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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01화 (101/172)

#101.

좋은 꿈 3

정하진이 아니더라도 무뚝뚝한 각성자는 꽤 많은 편이었다. 평소 웃는 얼굴을 잘 보이지 않는 각성자를 두고 무게를 잡는다느니, 만만하게 보일까 봐 일부러 표정 관리를 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종종 나올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정하진의 경우엔 조금 특별했다. 사람인 이상 헛웃음이라도 짓기 마련인데, 그는 애초에 웃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웃을 타이밍에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그건 마치…….

‘웃을 수 없어서 그런 표정이 최선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정하진이 웃지 않는 이유. 그게 중요하냐 묻는다면 지수는 고민 없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었다. 사람의 미소 유무가 딱히 중요한 문제인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단순히 궁금할 뿐이었다.

물론 이는 지수가 조금만 용기를 내면 간단히 해결될 궁금증이었다. 어떤 후원자와 대체 무슨 계약을 했기에 사람의 ‘미소’를 거래한 거냐고 질문하면 아마 그는 대답해 줄 터였다.

물으려면 물을 수 있겠지만, 지수는 아직 그 작은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는 정하진의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었다. 그냥 사적인 부분도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포함된 일을 자신이 궁금해하고 묻게 되는 순간 일어나게 될 변화가 신경 쓰여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늦은 건지도 모르겠지만.’

1월 중순부터 그와 함께 지내며 벌써 5월이 되었다. 매일 얼굴을 보고, 약 부작용으로 저 시기의 절반 가까운 날을 한 침대에서 잤다. 물론 잠만 잤지만, 어쨌든.

최근 들어 지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이제 정하진이 곁에 없으면 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그래서 몇 달이 지나도록 가이딩을 조절하지 못하고 계속 뿜어 대는 제 상태가 어쩔 때는 기껍기까지 해서, 그걸 제대로 인식한 어젯밤엔 심란한 기분에 술이 당겼다.

정하진이 지수의 알코올 섭취를 빈틈없이 관리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아마 술에 취해 잠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몇 달이나 같이 지냈으니 정드는 게 당연하다고 했겠지만, 적어도 지수에겐 그리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곁에 있어서 편한 사람인 것과, 그와 떨어지게 되는 걸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건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까.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상념으로 빠져들려는 찰나.

“쮜잇!”

“알았다. 당근은 이만큼만 넣을 테니…….”

“쮜에엣!”

“토토. 네 의견은 알아들었으니 진정해라.”

주방에서 소란이 일자 지수의 팔에 미미한 울림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보니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잘게 떠는 정하율이 보였다.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한 정하영 역시 피식 웃고 있었다.

“형. 토토는 당근 싫어해? 어제도 토토가 당근 숨기더라. 사과는 잘 먹던데.”

정하율이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물었다. 주방을 힐끔 살피는 시선을 보니, 마치 토토가 들을까 봐 신경 쓰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수는 어깨를 살짝 으쓱인 후 고개 숙여 정하율처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음……, 사실 당근은 내가 별로 안 좋아해. 그리고 토토가 그걸 알아.”

“우와아, 토토 진짜 똑똑한가 봐.”

“진짜 똑똑하지? S급 몬스터라 그런지 지능도 S급인 것 같아. 어쩜 내가 잘 때 정하진 에스퍼랑 둘이 대화할지도 몰라. 가끔 토토가 말할 줄 아는데 나한테만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거든.”

“아하하, 혹시 내가 들으면 나중에 몰래 말해 줄게.”

“응. 부탁할게.”

정하영은 제 맞은편에 앉아 햄스터의 눈치를 살피며 소곤소곤 대화하는 둘을 귀엽다는 듯이 흘끔 보곤 다시 태블릿을 두드렸다.

정하율이 기댄 어깨는 살짝 뻐근했지만, 팔을 끌어안은 덕분에 따뜻했다.

5월인데도 여전히 쌀쌀한 최근 날씨와 달리 오늘은 훈훈하고 포근했으며, 정하진이 새로 개발한 소스로 끓인 스튜도 꽤 기대됐다.

‘요즘은 높은 등급 던전도 안 터지고, 날씨도 좋고, 오랜만에 평온하네.’

* * *

늦은 밤.

일기를 쓰던 지수는 일기장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토토를 쓰다듬다 협탁 위로 올려 주었다.

“토토야. 아빠도 잘 거야. 먼저 자.”

“쮜이…….”

눈도 제대로 못 뜨고 협탁에 설치한 전용 침대로 들어가 누운 토토에게 지수가 이불까지 잘 덮어 주었다. 뭐 했다고 그리 피곤한 건지 토토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지수는 요즘 들어 토토가 잠이 많아졌다고 생각하며 일기를 마무리 지었다.

인벤토리에 일기장을 보관하고 방 불을 끄려는 찰나.

똑똑-

“네?”

노크에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방 밖에서 정하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한지수 가이드. 잠시 들어가도 됩니까?”

“어, 네. 들어오세요.”

바로 문이 열리고 편한 옷차림의 정하진이 들어섰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그럼요.”

지수는 침대 끄트머리에 조심스럽게 앉는 정하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안 그래도 넓은 침대에서 굳이 가장 먼 자리에 앉을 필요가 있을까? 함께 지내면서 정하진의 배려심이 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랬다.

‘혹시 내가 가까이 앉았을 때 불편한 내색한 적이 있나?’

지수가 혼자 엉뚱한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는 정하진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더니 곧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지수 가이드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그리고 의논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오……. 부탁하고 싶은 게 뭔지 먼저 듣고 싶은데요. 조용히 찾아온 걸 보니, 뭐 은밀한 거래인가요?”

지수가 장난스레 대답하자 정하진 역시 그 장단에 맞추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주 은밀한 거래를 부탁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일 겁니다.”

지수는 정하진이 저렇게 진지한 얼굴을 한 채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로 응수하는 뻔뻔함에 푸흣 웃어 버리며 클리셰적인 대사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좋아요. 어디 한번 들어 보죠. 뭔데요?”

“한지수 가이드가 예전에 제게 주려고 했던 포션 말입니다.”

“아, 네.”

지수는 여전히 L급 포션 두 종류를 인벤토리에 보관 중이었다.

정하율이 깨어나기 전엔 동생에게 한 번 더 먹여 보는 게 어떻겠냐고 몇 번이나 제안했지만, 정하진은 그때마다 거절했었다. 이미 똑같은 포션을 먹여 본 적이 있었으나 소용없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간 몇 번이고 선물하려 했으나, 꾸준히 거절했던 건 정하진이었다. 그랬던 이가 먼저 포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궁금했던 지수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상처 재생 포션 5개, 회복의 포션 1개씩 제게 팔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포션이 필요하세요?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이건 그냥 드린다니까요?”

“아뇨. L급 포션을 그냥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한지수 가이드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거로 값을 치르겠습니다.”

“…….”

정하진 역시 한지수가 돈이 많은 건 알고 있었다. 한지수의 연봉도 B급 가이드치곤 대단히 높은 편이기도 했고, 또 강재윤이 생전에 미리 조치해 둔 덕분에 강재윤의 재산과 연금은 모두 한지수의 몫이 되었다.

물론 그 돈엔 손대지 않고 있지만. 어쨌든 한지수는 부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상응하는 값어치를 내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L급 포션이라는 것이 애초에 그냥 성의로 받을 값어치의 포션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으음~ 제가 돈이 필요 없는 건 아실 테고.”

“예. 그러니 원하시는 게 뭐든 최대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음, 좋아요. 포션은 지금 먼저 드리고, 원하는 건 좀 고민해 볼게요. 갑작스러워서 딱히 마땅한 게 생각나지 않거든요.”

대가는 나중에 받겠다고 통보한 지수가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내밀었다. 그가 요청한 대로 L급 상처 재생 포션 5개와 L급 완벽한 회복의 포션이었다.

정하진은 포션부터 망설임 없이 내민 지수를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원하는 게 생기면 바로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잊지 않고 기다릴 겁니다. 너무 늦으면 재촉도 할 겁니다.”

“네. 그럴게요. 그럼 이건 일단 됐고. 저랑 의논하고 싶은 건 뭔가요?”

사실 지수는 그가 포션을 팔아 달라는 이유보다 이게 더 궁금했다. 포션이야 그가 각성자인 만큼 언젠가 쓸 곳이 있겠거니 싶었으니까. 호기심을 숨기지 않은 눈빛으로 응시하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뜬금없게도 다른 국가의 이름이었다.

“호주. 프랑스. 브라질. 이 세 나라 중에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듭니까?”

“……?”

당황한 지수가 눈을 껌뻑이자, 그는 여전히 진지한 태도를 고수하며 부족한 말을 덧붙였다.

“만약 한지수 가이드가 한동안 저 셋 중에 한 곳에서 지내게 된다면, 어디가 좋을 것 같습니까?”

“어, 으음……. 꼭 하나 고르라면 호주? 가 낫지 않을까 싶긴 한데, 갑자기 왜요?”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라 여긴 지수가 자세히 말해 달라는 듯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하진은 “호주…….” 하고 작게 읊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지수 가이드만 괜찮다면 하율이와 저와 토토와 넷이 잠시 호주에서 지내는 건 어떨까요.”

“……갑자기요?”

“예. 사실……. 하율이가 많이 힘들어합니다. 아마 잠들기 전에 기억하는 세상과 지금 한국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

내심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여겼으나, 저 말을 들으니 바로 이해가 됐다.

이제 막 깨어난 정하율에게 지금은 세상이 대격변을 겪으며 자신이 잃은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시작한 시기였으니까. 깊은 잠에 빠졌다가 어느 날 눈 떠 보니 부모님과 친구들을 더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데 혼란스럽지 않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종종 우리 목소리를 들었어도, 꿈처럼 희미했다고 했고…….’

한마디로 중간중간 주변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의식이 항상 또렷했던 건 아니라고 했었다.

지수는 내심 정하율이 요 며칠간 함께 잘 지내서 깊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가족끼리 있을 땐 또 그게 아니었던 듯해서 마음이 아팠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정하율은 지금 중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른이었어도 감당하기 힘든 일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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