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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02화 (102/172)

#102.

좋은 꿈 4

정하율 입장에선 그저 선잠 같은 잠을 자다가 일어났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소중한 부모님과 친구들을 전부 잃은 상황이니,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런 입장에서 현 상황을 복기해 본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논할 필요 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전 어디서 지내도 상관없어요. 아, 그리고. 다른 두 나라도 좋으니, 자세한 건 하율이랑 정하셔도 괜찮아요.”

정하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하는 지수와 눈을 맞췄다. 지수는 고심하는 정하진에게 확신을 주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참고로 하율이도 호주가 좋다고 했습니다.”

“오, 하율이랑 저랑 통했네요. 그런데 왜 저 세 나라인가요?”

하고 많은 나라 중 어째서 프랑스, 호주, 브라질일까? 지수는 순수한 궁금증을 물었고, 정하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제가 산 집이 몇 채 있는데, 재난 방비가 훌륭하고 지내기 좋은 환경인 집이 저 세 곳에 있습니다.”

“좋네요.”

대격변 전과 지금 ‘집’이 주는 의미는 크게 달라졌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집은 많을수록 좋았다.

“그럼 언제 떠나나요?”

“빠를수록 좋습니다. 하영이 휴가가 내일 끝나니, 하영이가 복귀한 후에 떠나도 괜찮습니다.”

“아, 네.”

정하영 에스퍼는 같이 안 가는구나. 지수의 얼굴에 생각이 그대로 번져 나왔는지, 정하진이 친절히 말을 이었다.

“하영이도 자주 올 겁니다. 휴가는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지수는 정하율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정하영이 병원을 방문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오자마자 제 동생을 끌어안으려 했지만, 너무 흥분해 힘 조절을 하지 못할까 싶어 우선 의자를 한번 안아 보던 모습을.

의자가 부서진 걸 확인한 정하영은 동생을 끌어안지도 못했다. 정하율이 먼저 다가가 폭 안긴 후에야 제 동생을 솜사탕 취급하며 조심스럽게 감싸 안고 흐느낄 뿐이었다.

당시 지수는 정하영의 눈물이 부러웠다. 그때를 회상하는 지금도 내심 부러움을 품고 있었다. 지수는 자꾸만 제 의지와 관계없이 피어나려는 상념을 떨쳐 내려는 듯이, 굳이 제 생각을 소리 내어 말했다.

“내일 병원에 가서 약부터 처방받아야겠어요.”

“그러죠. 중요한 물건이 있으면 미리 인벤토리에 챙겨 두시고 혹시나 잊으셔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영이에게 부탁해 챙겨 오라고 하면 되니까요.”

이후로도 둘은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정하진은 내일 하루 정하영에게 제 동생을 맡기고 지수와 둘이 떠날 준비를 하고 싶다고 했다. 지수도 그 말에 동의하며 챙길 물건을 떠올렸다.

당장 떠오르는 건 색색 잠든 토토의 옆에 놓인 유리병뿐이었다.

‘호주가 지금 여름인가? 당장 입을 옷만 좀 챙기면 금방 끝나겠네.’

* * *

한지수의 방에서 나온 정하진은 문을 살포시 닫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1시간이라…….’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랜 시간 대화했다는 걸 깨닫고 나니 한숨이 나오려 했다. 하지만 꾹 참아 내고 다른 방으로 다가가 문을 살짝 열었다.

침대에 누운 정하영과 그 품에 폭 안겨 색색 잠든 정하율이 보였다. 혹시나 동생이 깰까 싶어 조심스레 다가간 정하진이 침대맡에 앉아 정하율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잠은.”

“아직까진 잘 자고 있어.”

“내일 저녁에 현아 비행기로 떠날까 해.”

“공항까지 태워다 줄게.”

“그래. 이거 받아.”

정하영은 군말 없이 제 쌍둥이가 건넨 포션을 받았다. 반사적으로 감정 스킬을 사용해 보더니, 등급을 보고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정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껴 써라.”

“……야, 이거 뭐냐? L급? 이게 언제 드랍 됐어? 어디서?”

“공식 드랍템이 아냐. 함구해.”

“…….”

정하영은 제 손 위의 포션 두 개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완벽한 회복의 포션 (L급)]

* * *

등급에 관계없이 대상에게 부여된 저주, 중독, 석화, 세뇌, 변신 및 버프 등 존재하는 모든 효과를 무(無)로 돌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주의: 모든 상태 이상과 버프 효과가 해제되니, 좋은 버프를 적용 중이라면 신중하게 사용하자!

L급 상처 재생 포션과 L급 완벽한 회복의 포션.

정하영이 주목한 건 상처 재생 포션이 아닌 완벽한 회복의 포션이었다.

동생 정하율이 긴 잠에 빠진 이후 그토록 찾아 헤맸던 포션이었다. 정하영이 각성자 협회와 장기 계약을 한 이유도 바로 이 포션이 언젠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 자신이 경매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대한민국 내에선 S급 레이드는 무조건 각성자 협회를 포함하게끔 되어 있으니, L급 완벽한 회복의 포션이 드랍 된다면 경매에 정하진과 둘이 참여해 어떻게든 이를 구할 생각이었다.

다름 아닌 제 동생에게 써 보기 위해서. L급 포션이라면 긴 잠에서 동생을 깨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서였다.

그런데 정하진이 이걸 가지고 있었다면 어째서 동생에게 쓰지 않았을까? 여러 의문이 들고, 순간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울컥 치밀기도 했지만, 곧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린 정하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율이는…… L급 포션으로도 소용이 없었던 거였나 보네.”

“…….”

정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은 정하영에게 있어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최근 들어 제 쌍둥이에게 찾아오는 천운을 굳이 ‘후원자가 점지해 준 미래’로 치부해 보자면, 정하진은 제 동생이 L급 포션을 쓰지 않아도 언젠가 깰 걸 알았던 게 분명했다.

“하아……. 네가 말 못 할 사정 있는 건 아니까. 미리 말 안 한 건…… 이번만 내가 참는다.”

“……고맙다.”

그걸 알면 미리 말하지 못하는 걸 이해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번만 참는다니…….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정하진은 살기 위해 끄덕였다.

제가 아무리 SS급 에스퍼라고 하더라도 정하영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배운 학습의 효과였다. 씁쓸한 마음으로 자리를 뜨려고 일어난 찰나, 정하영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너도 다 아는 건 아닌가 봐.”

“…….”

정하진은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지도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저도 모르게 물을 뻔했지만, 누군가 목을 턱 조른 것처럼 압박감이 느껴져서 입을 다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정하영은 말을 줄줄 이었다.

“너 하율이 깼을 때. 병원에서 표정이 계속 묘했거든. 티는 안 내려 해도 꽤 놀란 것처럼 보였어.”

“…….”

“하율이가 일어날 타이밍은 몰랐나 봐?”

“…….”

“아니면, 네가 알고 있던 시기랑 실제 시기랑 많이 다르거나.”

“…….”

정하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정하영은 저런 작은 반응만으로도 혹시나 제 쌍둥이에게 해가 갈까 싶어 손을 내저었다.

“아, 거, 괜히 표정 바꾸다 또 피 토할라. 안면 근육 관리해라.”

“큼.”

“새삼스럽게. 뭐 대단하게 머리를 쓴 것도 아냐. 네가 갑자기 호주로 간다는 것만 봐도 알겠으니까. 뭔지 몰라도, 여기 있는 것보단 거기가 낫다는 거겠지. 생각보다 큰 게 오나 본데. 그러니 이것도 준 거겠고.”

“…….”

정하진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그저 제 쌍둥이가 저리 술술 말해 주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하여간에. 뭐든 네가 알아서 하고 지금은 일단 꺼져라. 하율이 자는 데 방해된다. 이건 아껴 쓸게.”

“……그래. 너도 좀 쉬어.”

탁-

조용히 문을 닫고 제 방으로 돌아온 정하진은 침대에 누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오늘 자는 건 글렀군.’

예상대로 정하진은 한 시간이 넘도록 잠들지 못했다. 아예 자는 걸 포기하고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으니, 정하영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네가 알고 있던 시기랑 실제 시기랑 많이 다르거나.’

“…….”

정하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동생이 깨어나 기쁜 나날인 와중에도 제 머릿속은 혼란하기만 했다. 어느 순간부터 발 디딜 곳이 점점 무너져 내려 이젠 외발로 서서 버티는 기분이었다. 속이 턱 막힌 것 같은 기분에 이를 꽉 깨문 순간, 문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정하진은 평소와 다르게 침대에서 일어나 직접 문을 열어 주며 몽롱한 얼굴로 서 있는 손님을 확인했다.

“……한지수 가이드.”

“…….”

제 이름에 반응한 한지수가 고개를 들어 정하진을 올려다봤다. 그리곤 배시시 웃는다. 이번엔 저 작은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어느 쪽일까? 정하진은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한지수가 이리 약에 취해 오는 날이면 보통 제 이름을 부르는 날보다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한지수는 정하진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빈도가 절반까진 아니더라도, 어중간하게 3~4할은 되지 않나 싶었다.

정하진은 한지수가 방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자연스럽게 가로지른 지수가 침대에 눕더니 옆자리를 톡톡 두드린다.

“왜 안 자고 있어요?”

존댓말.

오늘은 투영한 상대가 아닌 자신을 제대로 봐 주는 날인가 보다.

“하…….”

문득 그 사실을 기껍게 느끼고 있는 자신을 인지한 정하진은 속으로 자조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어차피 한지수는 자길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두 사람이 함께 나눈 대화도, 함께 보낸 수많은 밤도……,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도 잊어야 하는데, 정하진은 그러지 못했다. 한지수와 함께한 시간은 애석하게도 그의 안에서만 점점 쌓여 갔다.

조용히 다가가 옆에 누운 정하진은 한지수가 상대를 착각했을 때처럼 안겨 오지 않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저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 누워 안 자고 뭐 하고 있었냐며 묻는 목소리는 이미 졸음에 잠겨 있었다.

정하진은 졸린 데도 굳이 내 방에 온 이유가 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상대가 기억하지 못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지수 가이드가 올 것 같아서 안 잤습니다.”

의외의 말이었던 걸까?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한지수가 보였다.

“왜 그리 놀랍니까?”

“……그냥…… 정하진 에스퍼가 나를 기다렸다는 말처럼 들려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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