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비공개 던전 4
세 사람은 안개가 걷힌 땅으로 내려섰다. 내내 정하영에게 업혀 있던 연서준이 내리려 했지만, 정하영이 이를 만류했다.
“주변 스캔부터 해 봐.”
“……음, 여전히 지하에 밀집된 생명체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지상엔 짐승과…… 어, 근방에 D급 몬스터가 다수 보입니다. 그리고 후방으로 200M 지점에 소형 F급 몬스터 무리도 있습니다.”
“몇 마리?”
“D급은…… 일단 주변에 포진한 것만 서른네 마리, F급은 스무 마리 같습니다.”
보고 받은 정하영은 연서준을 업은 채 다시 비행을 시작했다. 이번엔 높이 오르지 않고 일정 거리를 비행해 이동한 뒤 다시 땅으로 내려섰다. 거리의 건물들은 모두 오랜 세월 방치된 것처럼 보였다. 대부분 금이 가고 낡은 데다가 군데군데 무너진 건물도 많았다.
“화산재도 아니고. 먼지가 엄청난데.”
“그래도 아예 흔적이 없는 건 아냐. 여기 발자국 보면. 다른 먼지랑 층이 다른 걸 보니 확실히 지상도 오가는 것 같아.”
“공기 중에 희미한 독소가 있습니다. 독 저항이 없는 평범한 비각성자라면 장기간 흡입할 시 치명적인 수준입니다.”
연서준이 계속해서 정하영의 등에 업힌 채 스캐너를 작동시키며 보고하는 동안, 잠시 손을 놓고 한 가게 안으로 들어간 김현아가 정하영을 불렀다.
“언니. 이것 좀 봐.”
바로 가게로 들어선 정하영은 여기저기 널린 집기와 깨진 액자 등을 보다 허공을 둥실둥실 날아오는 신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하영과 연서준은 김현아가 내려 둔 낡은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세 번째 대격변이 찾아올 징조인가?
안개 속에서 생존한 이들이 말하길,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그 목소리는 이리 오라고, 어서 이 안개 속으로 들어오라고 유혹했다고 한다.
이상한 점은 안개가 동물에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지하까지 침투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안개가 휩쓸고 지나간 도시엔 죽음만이 내려앉는다. 그러니 여건이 된다면 지하로 피신하라.
해가 지더라도 바로 나오지 말고, 방독면을 착용해야 한다. 또한 길에서 시체를 보거든 절대 건드리지 말아라. 당신이 사랑했던 이라고 하더라도.
왜냐하면 그 시체가 일어나 당신을 물어뜯을지도 모르……]
“…….”
정하영이 낡은 신문을 읽고 있을 때, 어깨 너머로 함께 읽던 연서준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배님. D급 몬스터 네 마리, 아니. 다섯, 아니……. 여섯 마리가 여기로 접근합니다.”
“현아야. 이건 일단 인벤토리에 챙겨.”
김현아가 인벤토리에 신문을 챙겨 넣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D급 몬스터가 궁금했던 셋은 그새를 참지 않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그리곤 저마다 “와.”, “어, 음…….”, “오오…….” 같은 감탄사를 뱉었다.
“동물형을 기대했는데, 이건 너무 진부하잖아…….”
“음, 전 일단 선배님 등에 착 붙어 있겠습니다. 굳이 잡고 싶지 않군요.”
“시체 이야기 나올 때부터 예상은 했는데…….”
저 멀리서부터 느리게 걸어오는 좀비 여섯 마리를 발견한 셋이 각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고작 D급.
김현아나 정하영이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기만 해도 바스러질 몬스터들이었지만, 마냥 만만하게만 보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 던전의 배경과 좀비라는 존재의 합이 너무도 찜찜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뛸 수 있는 놈들도 아닌 것 같고, 접촉하지 말라고 했으니 다른 데로 이동하자.”
“그래.”
“저도 동감입니다. 남서쪽 블록엔 몬스터 감지가 덜하니, 그쪽을 살피는 게 좋겠습니다.”
주위를 살핀 셋은 대화를 잇는 대신 빠르게 자리를 떴다. 각자 찝찝한 마음을 품은 채.
* * *
고요한 기내에서 눈을 감고 있던 정하진은 주머니에서 울리기 시작한 진동에 눈을 떴다. 그가 꺼낸 것은 평소 사용하는 스마트폰이 아닌 위성 통신용으로 개조한 휴대폰이었다.
이 기기로 연락이 온다는 것은 연락할 이가 각 대형 길드 길드장들 또는 각성자 협회 협회장이라는 것을 뜻했기에, 정하진은 바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인은 예상대로 각성자 협회 협회장이었다.
[G_H003 정하영 에스퍼가 야간 등산 중인데 경관이 멋지다고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D]
이니셜과 숫자 조합으로 태백산 주변 벙커 번호라는 것을 확인한 정하진이 눈을 찌푸렸다.
‘던전 진입 전에 연락하라고 하긴 했지만, 그게 협회장을 연락 수단으로 쓰라는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굳이 위성 전화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보낸 걸 보면, 정하영은 갑작스럽게 극비 임무에 투입된 게 분명했다. 혹시 모를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아마 개인적인 연락도 사단에 차단한 거겠지.
‘그래도 그렇지, 하영아. 협회장한테…….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태백산이라……. 굳이 저 이모티콘을 붙인 건 등급이겠군.’
태백산 인근 좌표와 억지로 껴 넣은 것 같이 보이는 이모티콘의 ‘D’만으로 내용을 파악한 정하진은 미간을 주무르며 잠든 동생을 확인했다. 정하율은 여전히 새근새근 푹 잠들어 있었다. 이번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마찬가지로 깊이 잠든 한지수가 보였다.
토토 역시 정하진의 주머니 속에서 부리를 살짝 벌린 채 커어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기장과 정하진만 제외하면 모두가 깊이 잠든 것 같은 밤. 정하진은 지끈거리는 골을 문지르며 상태 창을 열어 다이렉트 메시지 창을 불렀다.
[최대한 빠르게 대화하고 싶습니다. 언제 가능할지 답장해 주시죠.]
‘어차피 지금 메시지 보내도 한참 후에나 반응하겠지만…….’
제 최대 후원자인 푸른 달의 신과 안식의 신에게 각각 이른 시일 안으로 대화 좀 하자는 메시지를 보낸 후, 상태 창을 끄려는 순간.
띠링-!
[‘후원자’ 안식의 신으로부터 다이렉트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
정하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지금까지 그 어떤 후원자도 이렇게 즉각 반응한 적은 전혀 없었기에. 침착하게 도착한 답장을 열람하자 공백에 가까운 내용이 보였다.
~ * ~ * ~ * ~ * ~ * ~ * ~ * ~ * ~ * ~ * ~ * ~ *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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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장에 적힌 숫자 3을 본 정하진이 눈을 깜빡였다.
3주? 보통 후원자들이 빠르면 그 정도 시간 내에 답을 주긴 하지. 아니, 설마 3일인가? 그렇게 빠를 리가 없으니 역시 3주로 생각해야……. 까지 생각을 전부 마치기도 전, 정하진은 갑자기 까무룩 기절하듯 고개를 떨구었다.
순식간에 강제적으로 수면 상태에 빠지는 일은 언제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강제로 전신 마취를 당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썩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대뜸 정신계 공격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런 초스피드 면담은 처음이었기에 정신 차리고 주변부터 확인했다. 언제나 면담에서 만났던 그 장소.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순백의 장소였다.
“……3초였나…….”
황당함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으니, 소리도 없이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것도 바로 코앞의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채. 깜짝 놀라게 하려고 한 행동이 분명했지만, 이제 정하진은 저렇게 갑자기 툭 튀어나오듯 등장하는 남자를 보고도 놀라는 대신 그저 무덤덤한 얼굴을 지을 수 있었다.
“어쭈? 이제 안 놀라?”
“……매번 이렇게 등장하는데, 계속 놀라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재미없네, 재미없어.”
안식의 신이 노골적으로 투덜거렸다. 그는 늘 그렇듯 화려한 보석 장신구가 주렁주렁 달린 기묘한 정장 차림이었다. 저 깔끔한 옷매무새와 비교되게 대충 묶은 긴 머리카락이야말로 이 남자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잘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마침 나도 네게 할 말이 있었어.”
그렇게 말한 남자가 세상만사 전부 귀찮다는 듯한 얼굴로 정하진의 곁에서 두어 걸음 떨어져 섰다.
“일단 네 용건부터. 뭐가 궁금한데? 참고로 오늘 질문에 대한 답은 두 개까지만 가능해. 이것도 내가 힘 많이 쓴 거야.”
후원자가 이런 면담에서 피후견인에게 답해 줄 수 있는 대답은 보통 한두 개가 전부였다. 후원자들의 이런 특성을 잘 아는 정하진은 치사하다고 이를 가는 대신 침착하게 질문했다.
“하율이는 5년이나 빠르게 눈을 떴고, 초기 주요 던전들 중 일부는 3년 정도 이르게 열리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겁니까. 사건이 일정하지 않습니다만.”
“흐음…….”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팔짱 낀 안식의 신이 손가락으로 제 팔뚝을 툭- 툭- 두드리며 “5년, 5년이라…….” 중얼거렸다. 잠시 홀로 중얼거리던 안식의 신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그러게? 거기 시간으로 5년은 진짜 너무 빠른데?”
“…….”
이번엔 정하진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피후견인의 얼굴을 확인한 안식의 신은 정색하며 덧붙였다.
“아니. 대충 짐작 가는 게 있긴 하거든. 내 제자가 지금 다른 행성에서 겁나게 날뛰는 것 같은데. 어마어마하게 성장하면서. 근데 이 성장이라는 게…… 이게 이렇게 빠르면……. 오히려 좋지?”
“…….”
정하진의 얼굴에 이제 슬슬 짜증이 서리기 시작했지만, 안식의 신은 마치 귀여운 척하려는 누군가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순진무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속도면 지구는 2차 대격변 전에 조기 구제 가능할지도?”
“…….”
“아니, 아니 아니. 확실한 건 아니니 그렇게 얼굴 구길 것 없어. 그런데 아예 불가능할 것 같진 않네. 지금 제자가 거의 미친 사람처럼 등급을 올리고 있어서. 역시 편법이 통했나…….”
“편법…….”
정하진은 그게 뭐냐고 묻는 대신 안식의 신이 알아서 대답해 주길 기다리며 빤한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다행히 그 의도를 눈치챈 안식의 신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제자가 의욕을 좀 불태울 수 있도록 내가 편법을 썼거든.”
빙빙 돌려 가며 순 이해 못 할 이야기만 늘어놓는 걸 듣고 있자니 해결되는 건 하나 없고 의문만 쌓여 갔다. 하지만 이 남자가 평소와 달리 퍽 신나 하는 모습을 보니, 제가 걱정했던 현상은 생각보다 좋은 일인 것으로 보였다.
다만, 그와 별개로 정하진은 속이 쓰렸다. 그가 말하는 ‘제자’가 누군지 정하진은 잘 알고 있기에……. 그리고 모든 시간대가 이렇게 앞당겨지기 시작하면 지구에 닥칠 2차 대격변과 재앙 역시 빨라지지 않을까 하는 짐작 때문에.
재앙.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한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거대한 재앙을 떠올린 정하진이 저도 모르게 살기를 흘리기 시작하자, 이를 느낀 안식의 신이 피식 웃으며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러자 정하진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지독한 살기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뿐만 아니라 싱그럽고도 상쾌한 기분이 정하진의 전신을 감쌌다.
“진정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