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좋은 꿈 1
은은한 조명에 아이보리톤으로 꾸며진 병실.
한번 앉으면 일어나기 싫어질 정도로 아늑한 소파.
듣기 좋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읽어 주는 이야기.
간간이 청량한 소음을 울리는 최상급 수정들.
줄줄 흘리는 가이딩이 흩어지지 않도록 살포시 맞잡은 손이 주는 따스함.
모든 것이 포근하고 따뜻했다.
정하진의 넓은 어깨에 기대앉아 안락함에 취한 지수는 그가 읽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이번 책은 정하율이 읽었다면 좋아했을 거라며 김현아가 추천해 준 책이었다.
평범한 목동이었던 주인공이 우연한 계기로 정령이 깃든 검을 줍게 되고, 그로 인해 원하지 않았음에도 정령왕에게 선택받아 마법 계약에 묶이며 시작되는 이야기.
정령왕의 소원을 들어주면 불공정 계약에서 해방 시켜 준다는 말에 미래를 약속한 여인을 시골 영지에 남겨 둔 채 홀로 수도로 향하며 시작된 어영부영 모험 이야기도 어느덧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평생 작은 시골 영지에서 목동 일만 했던 주인공이 하루아침에 180도 뒤바뀐 삶을 살게 된 이야기는 어찌 보면 진부했지만, 그래도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전개 덕분에 지수는 이 이야기를 꽤 즐겁게 듣고 있었다.
특히 어영부영 휘둘리다 예정에 없던 여정으로 앞으로의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될 친구들을 얻고, 위기에 처한 줄도 몰랐던 세상을 구하게 된 주인공이 황당해하는 마음의 소리를 들을 때면 종종 웃기도 했다.
이야기의 종장엔 얼떨결에 세상을 구한 주인공이 정신 차려 보니 정령왕과 드래곤의 단짝으로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했다는 서술도 나왔다. 책 속의 인간들 역시 현실 인간들 못지않게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섬길 것이 필요했던 이들이 주인공과 정령왕과 드래곤의 조각상을 세웠다는 부분을 듣던 지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멋대로 이야기를 부풀리고 기록하는 현시대 특정 집단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긴 이야기 끝에 주인공은 그럴 의도가 없었으나 세계를 구했다. 그리고 원치 않았지만, 자연스레 영웅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영광을 동료들에게 돌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길 염원했다.
지수는 유독 줏대 없이 여기저기 휘둘리는 주인공이 자기랑 비슷한 성격이라고 느꼈다. 본인도 싫은 걸 싫다고 제대로 표현 못 하고 휘둘리던 적이 많았으니까.
일종의 반면교사 같은 캐릭터라 다소 불편한 전개도 있었지만, 지수에게 위안이 된 점도 있었다. 바로 주인공이 점차 성장했다는 부분이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주관을 표현하고, 옳은 것이 옳다고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되었다는 부분도 마음에 들었는데,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최종 장에 돌입했을 땐 퍽 아쉬웠다.
맑은 정신과 졸음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던 지수는 홀로 봄날이 주는 포근함과 치열하게 싸우며 정하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기에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피핀은 정령왕이 떠난 검을 내려놓고 후련하게 웃었다. 결국 그녀의 말대로였다. 세상은 흘러간다. 설령 이 세계가 무너진다 하여도 세상은 흐를 것이다.
피핀은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이제 그는 그녀를 만나러 갈 것이다. 이대로 고향에 돌아가면 그녀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모험을 들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피핀의 이야기가 아닌 ‘내가 수도에서 어떤 모험가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야…….’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될 예정이었다.
어떤 모험가가 드래곤 친구를 얻은 것도, 엘프와 영원한 동맹을 맺은 것도, 드워프와 우정의 잔을 나눈 것도, 신분을 감춘 황태자와 함께 여정을 떠나 많은 이들을 만나고, 잃고, 가슴에 묻었다는 것도 그녀에게 전부 들려줄 예정이었다.
피핀은 여전히 작은 시골 영지의 목동이었다. 정령이 깃든 검을 잡았던 손은 이제 지팡이를 잡을 것이고, 실프족에게 배운 다소 난해한 우정의 춤은 장차 그녀와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면 가르쳐 줄 예정이었다.
귓가에 스친 바람이 피핀에게 속삭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석양이 그의 등을 비췄다. 앞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고향으로 가는 방향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정령왕과 드래곤 로드와 어떤 목동.’ 끝.”
“…….”
거의 졸기 직전이었으면서,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던 지수와 침대맡에 얌전히 앉아 함께 듣던 토토가 동시에 눈을 떴다. 그대로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곤 여전히 정하진의 어깨에 기댄 채 물었다.
“……외전은 없어요?”
“외전은 따로 없군요. 이 시리즈는 여기서 끝입니다.”
“아쉽네요.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들이랑 패턴이 다른 것도 좋았어요.”
“현아 말로는 이 책이 전통 판타지라 최근 나왔던 소설과는 약간 다를 거라고 했습니다. 뭐가 전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동안 정하율이 좋아했던 작가들의 작품은 전부 주인공이 죽어서 다른 세계의 모르는 몸에 빙의하거나 아니면 회귀해 다가올 재앙에 미리 대처하며 세계를 지켜 내는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달랐다. 회귀도 빙의도 환생도 없었다. 그저 주인공이라기엔 조금 모자라고 평범한 주인공이 여러 친구를 만나며 함께한 여정 속에서 성장하는 이야기였다.
거의 한 달 가까이 들은 이야기가 끝나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야기와 다르게 주인공의 성격과 제 성격의 유사한 점이 많아 정이 들어서 그런 걸까?
어째 다른 책의 끝을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짙은 아쉬움이 밀려왔다.
정하진은 그런 지수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왼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 두며 물었다.
“현아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추천해 달라고 할까요?”
“아뇨, 괜찮……, 어?”
아무래도 본인의 취향보단, 정하율의 취향대로 책을 고르는 게 맞다고 느껴져 거절하려던 지수는 저도 모르게 토토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지수의 반응을 본 정하진 역시 시선을 돌렸다. 졸지에 두 사람에게 주목받은 토토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쮜?”
“한지수 가이드?”
“아, 아뇨. 그게…….”
말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지수의 시선이 토토의 뒤로 향했다. 정확히는 토토의 뒤에 있는 정하율의 새하얀 손에.
‘움직인 것 같았는데…….’
잘못 본 걸까? 만약 움직였다면 토토가 눈치채지 않았을까?
괜히 확실하지 않은 말을 해서 정하진에게 헛된 기대감을 주면 어떡하지? 싶어 고개를 저으려는 찰나, 귀를 쫑긋 세운 토토가 벌떡 일어나더니 정하율의 몸을 타고 올라가 가슴 위에 섰다.
“쮜잇!?”
“토토. 왜……,”
이번엔 정하진도 말을 끝까지 뱉지 못하고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일순 토토가 올라간 가슴이 평소보다 높이 솟았기 때문이었다.
눈을 크게 뜬 그가 숨죽이고 지켜보자 늘 느리고 얕았던 정하율의 호흡이 조금씩 깊어졌다. 이어 숨을 크게 “후우우…….” 내쉬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
정하진은 내내 맞잡고 있었던 한지수의 손을 놓고 일어나 조심스레 정하율에게 다가갔다. 지수도 그를 따라 일어나 침대로 바짝 다가갔다.
정하율의 가슴 위에 서 있던 토토는 잠든 소년의 얼굴을 응시하며 눈여겨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작은 꼬리를 곤두세웠다. 또 한차례 정하율의 호흡이 깊어졌다.
정하진은 몹시 놀란 얼굴로 제 동생을 바라봤다. 일어난 채 굳어 버린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은 그를 본 지수가 조심스레 넓은 등을 두어 번 토닥이듯 부드럽게 쓸었다.
단순하면서도 다정함 어린 손길에 침을 꿀꺽 삼킨 정하진이 입술을 벌렸다. 쉬이 말이 나오지 않는 듯 몇 번이고 침을 삼키고, 입술을 파르르 떨던 그가 겨우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듯 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하율아?”
“쮜이?”
토토도 합세해 정하율을 불렀다. 지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정하율을 바라봤다. 정하율의 호흡은 곧 느리고 고른 평소대로 돌아왔지만, 뭔가 평소와는 달랐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정하진 역시 이를 분명하게 느낀 듯이 정하율의 손을 잡고 재차 이름을 불렀다.
“하율아.”
“쮜이이.”
그때, 정하율의 얼굴만 바라보던 토토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다 곧 다시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정하율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 순간, 5년간 감겨 있던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
“……쮜?”
“…….”
눈꺼풀이 연신 떨릴 때마다 포개진 긴 속눈썹이 벌어질 듯 말 듯 했다.
“하율아. 형 목소리 들려?”
평소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정하진의 목소리가 자극이 된 것인지, 잘게 떨리던 눈꺼풀이 드디어 천천히 열린다.
“하율아…….”
아직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린 시선의 눈동자가 목소리를 따라 움직인다. 둔탁해 보이는 동공이었지만, 이내 부스스 뜬 눈이 곱게 휘었다.
“하율아, 형 알아보겠어?”
간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애원과도 같은 목소리를 들은 정하율이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혹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힘없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혀엉…….”
“……!!”
잘게 떨리는 큰 손이 동생의 얼굴을 보듬는다. 흉터 많은 거친 손이 여린 피부에 혹여나 상처라도 입힐까 싶었는지, 곁에서 지켜보는 이조차 경건해질 만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정하율의 얼굴을 감싸 잡은 채 상체를 숙인 정하진이 동생과 이마를 맞댔다. 그 아래서 정하율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하아……, 하율아.”
정하진이 동생의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졸지에 형제 사이에 낀 토토가 불편한 듯 “쮝!” 하는 소리를 냈지만, 포옹은 더 짙어졌다.
동생의 몸에 큰 압박이 가해지지 않도록 힘을 조절한 정하진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이 연이어 크게 호흡했다. 천하의 정하진도 많이 놀랐는지,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이 그답지 않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대로 몇 번 숨을 고르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진정한 정하진이 나지막하고도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하율이……, 잘 잤어? 좋은 꿈 꿨어?”
“으응……. 잘 잤어. 형이랑 누나…… 엄청…… 보고 싶었어…….”
힘없는 웃음소리를 들은 정하진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겨우 가다듬은 호흡이 또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서 조용히 형제를 지켜보던 한지수는 이 시간을 온전히 형제 둘이 가지게 배려하고 싶었다. 그래서 뒤로 한걸음 물러서려던 순간, 힘없이 뻗어 온 새하얀 손이 지수의 셔츠 자락을 꾹 잡아 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