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비공개 던전 1
정하영은 변신 아이템을 사용해 4~5살 또래 남자아이로 변한 정하율을 꽉 안은 채 볼에 뽀뽀 세례를 퍼붓고 있었다. 둘이 유난스러운 작별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 지 벌써 5분은 넘은 상태였다.
그 시간 내내 동생을 받아 안고자 팔을 내민 채 부동자세를 유지하던 정하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대기실 내부 시계를 확인한 그는 이제 슬슬 가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한지수를 살폈다.
한지수는 김지수의 모습으로 변신한 채였고, 정하진 역시 성하진으로 변신한 상태였다. 그리고 정하영도 평소 위장 신분으로 사용하는 30대 초중반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민간인은 이용할 수 없는 각성자 협회와 국내 대형 길드 전용 기지라 주변엔 사람이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목소리를 잔뜩 죽인 정하율이 까르르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누나, 정말 다다음 주에 올 거야?”
“응. 더 빨리 갈 수 있으면 더 빨리 갈게. 누나 보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던전 안에 있는 것만 아니면 최대한 빨리 답장할게.”
“으응, 알았어.”
정하영은 이제 정말로 가야 한다는 듯이 한 걸음 다가온 정하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하진은 별다른 말 대신, 어린아이 모습의 정하율을 제 품으로 옮겨 안아 들었다.
“호주 도착하면 연락해라.”
“너도. 그리고 던전 들어가게 되면 입장하기 전에 메시지로 던전 정보 좀 보내 줘.”
“전부?”
“어.”
“쯧, 귀찮게……. 알았다.”
곧 만날 예정이라 그런지 평소와 다름없는 간결한 인사였다. 무뚝뚝하게 대답한 정하영이 이번엔 한지수를 바라봤다. 한지수는 정하영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다다음 주에 또 만나요.”
“네. 가능하면 더 빨리 놀러 가겠습니다.”
제 쌍둥이에게 말할 때와 다르게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인사한 정하영은 지수의 어깨 위에 앉은 토토에게도 인사를 잊지 않았다.
“너도 잘 지내고. 내 동생이랑도 자주 놀아 줘. 간식 사 갈 테니까. 알았지?”
“삐이~!”
동그란 오목눈이 새 모습의 토토가 힘차게 울며 날개를 두어 번 파닥였다. 드디어 작별 인사를 마친 세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활주로로 바로 나갈 수 있는 짧은 게이트를 향해 걷는 동안 정하율은 누나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정하영 역시 동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후 정하영은 셋을 태운 비행기가 이륙하는 모습을 보고자 대기실을 향해 몸을 틀었다. 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건장한 남성이 다가왔다. 정하영은 남자가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부터 기척으로 존재를 드러내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제 사소한 바람을 이룰 시간조차 없겠구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했다.
“연서준 에스퍼. 오늘도 아주 든든해 보여.”
“예, 여기 선배님의 든든한 서준이가 왔습니다.”
거대한 남자는 각성자 협회 소속 A급 에스퍼이자 정하영과 같은 팀 후배인 연서준이었다. 정하영은 변신 스킬로 바뀐 그의 외형을 보고 웃음을 참았다.
왜소한 체격에 마른 근육이 탄탄한 연서준의 본모습과 달리 지금 이 모습은 곰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볼 때마다 참 안 어울려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정하영은 잡생각을 빠르게 지우고 용건을 물었다.
“어디 출국할 일 있어?”
“아뇨. 협회장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 말에 정하영은 제 워치를 확인했다. 아무 연락도 없었다. 호출도 없었고 보안 연락도 없었다. 단순히 사람 찾는 일에 A급 에스퍼를 보낸다니, 굳이 듣지 않아도 뭔가 있구나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또 뭔 일이래. 일단 가면서 설명해.”
“예.”
창밖에 보이는 비행기는 아직 활주로에서 대기 중이었다. 정하영은 아쉬운 마음에 세 사람이 탄 비행기를 바라보다 연서준을 따라 대기실을 나섰다.
연서준의 차에 타자마자 그는 보안 아이템을 가동했다. 이제 차 안에서 대화하는 게 유출될 일은 없겠지만, 그런데도 그는 S급 에스퍼 정하영 정도나 돼야 들을 수 있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백산 근처에 열린 던전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미 열려 있었다고?”
“예. 깊은 산속이기도 한데, 게이트 자체가 굉장히 작습니다.”
“게이트화 될 때 파동 감지가 안 됐나? 어째서 알람이 없었지?”
“그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손 썼을 수도 있겠죠. 여튼 등급은 D급이고, 1차로 브라보 팀이 진입했는데, 공략은 안 하고 지형만 확인하고 퇴장했습니다. 2차 진입으로 저와 평화 길드 김현아 에스퍼와 선배님까지 총 셋이 진입할 예정입니다.”
“브라보 팀이 왜 그냥 나왔대? 거기에 현아는 또 왜 끼고?”
“급히 정보 공유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어 지형 파악만 마치고 바로 나왔다고 합니다. 김현아 에스퍼는 협회장님께서 직접 협조 요청하신 것 같습니다.”
“D등급인데 뭐 그리 심각해서 그냥 나온 거지……. 공략도 안 하고. 더럽게 찝찝하네.”
“저도 거기까진 듣지 못했습니다. 뭐든 간에 보통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협회장님께서 선배를 빠르게 모셔 오라고 지시하셨으니까요. 여기서부턴 통신기기도 다 끄고 출발하라고 하셨습니다.”
“거, 참, D급 던전 하나 때문에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일단 알았어.”
정하영은 제 워치를 먼저 보안 모드로 가동했다. 온갖 방어 시스템이 구축되더니 스스로 전원이 꺼졌다. 이어 휴대폰 역시 똑같이 보안 모드로 종료하려던 정하영이 멈칫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꼭 메시지 남겨 두라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 이 정도로 신경 쓰는 걸 보면, 동생 놈한테도 던전 들어간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
“네, 아무래도…….”
정하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던 정하영은 그대로 전원을 껐다. 그렇게 두 사람을 태운 차는 태백산을 향해 출발했다.
* * *
비행은 순조로웠다. 난기류도 만나지 않았고, 최근 새로 들였다는 평화 길드 전용기 내부도 굉장히 아늑했다. 덕분에 한 시간이나 창밖을 구경한 정하율은 침대처럼 큰 좌석에 누워 담요를 덮고 숙면 중이었다.
지수 역시 좌석을 눕히고 담요를 덮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한국 시간으로 밤에 떠나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침부터 병원에 갔다가 뒤늦게 짐을 추가로 더 챙기는 등 나름 빡빡한 일정을 보낸 탓인지 꽤 피곤했다.
토토는 제 집사가 바로 뻗어 심심했는지 정하진의 어깨에 앉아 그가 보는 태블릿 화면을 함께 보는 중이었다. 정하진이 읽고 있는 화면에 나온 내용은 온통 글자만 가득했다. 세계에 발생한 던전 목록이었는데, 재미있는 내용이 아님에도 둘은 매우 유심하게 목록을 훑었다.
[검색 결과]
[선택 국가: 일본] [등급: A급 이상]
[최근 90일간 던전 발생 목록]
03. 27 홋카이도 A급 던전 – 클리어 (상세 보기)
04. 10 나고야 A급 던전 – 클리어 (상세 보기)
04. 22 시즈오카 A급 던전 - 클리어 (상세 보기)
05. 03 오키나와 A급 던전 – 1차 공략 중 (상세 보기)
각 던전의 상세 보기 버튼을 눌러 던전 속성과 보스 등급 등을 자세히 확인한 정하진은 국가를 미국으로 바꿔 재검색했다. A급 이상 던전 2개, S급 던전 1개가 각각 검색됐다.
그 외 여러 지역을 검색하던 정하진은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을 선택했다. 오늘 아침과 오후에 검색했을 때 본 것과 달라진 내용은 없었다. 태블릿을 내려 둔 정하진은 제 동생을 살폈다. 여전히 어린아이 모습으로 새근새근 잘 자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반대로 고갤 돌리자 마찬가지로 변신 상태인 한지수가 보였다. 긴 생머리를 대충 묶고 누워 있었는데, 잠든 건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꽤 피로한 기색이 보였기에 말을 걸진 않았다.
그대로 자세를 느슨히 하고 편히 기대앉자 토토가 탄탄한 허벅지로 날아내려 왔다. 정하진은 동그란 오목눈이 새 모습의 토토를 쓰다듬으며 눈을 내리떴다.
토토는 평소답지 않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하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역력한 눈빛을 눈치챈 정하진이 옆자리 지수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토토. 배고픈가?”
“삣- 삐삣-.”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이 참 앙증맞고 귀여웠다. 정수리를 톡톡 두드려 주자 기분 좋은 듯이 눈을 감고 손길을 만끽하더니, 이게 아니라는 듯이 번쩍! 눈을 뜨고 정하진의 손가락을 부리로 콕콕 쪼았다.
“입이 심심한가?”
“삐에엥!”
그것도 아니라는 듯이 부리질이 더 격해지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토토가 마음대로 쪼게 내버려 두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뭐가 불만인지 말해야 알지.”
“삐엣! 삐에엥! 삐삣! 삐이잇!”
불만스러운 울음이 점점 격해지려는 찰나. 바로 옆자리에서 작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응, 토토가아…… 형이 계속 인상 쓰고 있어서…… 걱정된대애…….”
“……!!”
“……!?”
토토와 정하진 둘이 동시에 놀라 바라보자 웅얼웅얼 잠꼬대하더니, 다시 깊게 잠든 정하율이 보였다. 순간 정하진은 멍하니 제 동생을 바라보다 토토를 향해 물었다.
“진짜 그런 의미로 말한 건가?”
“……삐삣.”
당황한 토토가 부리를 쩍 벌린 채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토토를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정하진이 동생에게 다가갔다. 잠시 잠꼬대하긴 했지만, 지금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 형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색색 느린 숨을 내쉬고 있었다.
조심스레 동생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볼을 보듬어도 별 반응이 없었다. 살짝 눈꺼풀이 떨리긴 했지만, 손길에 의한 반사적인 반응일 뿐이었다.
“우리 하율이랑 대화할 거리가 하나 더 늘었군.”
“삐, 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