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극비 임무 1
정하진은 대격변 전부터 마인드 컨트롤 분야에 있어 뛰어난 역량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거짓말 탐지기도 쉽게 속일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훈련을 받기도 했고, 자가 트라우마 억제요법 등 직업상 배워야 했던 것들이 많았다.
덕택에 요동치는 심장을 금세 가라앉히고, 혼란한 마음은 뒤로한 채 육체적으로나마 안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식의 신이 말하는 ‘제자’를 떠올리면 고된 훈련의 결과가 무색하게 속이 쓰리다 못해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타들어 가는 걸지도 몰랐다. 그를 향한 끓어오르는 증오심 때문에 시커먼 피를 토한 적도 있었으니까.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안식의 신이 선사한 상쾌함은 금세 증발해 버렸다.
안식의 신은 점차 분노치가 높아지며 쉽사리 진정하지 못하는 정하진을 지켜보다 짧게 혀를 차고는 기운을 부드러이 억눌러 주기 시작했다.
“어허. 진정하래도.”
“……후우.”
“그래. 심호흡해. 심호흡. 옳지. 화를 내서 무얼 하겠냐. 다 네 손해다.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일은 그냥 흘려보내.”
“…….”
그 말에 정하진의 기운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제 후원자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여기서 혼자 화내 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되새겼기 때문이었다. 안식의 신도 그걸 알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네 질문에 조금 더 답해 보자면. 확실한 건 아니고, 추측인데. 시간이 그만큼 앞당겨진 건 역시 시간 선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아. 시간 선을 쪼개다 보면 흔히 발생하는 현상이고, 이건 어쩔 수 없어. 이미 네 개입으로 이 시간 선의 축이 조금 흔들렸거든. 그리고 누구라고 말은 못 하지만, 너처럼 심어 둔 다른 애들이 이 세계에 끼치는 영향도 무시 못 해.”
“…….”
“일종의 나비 효과인 셈인 거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뭐든 앞당겨질수록 네가 덜 고생하게 되는 거니까. 그리고 넌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잘해 주고 있어.”
조금 전 정하진의 반응이 신경 쓰였는지, 안식의 신답지 않게 은근히 추켜세워 주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정하진은 기쁘긴커녕 자괴감만 밀려온 탓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전 모르겠습니다.”
“뭐를?”
“차라리 제가……. 모든 걸 다 아는 제가 당신의 제자가 되는 것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사람이 아니라…….”
“흐음~ 아직도 그 소리야?”
안식의 신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정하진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후원자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져 한숨을 쉬었다. 피로한 얼굴로 눈을 뜬 뒤에도 안식의 신과 시선을 맞추는 것만은 피하려는 듯 고개를 떨군 채였다.
안식의 신은 그런 정하진의 기분을 충분히 가늠했으면서 굳이 그의 시선이 머무는 아래로 이동해 옆으로 턱을 괴고 누웠다. 정하진 입장에선 저 악동 같은 모습이 얄미울 뿐이었다. 놀리는 게 분명한 노골적인 얼굴로 씩 웃는 표정이 특히나 그러했다.
또 얼마나 속 긁는 소리를 하려고 굳이 저렇게 얄밉게 구는 걸까……. 벌써 복장이 뒤집힐 것 같았으나, 가까스로 험한 말을 삼켜 냈다. 몇 초간 정하진의 불쾌한 기색 역력한 얼굴을 충분히 감상한 안식의 신이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딱히 네 앞에서 제자를 두둔하려는 건 아닌데. 제자는 지금 다른 행성을 오가며 지구에서 일어났던 것보다 훨씬 큰 대격변을 막고 있다. 지금 지구에서 시간은 얼마나 흘렀지?”
“……5개월 정도입니다.”
“지구에선 5개월이지만, 제자는 혼자 대충 10…… 몇 년이더라? 여튼, 10년 넘게 혼자 저렇게 구르고 있어. 제대로 계산은 안 해 봤는데, 아마 지금 있는 행성이랑 지구랑 구역이 달라서 아마 그 정도 흘렀을걸?”
“…….”
“너도 분명 괴롭겠지. 하지만, 저 녀석이 걷는 길도 쉬운 길은 아냐. 각자 어려움이 있는 길이야. 힘들겠지만 넌 네가 맡은 일만 잘 완수해. 보상은 미리 생각해 두고.”
일부러 ‘보상’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지만, 정하진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여전히 괴롭고, 화나고, 속상하고, 슬퍼 보였다. 안식의 신은 그런 정하진을 향해 뚱한 얼굴로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그래서 내가 몇 번이고 물었잖아. 죽고 싶을 만큼 힘든 길이 될 텐데, 그래도 할 수 있겠냐고. 설마 그게 전부 과장인 줄 알았어?”
“……솔직히 쉬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괴로울 줄은 몰랐습니다.”
괴롭다고, 죽을 만큼 괴롭고 아프다고, 정하진의 마음이 그리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안식의 신은 정하진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슬픔을 지켜봤다. 온몸에서 스멀스멀 검은 아지랑이처럼 스며 나온 온갖 부정의 감정이 정하진의 주위를 감싼 채 일렁거렸다.
그의 몸에서 평범한 사람이라면 미쳐 버렸을 만큼 치사량의 고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식의 신은 정하진이 내뿜어 내는 검은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공중에 휙휙 저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해악이 안식의 신의 검지 끝으로 모여 흡수되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제 몸에서 뭐가 나오는지 볼 수 없지만, 어쩐지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의 손가락을 응시했다. 그가 또 어떤 고등 마법을 부리는 걸까? 가슴을 찔러 대는 것 같던 환상통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정하진의 슬픔을 어느 정도 흡수한 안식의 신이 혀를 내두르며 손을 털었다.
“미련하게 뭐 하러 참고 있냐. 목표에 방해되는 것만 아니면 그냥 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 그럼, 다음 질문은?”
누가 바쁜 후원자가 아니랄까 봐 질문을 재촉하는 걸 보니, 그새 또 가 봐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궁금한 건 언제나 제대로 알려 주지도 않으면서. 이럴 거면 차라리 질문을 받지 말지. 치밀어오르던 짜증을 다시금 꾹 참아 낸 정하진은 큰 기대 없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조금 전까지 했던 고민을 꺼냈다.
“제 동생도…… 달라질 수 있는 겁니까?”
“구체적으로 뭐가? 성격?”
“동생이 SS급 이상 각성자일 수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가늘게 뜨다 못해 거의 감다시피 했던 안식의 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다 곧 “어?”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경우에 따라 각성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급은 절대 아닐 텐데? 왜 그런 생각을 했냐?”
“각성 검사를 했지만 등급이 분류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비각성자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이 몬스터와 대화가 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곁에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곁에 있으면 편안해진다고 하더군요. 물론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만, 마음에 걸려서 확실히 알아 두고 싶습니다.”
“몬스터와 대화……. 대화……, 대화라…….”
안식의 신이 미간을 찌푸린 채 정하진의 말을 곱씹으며 공중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짚이는 게 있는지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더니, 곧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꼭 각성하지 않아도 그럴 수 있어. 시간 선이 쪼개지면서 같은 사람이라도 흡수율이 달라서 다른 게 섞이는 경우가 있거든.”
“…….”
“아, 흡수율이라는 건 쉽게 말해 영혼이라고 설명하면 되려나? 하여간에 그 사람은 맞는데, 이미 소멸한 다른 시간 선의 영혼의 조각이 섞이는 경우도 있다는 거지.”
“소멸한 시간 선…….”
“응. 가끔 혼수상태 빠졌다가 깨어나더니 갑자기 배운 적도 없는 외국어를 하게 되는 인간들 있지? 그거랑 비슷해.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았던 조각이 섞이면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거든. 이건 우리 업계 이야기라 자세히 설명 불가능한데, 하여간에. 문제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완벽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납득한 정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식의 신은 만족했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제 됐지? 오늘 질문은 끝. 이젠 내 차례.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잘 들어 둬. 네게 아주 중요한 새 임무를 맡길 거야.”
“예. 뭡니까.”
정하진이 진지한 눈빛으로 응시하자, 안식의 신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혹시 누가 들을까 싶은 건지, 그답지 않게 주변 눈치도 살폈다. 극도로 신중을 기하는 그의 모습에 정하진은 뭔지 몰라도 보통 임무가 아닐 것 같아 덩달아 긴장했다.
“일단 이걸 받아.”
정하진의 손에 작은 주머니가 쥐어졌다. 알록달록 귀여운 토끼와 꽃 자수가 놓인 깜찍한 주머니였다.
“…….”
당신이 직접 만든 거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정하진이 주머니를 제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그리고 이어질 임무가 뭐냐는 얼굴로 그와 눈을 맞췄다.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한 번 더 확인한 안식의 신은 지나가는 하급 신조차 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주머니에 내가 수를 좀 썼어. 간단한 물건 몇 개 정도를 이 주머니를 통해 받을 수 있도록 말이지. 넌 내가 말한 물건을 구해서 이 주머니에 넣어. 그럼 내게 바로 전송될 거야. 참고로 다른 녀석들에게 들키면 안 돼. 그러니 신중하게 처리해.”
안식의 신이 평소 보인 모습과 전혀 다른 묵직함에 덩달아 긴장한 정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가까이 숙였다. 모르긴 몰라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아 긴장한 채 물었다.
“여기에 뭘 넣으면 되는 겁니까?”
이 주머니를 꺼낸 순간부터 계속 주변을 살피던 안식의 신이 정하진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매운 치킨 볶음면. 그리고 따로 파는 저 볶음면 소스도. 너무 많이 넣으면 위에서 눈치챌 수 있으니 일단 5봉지, 소스는 2병만. 그리고 OO 기업에서 만든 새콤한 레몬 젤리 5봉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