편이니까.

    게다가 지구라는 별의 존망에 대해서만큼은 안식의 신 역시 자신 못지않게 진심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다소 얼토당토않은 심부름이라도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었다. 그게 비록…….

    ‘아니. 아니다. 생각을 말자. 이게 확실한 방법이니까 시키는 거겠지.’

    또다시 눈을 질끈 감은 정하진이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크게 쉬는데도 가슴 밑바닥에 고인 숨이 빠져나가지 못하는지 마음이 답답했다. 그런 피후견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식의 신은 마치 콧노래를 부르듯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트레스받지 마라. 만병의 근원이다. 각성자는 화병 안 나는 줄 아나 본데. 각성자가 누구보다 화병 나기 쉬워.”

    스트레스의 원인이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조언한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울컥 치밀 법도 한데 정신적으로 피로를 느낀 탓인지, 그에게 반박할 기운도 없었다. 돌이켜 보니 이 후원자를 마주할 때면 항상 이런 기분이 들곤 했던 것 같다.

    “아, 슬슬 돌아가야겠네. 자. 그럼. 당분간 난 또 바빠질 테니까. 그 주머니 최대한 빠르게 채워 넣고. 음……, 또 뭐 말해야 했더라. 아아, 그래. 네가 보살피는 ‘그 녀석’은 좀 어때?”

    정하진은 이 순백의 공간에서만큼은 그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자제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덕에 기민하게 ‘그 녀석’이 한지수를 말하는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건강? 정신?”

    “음, 정신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내가 저번에 걔를 여기서 봤을 때. 파편이 좀 많이 섞인 것 같아서. 혹시 자기가 모르는 기억이 떠오른다거나, 기시감이 심하다던가 그런 거 말한 적 없어? 전생 같은 게 보인다거나?”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만, 파편이라면…….”

    “어. 네 동생 예시로 말했던 거.”

    안식의 신은 조금 전에 자기가 쉽게 설명해 영혼의 조각이라 말했던 그것이라며 중얼거렸다.

    “과하게 섞이면 기시감 같은 게 자주 들고, 진~짜 재수 없으면 제대로 떠올릴 수도 있어. 그러니 아예 새로운 환경으로 가는 것도 좋지.”

    “지금 마침 호주로 향하는 중입니다만.”

    “걔랑 호주에 간 적은 없지?”

    “……예. 없습니다.”

    “다행이네. 뭐, 어차피 그건 제대로 섞일 수 없는 거라 걔가 가지고 있어 봤자 도움이 안 되거든. 나중에 여기로 불러서 내가 추출하는 수밖에 없겠네.”

    추출이라는 말에 정하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묻고 싶은 게 있는 듯한 모습이었음에도 안식의 신은 그를 무시한 채 손을 저었다.

    “오늘은 이미 한계치가 넘었어. 돌아가.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보자.”

    정하진이 그가 더는 질문에 답할 수 없음을 이해했다는 듯 아쉬운 얼굴로나마 고개를 끄덕이자 그 순간, 안식의 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러자 순백의 세상에서 정하진의 형태가 사라졌다. 형태뿐만이 아니라, 정하진의 뇌리에서 제 얼굴을 본 기억까지 깔끔하게 소멸한 것을 확인한 안식의 신은 제멋대로 흘러내린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며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한지수가 이곳에 오면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털썩 허공에 주저앉아 발라당 누웠다.

    “하아…….”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질끈 감자, 오직 빛만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런데도 안식의 신은 굳이 눈을 뜨지 않았다. 제 근처에 온 이가 누군지 잘 알기에.

    상대 역시 안식의 신이 저를 알은체하지 않았다 해서 서운해하는 대신 그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동안 말없이 눈감은 안식의 신을 내려다보던 이는 장갑 낀 손으로 흐트러진 안식의 신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기 시작했다.

    퍽 조심스럽고도 섬세한 손길에 미간을 더 찌푸린 안식의 신이 슬쩍 눈을 떴다. 그러자 예쁜 고리를 가진 밝게 빛나는 행성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푸른빛과 은빛이 적절하게 섞여 빛나는 아름다운 행성. 그 아래로는 안식의 신과 대비될 정도로 깔끔한 지구의 현대식 정장이 보였다.

    비록 정장 속엔 몸이 없어 텅 비었지만, 옷 위로 드러나는 굴곡만으로도 잘 다듬어진 몸매를 유추하긴 어렵지 않았다. 마치 몸 좋은 투명 인간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깔끔한 스리피스로 구색 갖춰 입은 옷과 장갑만 보더라도 이 행성 머리가 얼마나 인간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지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여긴 왜 왔어?”

    “나의 벗이 아끼는 피후견인은 벌써 돌아갔나 보군. 나도 한 번쯤 만나 보고 싶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아끼는 거 아냐. 흔한 피후견인 중 하나일 뿐.”

    “하하. 말은 그렇게 해도 내게 직접 이런 걸 부탁할 정도 아닌가. 여기, 그가 돌보는 인간의 파편이라네.”

    행성 머리가 손을 허공에 휙 긋자 깨진 수정 조각들이 생겨났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맑은 하늘색 파편을 바라보던 안식의 신이 “쯧.” 하고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이건 고맙다고 해야겠네.”

    “벗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언제든 협력할 수 있지. 그런데 오늘따라 나의 벗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부드러이 물어 오자 안식의 신은 어차피 숨길 생각 없다는 듯, 허공을 부유하려는 파편을 낚아채 제 손으로 흡수하며 말했다.

    “내 피후견인이 그러더군. 자길 제자로 삼았어야 한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의 제자가 아니라. 다 알고 있는 자신을 제자로 들였어야 한다고.”

    “저런.”

    “녀석은 내 선택이 틀렸다고 여기고 있어. 그리고 날 원망하는 듯해. 뭐, 딱히 신경 쓰진 않지만.”

    굳이 뒷말에 힘을 주며 덧붙인 안식의 신은 귀를 살짝 붉혔다. 제 치부를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탓에. 다행히도 행성 머리는 그런 것쯤은 모른 척해 주는 매너를 지닌 이였다. 그는 장갑 낀 손으로 안식의 신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넘겨 주며 보다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만한 아이에게 진실을 알려 주는 것은 어떤가? 너는 제자로 삼기에 너무도 부족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걸 말해 주는 거지.”

    “굳이?”

    “제자로 삼기엔 네 타고난 그릇이 작고. 그대가 지구에서야 강력한 존재일지 몰라도 별의 존망을 논하기엔 너무도 하찮은 존재라서 그럴 수 없었다고 말해 주는 걸세. 그럼 그 아이도 납득하지 않겠나.”

    “…….”

    “게다가 928451번의 시뮬레이션 중 99.99%의 확률로 스승을 거스르는 행동을 저지를 이라는 것도 꼭 덧붙여야겠지. 본인이 타고 태어난 성정이 너무나 올곧았다는 이유만으로 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했고, 그 탓에 고향 별을 파멸로 몰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편이 어떠한가?”

    “……쯧, 됐어.”

    행성 머리가 굳이 구구절절 옆에서 험담해 준 덕분인지, 안식의 신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미묘하지만 확실한 변화를 인지한 행성 머리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소중한 벗을 위해 한 가지 더 소식을 가져왔네.”

    “무슨 소식?”

    “그대의 제자가 또 다음 단계로 승급 예정이라는군. 역대 최단기간 연속 승급이라 위에서도 시끌시끌한 것 같아. 제자의 자질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다 좋은 스승을 둔 덕분이겠지.”

    “그냥 걔가 독한 놈이지, 좋은 스승은 무슨……. 비행기 태우지 마.”

    행성 머리는 안식의 신이 뱉은 말을 잠시 곱씹는 듯싶었다. 그러더니 곧 상체를 숙여 머리를 가까이 기울이며 물었다.

    “비행기는 지구에서 하늘을 날지 못하는 종족을 위해 만들어진 조잡한 발명품이 아닌가? 이상한 말이군. 누구보다 높이 나는 그대를 내가 왜 그런 조잡한 장치에 태우겠나?”

    “어휴. 방금 그건 인간들이 쓰는 말이야. 과찬하면서 드높이지 말라는 소리지.”

    “그런 뜻이군. 어쨌든 난 과찬한 게 아니네. 내 벗은 대단한 존재지. 그대가 한 일은 놀라워. 별을 위해 그대가 보여 준 숭고한 희생도, 그대가 그린 아름다운 미래도 마찬가지고.”

    “…….”

    이 정도면 칭찬을 넘어서 찬사에 가까웠다. 안식의 신은 늘 그렇지만, 이 행성 머리가 자길 너무 추켜세운다며 투덜댔다. 잠시간 쑥스러워하는 안식의 신을 감상한 행성 머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진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벗이여. 이번엔 꼭 실패 없이 성공해야 하네. 아무리 안식의 신, 자네라고 하더라도 위에선 절대로 세 번째 기회는 주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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