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07화 (107/172)

#107.

비공개 던전 3

세 사람의 계약서에 SS급 정하진을 포함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내용을 확인한 협회장이 두 번째 조건을 읊었다.

“둘째. 던전에 진입한 세 사람은 던전 공략이 아닌, 해당 던전의 정보 수집을 우선으로 활동한다. 정보 수집 시간은 4시간. 3인 1조로 개별 행동 없이 함께 움직이며, 이 시간이 지나기 전에 퇴장해 복귀하도록 한다.”

“확인.”

“확인.”

“확인.”

이어 몇 가지 조항이 더 추가되었다. 하지만 내용은 결국 비슷했다. 던전과 공략 일을 절대 발설하면 안 되며, 내부에 진입 시 던전 특성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해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끔 출몰하는 특이 던전 입장 전 작성하는 계약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내부 정보 수집 시 가능하면 무력을 사용하지 말고, 던전 내부 생명체와 접촉을 삼가라는 내용이 추가되었을 땐 셋 다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협회장님. 무력과 접촉의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상대가 먼저 달려들 경우를 제외하면 힘을 개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쪽에서 먼저 달려들거나 대화를 시도한다고 해도, 최대한 충돌을 피하고 자리를 뜨면 됩니다. 어차피 안에서 세 사람을 따라잡을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대화 시도라면 악마형인 겁니까?”

잠시 뜸을 들인 협회장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종족 판별 확인 시 인간형 99.9%로 확인되었습니다.”

“인간형이라……. 스토리 던전인가요?”

인간이 나오는 던전은 흔하진 않아도, 그렇다고 아예 없진 않았다. 생각보다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고, 주로 그런 ‘스토리 던전’을 들어가게 되면 내부에 있는 인간들을 게임 NPC처럼 대하며 던전이 원하는 대로 공략을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스토리 던전은 큰 후유증을 남긴다. 공략 기간 내내 함께 웃고 떠들고 대화하던 이들을 두고 던전을 나가야 하는 괴로움. 던전 안에 사람을 버려두고 온다는 죄책감.

그리고 공략하는 동안 동고동락하며 정들었던 이들과의 이별 등, 여러모로 각성자들의 정신적 괴로움을 유발하는 던전이었기에, 이런 유형의 던전은 정신계 저항이 높은 공략팀을 꾸리는 게 보통이었다.

당연히 스토리형 던전일 것이라 여긴 정하영은 협회장이 그 부분이 아직 확실치 않다며 고개를 젓는 것이 의아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만 봐도 일반적인 D급 던전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몇 분간 내용을 조금씩 조율한 끝에 계약서 작성이 끝났다. 계약서를 전부 자신의 인벤토리에 수납한 협회장은 세 사람에게 손목시계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그 어떤 장치도 없는 아날로그 손목시계였다.

“시간은 자정으로 맞춰 두었습니다. 진입 직전 정하영 에스퍼는 도깨비감투 아이템을 사용, 연서준 에스퍼와 김현아 에스퍼는 투명 스킬을 사용하고 진입합니다. 던전 진입 즉시 시계를 작동시키고 4시가 되기 전에 나오도록 하세요. 우린 그동안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세 사람은 그제야 왜 공략팀 인원이 이리 단출하게 꾸려졌으며, 굳이 자신들만이 던전에 들어가도록 편성했는지 제대로 파악하게 되었다. 김현아와 연서준은 각각 후원자가 선물해 준 SS급 투명화 스킬이 있었고, 자신은 정하진과 하나씩 나눠 가진 도깨비감투 아이템이 있었다.

‘어떻게든 눈에 띄지 않게 정보만 수집하라는 거군.’

협회장의 지시대로 세 사람은 곧바로 던전 게이트 앞으로 향했다.

“기성우 팀장님. 안에서 뭐 주의할 점은 없습니까?”

정하영의 물음에 기성우라 불린 브라보팀 리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희가 진입했을 때 스캐너가 내부 생명체 반응을 감지하긴 했지만, 지하에 숨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기척만 내지 않고 다니면 어지간해서 저쪽에선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조심하십시오. 강한 정신계 조종을 하는 던전일 수도 있습니다.”

브라보팀 리더 기성우의 반응에 정하영은 그들이 금방 퇴장한 이유를 짐작하였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브라보팀은 전투계 팀으로 정신계 저항 아이템이나 스킬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 등급이 A급까지였다.

던전 자체가 D급으로 확인되더라도 그들의 정신에 강한 영향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팀장이 퇴각 지시를 내린 것 같았다. 상황을 대충 파악한 정하영은 진중한 얼굴로 뒤에 선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들었지?”

“예. 정신계 저항 스킬은 항상 켜 두고 있습니다.”

“응. 나도 평소에 활성화해 둬서. 일단 들어가자.”

김현아와 연서준은 어차피 정신계 저항 스킬은 켜 두고 산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건드리는 스킬이나 아이템이 워낙 많다 보니, 제 수치가 오를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24시간 켜 두고 지내는 각성자가 대부분이었다. 정하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작은 게이트는 또 처음이네.”

감상을 뱉은 김현아가 제 키보다 약간 작은 게이트로 다가가며 투명 스킬을 사용했다.

“김현아, 먼저 진입합니다.”

목소리가 들린 이후, 김현아가 입장한 건지 잠잠하던 게이트가 일렁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연서준 역시 투명 스킬을 사용하며 말했다.

“연서준, 두 번째로 진입하겠습니다.”

게이트는 계속해서 일렁거렸고, 마지막으로 정하영이 도깨비감투 아이템을 착용하며 말했다.

“정하영, 마지막 진입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더 일렁이던 게이트가 잠잠해졌다. 옅은 빛이 맴도는 게이트를 바라보던 브라보팀과 협회장은 던전 주위 쓰러진 나무 따위에 걸터앉아 아날로그 시계 시간을 맞추기 시작했다.

* * *

던전에 진입해 땅을 밟은 정하영은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안개가 워낙 자욱해 보이는 게 없었다.

“이게 자연적으로 발생한 안개가 맞나?”

작게 중얼거린 정하영이 던전까지 이동하느라 꺼 두었던 각성자 전용 워치와 지급 받은 아날로그 시계를 켰다. 그러자 미세한 소음을 감지한 김현아와 연서준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둘 다 기척을 최대한 죽이되, 서로 파악할 정도의 발소리만 내며 한곳에 뭉쳤다.

투명 상태의 셋은 서로의 기운으로 위치를 파악하며 웬만큼 높은 등급 각성자가 아니면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안개가 짙어서 보이는 게 없네. 일단 높은 곳으로 이동해야겠어. 천천히 이동하자. 연서준 에스퍼. 비행 아이템 지금 쓸 수 있어?”

“아직 쿨타임 덜 돌아서 못 씁니다. 죄송하지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이리 와.”

정하영이 연서준의 위치로 팔을 뻗었다. 그는 정하영의 손을 잡고 위치를 가늠한 후 뒤로 돌아가 폴짝 뛰어 업혔다.

“현아랑 둘이 손잡아. 떨어지지 말고 붙어서 이동하자.”

“네.”

“잡았어. 바로 가자.”

정하영이 지시한 대로 연서준과 김현아가 손을 맞잡은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땅에서 천천히 발을 뗐다. 느릿하면서도 안정감 있게 떠오르는 비행이었다.

세 사람은 계속해서 위를 향해 올라갔다. 머리 위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천천히 신중하게. 그리고 짙은 안개가 점차 흐려지기 시작할 무렵엔 조금 더 속도를 냈다.

꽤 높이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 때쯤, 드디어 세 사람의 발아래로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는 고도가 되었다. 안개 위에 멈춰 선 정하영은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지점에 시선을 고정했다.

“……현아야. 너도 지금 저거 보고 있어?”

“어…….”

“선배님, 저도 같은 걸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앞에 휘어 있는 저거……,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아?”

“……맞는 것 같아.”

얼떨떨하게 묻는 정하영과 그보다 훨씬 더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한 김현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서준이 은근히 끼어들며 쐐기를 박았다.

“선배님. 저거……, 아무리 봐도 에펠탑 같습니다……. 저번 달에 봤을 때보다 윗부분이 묘하게 뒤틀리긴 했지만요…….”

세 사람은 끝자락을 누군가 강하게 쥐었다 편 것처럼 찌그러진 에펠탑으로 추정되는 철근 덩어리를 향해 날아갔다. 흔치 않은 구조물이다 보니 처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에펠탑이 확실했다.

“이게 왜……. 연서준 에스퍼. 저번 달에 프랑스 파견 뛰었지?”

“예. 그땐 멀쩡했습니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이래서 정신계 조심하라고 한 건가? 이게 환영일까?”

“그건 아닌 것 같아.”

사실 알고도 뱉는 소리였다. 셋 다 정신계 관련 알림은 뜬 게 없었으니까. 물론 L급 이상 존재가 셋의 정신을 동시에 주물러 교란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니었다. 이건 정말 에펠탑이었다. 현시대에도 굳건히 존재하고 있는 그 에펠탑.

“……하영 언니. 자연 발생 바람인 척하고 안개 좀 걷어 볼 수 있겠어?”

“일단 주변엔 생명체 감지가 없습니다.”

정하영은 대답 대신 바람을 일으켰다. 자연풍과 같은 은은한 바람이 천천히 안개를 쓸어 내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운 바람인 것처럼 조종해야 했기에 시간이 걸리는 걸 알면서도 신중을 기했다.

그렇게 바람을 일으킨 지 대략 10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옅어진 안개 사이사이로 낮고 빼곡한 건물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건물의 밀집 형태와 도시 구조를 파악했을 때, 이곳은 셋이 기억하는 장소가 맞았다. 얼마 전에도 봤던 장소고 말이다.

다만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여기…… 혹시 지구 멸망 컨셉 스토리 던전인 겁니까? 스타팅 아이템은 안 보이지만 말입니다…….”

“…….”

“…….”

같은 생각을 한 정하영과 김현아는 침음을 삼켰다.

보통은 던전 게이트 주변에서 혼자 환하게 빛을 뿜어내며 존재를 과시해야 할 스토리 던전의 스타팅 아이템이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여긴…… 스토리 던전이 아닌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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