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비공개 던전 2
정하율의 잠꼬대로 얼떨떨해진 정하진과 토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둘 다 말없이 앉아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는데, 토토는 그 와중에도 간간이 정하율을 흘끔거리며 눈치까지 보기 시작했다.
“편히 있어라.”
“삐, 삐이…….”
“뭘 그리 긴장하는 거지? 네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한지수 가이드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거고.”
“삐…….”
정하진은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토토의 동그란 몸을 톡톡 두드려 주며 어르고 달랬다. 정하율이 퇴원하고 한 집에서 지낸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이런 반응이 처음이라 충격받은 것 같았다. 물론 정하진 본인도 무척 놀란 상태였다.
정하진은 평온한 얼굴로 잠든 동생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잠꼬대치고 상황을 눈으로 보지도 않고 너무 정확하게 짚은 게 마음에 걸렸다. 만약 정하율이 몬스터의 말을 알아듣는 게 사실이라면, 이는 정하진조차 예상치 못한 특이점이었다.
각성 여부 검사에서도 동생은 비각성자로 확실하게 분류되었었다. 하지만 현재 각성자 등급 검사로 확인할 수 있는 최고 등급은 SS 등급 혹은 그 바로 위 상위 등급까지였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만약 하율이가 각성자라면……. 아니지. 앞서 나가지 말자.’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나온 잠꼬대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혼자 생각해도 결론 나지 않을 일이라는 걸 깨달은 정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각성자든 아니든, 정하율은 정하율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제 동생이자 보물인 건 변하지 않았으니 상관없었다.
다만 걱정스러운 마음은 분명 존재했다. 정하율이 퇴원 후 한지수와 같은 집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그의 곁에 찰싹 붙어 있던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단순히 아이돌 한지수를 향한 팬심이라기보단, 다른 이유로 그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듯이 보였으니까.
또 같은 상념으로 빠지려는 걸 느낀 정하진이 재차 고개를 가로저으며 토토를 격렬하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졸지에 털을 역방향으로 쓰다듬어진 토토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하지만 토토 역시 생각할 게 많은지 정하진을 부리로 쪼는 대신 눈을 꾹 감았다.
정하진은 토토가 억지로 잠을 청하려는 듯이 몸을 옹송그리는 모습을 보곤 제 가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아늑한 공간에 수납된 토토는 곧 얌전히 색색 고른 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조용한 기내는 엔진이 내는 소음만이 가득했다. 정하진은 고개를 살짝 돌려 한지수를 바라봤다. 그새 잠든 것 같았다. 조금 전에 비해 안면 근육이 편안하게 풀어져 있었다.
저 얼굴을 보고 있으니, 변신 스킬을 사용해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어 전혀 다른 얼굴인데도 묘하게 한지수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이 달라도 표정에 그 사람만의 느낌이 담기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 느낀 정하진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저 유순한 모습 위로 자신이 잘 아는 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옛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늘 웅크리고 잠드는 어떤 이와 함께 보냈던 수많은 밤이.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정하진은 수면 시간이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새벽 내내 먼저 잠든 그를 지켜보기도 하고, 과도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중간중간 다리를 펴 주기도 했었다. 과도하게 웅크린 자세 탓에 종종 종아리 근육에 경련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세를 다잡아 주면 그는 몸을 뒤척이다 제 가슴에 안겨 들어 입술을 웅얼웅얼 움직이며 뜻 모를 잠꼬대를 하곤 했다.
정하진은 그의 옅은 숨소리만이 가득한 고요한 새벽이 좋았다.
특별한 것 없이 둘이 한 침대에 함께 누워 밤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대로 꽤 오랜 시간 한지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정하진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곤 토토가 잔소리하기 전에 웅크린 그의 다리를 조심스레 펴 주고, 담요를 발끝까지 잘 덮어 주었다.
“으응…….”
“…….”
혹시나 깰까 봐 조심스럽게 움직인 덕분인지 조금 찌푸리며 뒤척이긴 했지만, 곧 호흡은 더 고르게 느려졌고, 얼굴엔 다시 평온함이 번졌다.
기내에서 돌발 상황이 생길지도 몰라 일부러 오늘 약은 건너뛰었는데도 잘 자는 걸 보니 역시 피곤했구나 싶었다. 정하진은 제 양옆으로 편하게 풀어진 정하율과 한지수의 얼굴을 각각 확인한 후에야 눈을 감았다.
가능하면 지금처럼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길 바랐다. 이 둘이 아무 걱정 없이 잠들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유지되길……, 정하율과 한지수가 고민할 일이라곤 오늘 뭐 먹지? 정도였으면 했다. 식사 메뉴가 그날 최대의 고민인 그런 안정적인 삶이었으면 했다.
등급 외 던전이나, 외부에 알려져서 혼란을 불러올 던전도 터지지 않고, 현존하는 각성자들의 수준으로 처리할 수 있는 고만고만한 던전만 발생하는 세계. 그러다 가끔 등급 높은 던전이 터지더라도 모두가 힘을 합치면 이겨 낼 수 있는 미래 말이다.
‘……까마득하군.’
눈을 감은 채 손가락으로 이마와 미간을 짚은 정하진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았다. 제가 혼자 한숨을 쉬면 주머니에서 겨우 편안해진 토토가 또 신경 쓸까 봐 밀려 나오는 숨을 삼킨 정하진은 대신 느리고 깊은 숨을 내쉴 뿐이었다.
* * *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반짝임 가득한 밤하늘을 응시하던 정하영은 제 입김에 별빛이 잠시 흐려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밤의 태백산은 몹시 추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현장 주둔한 소수 인원도 모두 B급 이상 전투계 에스퍼들이었기에 산의 추위와 어두움은 딱히 걸림돌이 되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몇몇 인원들의 얼굴엔 불안함이 서려 있었다. 던전을 관리하는 전담 부서 직원이 아닌 에스퍼들만 있는 걸 본 정하영은 도착하기 전 받았던 짧은 브리핑에서 이미 눈치를 챘던 것처럼 평범한 던전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저 에스퍼들은 보통 실력자도 아니었다. 모두 각성자 협회 브라보팀 소속이었다. 이 던전에 먼저 1차로 진입해 지형 파악만 마치고 나온 이들. 정하영은 브라보팀 에스퍼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협회장의 말을 기다렸다.
협회장은 오래전 쓰러진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나무에 걸터앉은 채 던전 게이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여러 고민이 어려 있는 걸 느낀 정하영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기다림에 익숙한 정하영과 달리 연서준은 뭐라도 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듯이 보였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연서준은 연신 하늘을 살폈다. 뭔가 기다리는 게 있는 것처럼 계속 고개를 치켜들고 있던 연서준이 입을 열었다.
“선배님. 옵니다.”
“…….”
정하영이 묵묵히 고개만 들자, 저 멀리 날아오는 김현아가 보였다. 그리고 길 안내를 위해 나갔던 브라보팀의 에스퍼 한 명도 보였다. 김현아는 그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품에 안은 채 여유 있게 날아와 땅에 내려 주었다.
190cm를 조금 넘는 거구의 A급 에스퍼를 가볍게 안고 온 김현아가 손을 털며 협회장에게 먼저 다가갔다.
“협회장님.”
“김현아 에스퍼. 흔쾌히 협조해 줘서 고맙습니다.”
둘은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협회장의 손을 놓은 김현아는 정하영과 연서준과 눈인사를 주고받은 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흠. 대기 인력이…… 없군요?”
“보시다시피 브라보팀이 전부입니다.”
“던전 브리핑부터 들어 볼까요?”
그 말에 협회장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더니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정하영과 김현아는 그가 꺼낸 것이 SS급 계약서라는 것을 알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브라보팀은 이미 작성한 듯이 담담한 얼굴로 포진해 있었다.
“우선. 이 작전에 대해. 그리고 이 던전에 대한 기밀 유지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어 계약서 작성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김현아 에스퍼는 SS급이니 계약서 파기도 가능하겠지만, 대신 일방적인 파기를 할 경우에 대한 페널티를 하나 추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와우.”
상대가 각성자 협회장만 아니었다면 김현아는 아마 상도덕 없는 새끼시네요. 소리부터 뱉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지도자였고, 김현아는 그가 요청한 비밀 협조에 바로 달려올 정도로 협회장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가 지켜야 할 비밀이 시시한 거면…… 협회장님 두고두고 괴롭힐 겁니다?”
“……큼. 다행히 제가 김현아 에스퍼에게 괴롭힘당할 일은 없겠군요.”
그의 대답을 들은 김현아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이게 객기라면, D급 던전 하나 가지고 부리기엔 과한 객기였다. 김현아가 먼저 계약서를 받아 들자 정하영과 연서준도 각각 받아 들었다.
은은한 금빛을 띤 계약서는 백지였다. 협회장은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으로 묶일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첫째. 이 던전의 존재 및 공략 시 습득한 정보를 포함한 모든 것은 외부에 절대 알려선 안 된다. 여기서 외부라 함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이들을 제외한 이들을 뜻한다.”
그의 말이 끝나자 세 사람이 받은 계약서에 계약 내용이 적힌 글자가 자동으로 생겨났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김현아, 정하영, 연서준을 포함하여 협회장과 브라보팀 모두의 이름이 밑에 새겨졌다. 연서준과 김현아는 망설임 없이 첫 번째 조항에 긍정하며 대답했다.
“확인.”
“확인.”
“…….”
“……정하영 에스퍼?”
협회장이 유일하게 대답하지 않은 정하영을 흘긋 봤다. 정하영은 잠시 계약서를 응시하다 협회장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추가 항목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제 쌍둥이 오빠인 정하진에겐 의논할 수 있도록 수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현아 에스퍼도, 연서준 에스퍼도요.”
“…….”
협회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수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