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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03화 (103/172)

#103.

좋은 꿈 5

“어찌 보면 기다린 게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대답한 정하진이 턱을 괴고 옆으로 누워 한지수와 눈을 맞췄다. 약에 취하지 않은 한지수였다면 이렇게 눈을 맞추고 있을 때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눈을 피하긴커녕,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된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이 남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리는 듯했다.

“고민이라도 있어요?”

“고민이라기보단…… 그냥 잡생각이 많습니다.”

“그렇구나. 그래서 잠을 못 자요? 아, 아니다. 정하진 에스퍼도 원래 잘 못 자죠? 재윤이 형도 잠을 잘 자지 못했거든요.”

“예. 그랬을 겁니다. 강재윤 에스퍼는 특히 오감이 예리한 편이었으니까요.”

이미 한 침대에 누워 몇 번이고 들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정하진은 처음 듣는 것처럼 성의 있게 대꾸했다. 한지수는 그 대답에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끄덕였다.

“맞아요. 엄청 예리했어요. 정하진 에스퍼도 푹 자면 좋겠는데…….”

“언젠간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언젠가? 뭔가 방법이라도 있다는 건가? 한지수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뭔가 생각난 듯이 인벤토리를 뒤지더니 은은하게 빛나는 새하얀 수정을 꺼내 내밀었다.

저 수정이 뭔지 눈치챈 정하진이 거절하려는 찰나, 낌새를 느낀 한지수가 더 빠르게 움직였다. 정하진의 베개 밑에 수정을 쑤셔 넣고는 다른 수정을 하나 더 꺼내 자신의 베개 밑에도 넣었다.

“……한지수 가이드.”

“저도 오늘 처음 쓰는 건데, 같이 써 봐요.”

그때 마침 정하진을 인식한 수정이 눈앞에 반투명한 상태 창을 띄웠다.

[정신계 스킬 접근 알림]

달콤한 꿈 수정 아이템이 기억 투영에 간섭할 예정입니다.

꿈 수정의 개입을 허락할 경우 [예]를 선택해 주세요.

* * *

[예] / [아니오]

정하진은 상태 창 너머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지수와 다시 눈을 맞췄다. 오늘은 굳게 작정했는지, 절대 무를 생각이 없어 보이는 단호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흐리멍덩했지만.

“제가 정하진 에스퍼한테 이 정도는 하게 해 줘요.”

“…….”

“전 이미 오늘을 우리 둘 다 좋은 꿈 꾸는 날로 정했어요.”

잠시 망설인 정하진이 다시 상태 창을 확인했다. 이거 안 받으면 엄청 섭섭할 거라고, 앞으로도 잊지 않고 섭섭해할 거라고 웅얼거리는 한지수를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어차피 기억도 못 할 거면서.

심지어 지금도 그랬다. 이미 몇 달 동안 제 침대에 침입해 종종 이 수정을 써 보자고 졸랐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이 문제로 옥신각신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부분을 짚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꾹 참은 정하진이 [예]를 선택했다. 상태창이 사라지자 만족스러운 얼굴로 씩 웃는 한지수가 보였다.

“정하진 에스퍼는 어떤 꿈이 꾸고 싶어요?”

“……잘 모르겠습니다. 한지수 가이드는 어떤 꿈이 꾸고 싶습니까?”

나지막한 물음을 들은 한지수의 시선이 정하진의 가슴께로 향했다. 그대로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번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으음, 역시 지율이랑 형들이 보고 싶어요.”

“…….”

“생각해 보니까 지율이가 살아 있었으면 지금 딱 중학생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런가, 하율이를 보고 있으면 지율이가 더 생각나요.”

“그렇습니까.”

“네. 우리 지율이도 되게 착하고, 엄청 사랑스러웠거든요……. 제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천사 같았어요. 아기 때부터 형이랑 내가 키워서 그런가…….”

“정말 귀여웠겠군요.”

“맞아요. 엄청 귀여웠어요. 요즘 애들 다 너무 빨리 철들고, 대부분 발랑 까졌다고들 많이 말하잖아요. 근데 지율이는 안 그랬어요. 진짜 내 동생이지만, 어쩜 이렇게 착한 애가 다 있지 싶었다니까요? 너무 순하고 착해서 걱정될 정도로.”

이 이야기도 벌써 몇 번째 듣는 걸까. 하지만 정하진은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었다. 늘 같은 패턴인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으니까. 그 예로 지금 한지수는 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도 울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약에 취해 찾아오는 날이면 늘 보고 싶은 이들을 읊으며 울곤 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울지 않게 되었다. 가슴 속에 5년 넘도록 간직한 그리움이 그새 무뎌진 건 아닐 텐데 말이다.

하지만 정하진은 제 호기심을 굳이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한지수가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뱉는 이야기를 들으며 호응할 뿐이었다.

“아, 저 이제 잠들려나 봐요……. 엄청 졸리네요…….”

“주무시죠.”

“네에……. 정하진 에스퍼…….”

“예.”

“좋은…… 꿈 꾸세요……. 그리고…… 보고 싶은 사람…… 꼭…….”

밀려오는 수마에 휩쓸려 이야기를 마치지 못한 한지수의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한지수의 몸을 이불로 잘 덮어 준 후 기척을 죽이고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방 앞에 두 발로 서서 전용 이불을 앞발로 끌어안은 토토가 보였다.

“…….”

“…….”

정하진은 군말 없이 토토와 토토의 이불을 움켜잡고 침대 중앙에 내려 주었다. 알아서 자리 잡고 누워 이불도 찹찹 펴 덮는 토토를 지켜보던 정하진은 괜히 오동통하게 올라온 햄스터용 이불을 손가락으로 쿡 눌렀다.

“쮯!”

“그래. 토토 너도 잘 자라.”

“쮜에엣!”

그게 아니라는 듯이 토토가 작게 울었지만, 정하진은 “어, 그래. 나도 잘 자마.” 멋대로 대답하며 누웠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정하진은 내심 자신이 제대로 잘 수 있을지 걱정됐다.

‘아깝게 버리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평소대로라면 이대로 잠을 설치고, 잠들더라도 한두 시간 겨우 눈 붙이는 수준이겠지만, 모처럼 한지수가 레어급 순도 높은 꿈 수정을 선물로 주었으니 오늘 밤은 억지로라도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정하진이 수면을 결심한 순간, 전신에 따스한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몸을 감싸듯 맴돌던 기운이 점차 정하진의 육체와 정신으로 스며들었다. 정하진은 이를 거부 없이 받아들였다. 그 덕분일까? 비싼 아이템을 내다 버리는 격이 될까 봐 우려한 것과 달리, 그는 몇 년 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인 정하진은 정신이 또렷함에도 꿈속에 있단 것을 눈치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지금 집이 아닌, 오래전에 잠깐 살았던 집이었다. 정하진은 자신이 이 집에서 누구와 살았었는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어제 일처럼 말이다.

거실 창밖으로 보이는 배경은 제 기억에 있는 배경과 똑같았다. 재건한 도시의 반짝이는 야경이 유독 아름다운 밤이었다. 도시의 불빛이 환한데도 하늘엔 꽤 많은 별이 보였다. 지금도 야경을 볼 때마다 정하진은 그 사람을 떠올렸다.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사람을.

그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자다 일어나자마자 나온 건지 고개 숙인 채 하품하며 눈을 비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쓰렸다.

“행복한 꿈이라더니…….”

결국 답지 않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수정을 만든 이가 누군지 몰라도 그는 인간에 대해 아직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었다. 수정을 사용한 이에게 행복한 꿈을 보여 주고 싶었다면, 적어도 지금 이 상황이 아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으니까.

초월적인 존재가 만든 아이템이라고 하더라도 늘 결함이나 모순점이 존재했고, 그로 인해 그들도 결함이 있는 존재구나 염두에 두고 있긴 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부닥쳐 보니 그 생각이 더 굳건해졌다. 크게 한숨 쉬고 싶은 기분을 겨우 억누른 정하진이 제게 비척비척 다가오는 이를 향해 돌아섰다.

어차피 이 공간과 저 사람은 전부 꿈이다. 자신의 정신에 침투해 멋대로 기억의 조각을 끄집어내 만든 가상의 공간에서 이뤄지는 인형극 같은 꿈. 정하진이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이 꿈을 깨부수고 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신계 간섭에 대한 상쇄 스킬이 있으니까.

하지만, 바로 꿈을 부순다면 자신이 좋은 꿈을 꾸길 바랐던 한지수는 그 목적도 잃고, 레어급 아이템까지 그냥 버리게 되는 거였다.

정하진은 한지수가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다 들어주고 싶었다. 특히 제 능력이 닿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그래서 이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한지수는 정하진이 좋은 꿈을 꾸길 바랐고, 사용한 수정은 등급이 높았다. 그러니 이 꿈의 시작이 비록 제 마음을 진창에 처박아 버리는 순간부터 시작해도, 결국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거라 믿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정하진은 잠시나마 제게 다가온 이를 무시하려던 생각을 억누르고, 당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까 이 시기의 정하진이라는 남자가 눈앞의 사람에게 그랬던 대로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나 때문에 깼어요?”

과할 만큼의 상냥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그 다정한 질문에 고개 숙이고 있던 이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도리질했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하진과 눈을 맞추고, 배시시 미소 짓는다.

정하진은 잠들기 전에 마주했던 얼굴보단 많이 야위어서 그런지, 같은 얼굴인데도 더 성숙하게 보이는 남자를 살폈다.

“하진 씨.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남자는 평소라면 먼저 다정하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며 안아 주고 키스해 줬을 제 반려가 멀뚱히 서서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의아했는지, 먼저 다가와 폭 안긴다. 그리곤 까치발로 정하진의 목을 끌어안고 내려 당기며 입술을 포갰다.

귀여운 입맞춤이 서너 번쯤 이어졌다. 정하진은 가슴 속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오르는 어떤 감정을 억누르느라 눈을 질끈 감았다.

제 복잡한 심경을 보이면 이 섬세한 사람은 분명 몇 날 내내 걱정할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표정을 숨기고자 남자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하진 씨? 괜찮아요?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슬슬 걱정이 묻어나려는 기미가 보여, 고개를 주억거리며 상체를 한껏 숙인 정하진이 남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오늘따라 빨리 보고 싶어서 서둘러 왔습니다.”

“진짜요?”

“예. 진짜로.”

이어 정하진은 그를 끌어안은 채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고, 단 하루도 보고 싶지 않은 날이 없었다며 지금껏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속삭였다.

그답지 않게 쏟아 내는 낯간지러운 말들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꿈속의 연인이 환하게 웃었다. 정하진은 이 꿈이 행복한 꿈인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그걸 정확히 판단하려면, 아무래도 조금 더 오래 있어 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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