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98화 (98/172)

#098.

일기 5

예나 지금이나 시간은 분명 똑같이 흐르고 있을 텐데, 한지수는 요즘 들어 부쩍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고 느꼈다. 특히 일기에 날짜를 쓰다 보면 문득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난 거냐며 혼자 놀라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한지수가 그동안 하루하루 열심히 쓴 일기 내용은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특히 아침 일과는 거의 유사한 내용이었다. 2월 한 달간 지수는 대부분의 아침을 정하진과 함께 동생의 병문안을 갔다. 매일까진 아니지만, 거의 주 5일 정도는 갔던 것 같았다.

지수가 집에서 쉬는 날엔 정하진 혼자 다녀오는 날도 있었다. 물론 그는 지수를 혼자 두지 않았다. 그가 혼자 움직일 때는 오직 정하영이나 김현아가 대전으로 와서 며칠 휴가를 보내다 가는 날뿐이었다.

정하진은 지수에게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병문안은 오히려 지수가 원한 일이었다. 어차피 이 집에서 바로 길만 건너면 병원이다 보니 집에서 그냥 쉴 바에 가서 쉬자며 먼저 권한 적도 많았다.

병원 내에서 필요한 모든 일은 전문 인력들이 알아서 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하진과 지수가 할 일이라곤 정하진과 토토와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것 정도였다. 그래서 대부분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거나 정하율이 좋아하는, 또는 한지수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했다.

그 외에는 평소처럼 푹신한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 정하진이 동생을 위해 읽어 주는 책을 같이 들었다. 지수는 책을 읽어 주는 정하진의 낮은 목소리가 좋았다. 이렇게 깊은 생각 없이 지내다 보니 딱히 특별한 일을 하는 게 아닌데도 병원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편이었다.

정하진은 동생이 좋아했던 작가의 작품 중 완결작 위주로 골라 왔다. 그렇다 보니 종종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실컷 잘 읽던 정하진이 돌연 정하율과 지수와 토토에게 사과하는 일이.

그 사과의 내용이라고 하면,

“……음. 미안해, 하율아. 미안합니다, 한지수 가이드. 토토. 완결이라고 해서 끝까지 내용이 있을 줄 알았는데, 작가가 사망하고 출판사에서 완결 처리 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끝이고 작가가 대격변 이후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출판사의 입장문이 적혀 있습니다. 그 외의 다른 내용은 없군요.”

대략 이런 식이었다.

이날 정하진은 바로 다음 책을 읽었지만, 지수는 그 책의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정하율처럼 자기가 사랑했던 이야기의 끝을 보지 못하는 독자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다. 비단 책뿐이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그랬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써 내려가는 작가라고 가정할 경우, 처음 계획했던 이야기의 ‘결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사라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지수 역시 이제는 자신이 생각한 형태가 아닌 다른 결말이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일기 쓰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처음 지수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강재윤과 했던 약속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꼭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하루였더라도 꾸준히 기록을 남기면서 공허하고 메말랐던 마음에 다시금 일상의 즐거움이라는 소소한 감정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정하진이 읽어 준 책 시리즈가 10개를 넘었을 무렵 한지수 역시 특정 작품을 좋아하게 되었다. 최근에 신작을 낸 작가의 책은 직접 구매해 읽어 보기도 했다. 2월은 한지수에게 웹소설 읽기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긴 달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특별한 건 없는 하루하루였고, 다르게 해석하면 평온한 나날이었다. 2월엔 독서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긴 것 외에 또 다른 변화도 있었다. 지수가 자발적으로 상담을 하러 가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변화였다. 지수는 평화 길드 대전 지부에 매주 방문해 꼬박꼬박 성실하게 상담에 임했다.

물론 상담한다고 해서 지수의 내면의 혼란함이 눈에 띄게 호전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성실하게 임했다.

예전엔 ‘선생님이 제게 아무 조언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냥 제가 할 말만 해도 될까요.’ 정도로 임했던 상담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제 생각을 이야기하고, 제 감정을 조금이나마 솔직하게 꺼내 놓기 시작했다.

“이번 주는 그냥 평범하게 보낸 것 같아요. 밥도 잘 먹었고요. 일기도 매일 썼어요. 그런데 딱히 뭘 해야겠다는 의욕은 안 나요. 그냥 집에서 누워만 있고 싶어요.”

“쉬는 날이라고 해서 누워만 있으면 늘어지기 마련이죠. 가능하면 대낮에 아주 짧게라도 집 밖으로 외출하는 건 어때요? 집 앞 편의점으로 잠깐 나갔다 오는 것도 좋아요. 꼭 오래 나갈 필요는 없답니다. 중요한 건 집을 잠시 떠났다 오는 거죠.”

“으음……, 네. 노력은 해 볼게요.”

대전에서 새로 만난 선생님은 그런 지수에게 여러 방향을 제시해 주곤 했다. 지수는 이제 누군가의 조언을 듣는 게 예전만큼 부담스럽진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가끔은……. 아직도 가슴 한구석엔 자신이 이렇게 빨리 괜찮아져도 괜찮은 건가 싶을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런 의문이 들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항상 토토나 정하진이 지수의 생각을 분산시켰다.

지수는 저 둘이 곁에 없었다면, 아마도 자신은 꽤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둘 덕분에 상담받는 게 더는 큰 스트레스로 여겨지진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 나아가야겠다고 결심한 것과 별개로 심란함 역시 존재했다.

가끔 저렇게 마음이 뒤숭숭한 날엔 D~A등급 사이의 던전을 공략하기도 했다. 김현아가 미리 여러모로 신경 써 준 덕분에 두 사람은 ‘성하진’과 ‘김지수’의 신분을 유용하게 써먹으며 종종 1차 공략팀으로 던전에 입장할 수 있었다. 지수가 미공략 던전에 입장하는 건 제법 오랜만이었던 터라 모처럼의 던전 공략에 선물 받은 아이템으로 대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사실 활약이라고 해 봤자 저 앞에서 달려오는 적을 향해 달려간 후, 적에게 등을 보이는 것뿐이었지만. 안식의 신에게 받은 아이템 덕분에 지수를 노리고 우악스럽게 달려든 몬스터들은 모두 비명횡사했다. 아이템에 적힌 것처럼 적들은 척추가 역으로 꺾여 비명횡사하거나, 눈, 생식기, 발 중 하나를 터뜨리며 날아갔다.

보고 있자면 굉장히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공략팀 사람들은 지수의 레어 아이템 덕분에 편하게 공략했다며 고마워했다. 힘들이지 않고 던전을 공략한 팀원들도 기뻐하고, 여럿에게 귀여움을 잔뜩 받은 토토도 좋아했다. 그렇게 걱정하느라 진땀 뺀 정하진만 제외한다면 모두가 행복한 공략이 몇 번 있었다.

2월 한 달 동안 국내 던전 공략을 몇 번 다녔다고 ‘성하진’과 ‘김지수’는 벌써 평화 길드 내 페어 커플로 소문이 났다. 아무래도 에스퍼와 가이드인 것도 한몫했지만, 평소 다른 사람 없이 둘이서만 꼭 붙어 다니는 모습 덕분에 소문이 부푸는 모양이었다.

대외 활동을 안 하는 두 각성자에게 너무 많은 주목이 생기자, 지수보단 정하진이 신경을 쓰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함께 따뜻한 차를 마시며 느긋한 오후를 보내던 어느 날,

“혹시 소문이 신경 쓰입니까?”

“음? 아뇨. 어차피 퍼질 대로 퍼졌던데요?”

“그래도 신경 쓰인다면 말씀해 주시죠. 한지수 가이드가 원한다면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겠습니다.”

“……제가 원하면요?”

“예.”

“근데 이게 우리가 나서서 해명한다고 정정이 될까요? 정하진 에스퍼는 해명하길 원하세요?”

“개인적으로는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정정해 봤자 소용없다고 봐야겠죠. 괜히 해명하느라 시간 뺏기고 수고할 바엔 그냥 놔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역시 그렇죠? 저도 그래요.”

“예. 그리고…….”

둘 사이를 오해하면 오히려 다른 목적으로 접근할 사람도 없을 테니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다며 굳이 구구절절 말을 덧붙였다. 평소 정하진이었다면 어차피 가짜 신분이니까 자긴 상관없다고 짧게 말했을 텐데, 어째 귀 끝을 붉히며 굳이 주절주절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는 모습이 생소했다.

한지수 입장에선 어쩐지 그 순간 그가 인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평소와 달리 꽤 어색하게 구는 정하진 덕분에, 지수도 덩달아 어색하게 끄덕이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외부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3월 초쯤, 평화 길드에 A급 에스퍼와 C급 가이드 선남선녀 커플이 탄생했다며 기사가 떴다.

당연히 허가 없이 멋대로 보도한 기사였다. 심지어 기사에 쓰인 사진도 정하진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떨어진 거리에서 줌을 당겨 찍은 탓에 이목구비도 자세히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사진이었다. 평화 길드에서 바로 조치해 기사를 내렸지만, 각성자가 연예인보다 더 관심받는 세상이다 보니 두 사람의 와전된 관계는 급속도로 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수는 딱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하진도 지수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을까 싶어 걱정하는 것 외엔 딱히 저런 기사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허락 없이 나간 사생활 침해 가득한 뉴스로 불편한 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에게 크게 영향을 주지도 못했다. 정하진도 한지수도 일회용 변신 아이템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일회용 변신 아이템은 음성 변조가 안 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굳이 타인과 대화할 일이 별로 없다 보니 큰 문제는 없었다. 두 사람은 외출할 때 그날그날 다른 모습으로 현관을 나섰다. 어느 날은 둘 다 어린아이의 모습이었고, 어느 날은 정하진은 백발노인, 지수는 열네 살 정도 청소년의 모습이기도 했다.

토토도 그날그날 일회용 변신 아이템을 사용했다. 어떤 날은 참새, 어떤 날은 드워프 토끼, 어떤 날은 치즈 줄무늬 고양이, 어떤 날은 포메라니안으로 변했다. 또 어떤 날은…….

“토토야……, 안타깝지만, 오늘은 포포랑 둘이 집 지켜야겠다. 대신 아빠가 올 때 맛있는 거 사 올게. 응?”

“킁……. 크어엉…….”

“토토. 늠름한 모습을 모두에게 보이고 싶은 기분은 이해하지만, 그 모습으로 나가면 마취총 감이다. 오늘은 얌전히 집에 있어라.”

“크르르릉……!”

“물론 마취총 체험을 해 보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캬아아앙!”

“정하진 에스퍼, 토토 너무 놀리지 마요…….”

거대한 호랑이로 변하기도 했다. 이처럼 거대화된 날엔 함께 외출하지 못해 눈물을 펑펑 흘리며 포포와 둘이 집을 지키곤 했다.

3월 중순이 되었을 때, 지수는 정하진의 집에 이런저런 소품이나 가구가 늘어난 것을 눈치채고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원래라면 잠시 머물다 갈 생각이었던 곳인데, 정하진과 지수와 토토의 살림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었다. 모델하우스 같은 집이 아니라, 사람 사는 느낌이 나는 집이 되고 있었다.

대격변 이후 현저히 낮아진 지구의 기온 탓에, 대전엔 4월 중순이 지나서야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지수는 정하진과 토토와 함께 오랜만에 벚꽃을 구경했다. 처음 방문한 벚꽃 명소엔 사람이 넘쳤다. 이날 두 사람은 인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지수는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정하진은 오직 지수만을 눈에 담았고, 토토는 정하진을 지켜봤다. 각자 다른 것을 봤던 하루는 지수의 일기장에 꽤 길게 기록되었다.

서울은 재건 능력을 지닌 에스퍼들이 한창 복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워낙 피해 규모가 방대해 당분간은 쉽지 않은 것이라는 뉴스가 허구한 날 나왔다. 정하진도, 한지수도 서울엔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지수가 머무는 방은 이제 손님방이 아니라 한지수의 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순식간에 5월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4월 30일. 평범한 아침.

2주 전부터 정하진이 읽어 주던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마침내 행복한 결말에 도달한 순간, 긴 잠에서 깨어난 정하율이 눈을 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