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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97화 (97/172)

#097.

일기 4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주변을 한번 쭉 둘러본 지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여기도 나름 익숙해졌나 봐. 이번엔 안 놀랐어.”

듣는 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목소리를 내서 말한 이유는 하나였다. 이 순백의 공간에만 왔다 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다 보니 혼잣말이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시야에 보이는 게 없다는 것도 꽤 두려운 일이었다. 지수는 이번엔 아예 시스템 창을 띄워 둔 상태로 한숨을 쉬었다.

“안식~ 여기에 있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뭐야. 바쁜 거 끝나서 부른 거 아니었냐고…….”

투덜거린 지수가 허공에 발라당 누웠다. 허공에 눕는다는 것도 처음에야 신기했지 아예 뒹굴기도 가능하다는 걸 안 이후론 어색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데굴거리다 바닥인지 천장인지도 모르는 백색 허공을 바라보던 지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할 수 없는 상태면 부르지나 말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순간,

“미안. 그동안 꽤 바빴거든.”

“……!!!”

등 뒤에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벌떡 일어난 지수가 후다닥 몇 걸음 떨어져 바라보니,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어…… 어어…….”

당황해 눈만 깜빡이자 남자 역시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살풋 미소 지었다.

“…….”

지수는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하고 남자를 살폈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밤하늘 같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이상하게 낯이 익은 미인이었다.

여기저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수습하지 않고 대충 포니테일로 질끈 묶었는데도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큰 키에 넓은 어깨. 익숙한 느낌의 남자의 외형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복식이었다.

‘콘서트 무대 의상도 저거보다 화려하진 않겠다…….’

정장 비슷한 스타일의 옷이었는데 장식이 굉장히 화려했다. 재킷 옷깃과 소매, 그리고 주머니엔 은실로 아름다운 자수가 수놓아져 있었고, 옷 소매에 달린 에메랄드 커프스도 현대식이라고 보긴 어려워 보였다. 마치 오래전 유럽의 귀족이나 입을 법한 옷 같다고 해야 하나.

이질적인 의상인데도 저 남자에게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 순간, 지수는 제가 너무 사람을 뜯어봤다는 걸 자각하고 민망해져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 아, 안녕하세요? 혹시…….”

“어? 잠깐. 내가 누구냐고 물으려는 거면 일단 질문하지 말고 있어 봐.”

“네?”

“그게 질문이라면 대답해 줄 수는 있는데, 고작 질문을 그런 거로 날리면 너무 아깝지 않겠어? 오늘 내가 받을 수 있는 질문은 딱 하나뿐이거든.”

“어…… 그래요?”

남자가 지그시 바라보자 지수가 서둘러 말을 고쳤다.

“어, 그, 그렇군요.”

지수가 이해한 거로 판단한 남자가 씩 웃자, 공간에 소파 두 개가 생겨났다. 남자가 먼저 앉고, 잠시 머뭇거린 지수 역시 남은 소파에 어정쩡하게 앉았다. 이어 둘 사이에 작은 테이블이 하나 생기더니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온갖 다과와 차가 차려졌다.

“먹으면서 들어.”

“네.”

“참고로 이전에 네가 질문했다가 답을 받지 못한 것들은 모두 내가 답할 수 없어. 나도 네게 알려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미안하지만 이쪽도 제약이 많은 몸이거든.”

“…….”

제약이 뭔데? 궁금했지만 고개만 갸웃하니, 눈치 좋은 남자가 알아서 줄줄 말을 꺼냈다.

“사실 지금 이 모습으로 너랑 만난 것도 해선 안 될 일이긴 한데……. 어차피 곧 소멸할 몸이라 그냥 질러 봤어. 꼬우면 위에서 알아서 페널티 주겠지, 뭐.”

페널티는 또 뭔가. 위는 또 뭐고. 묻진 못해도 지수는 이 남자, 그러니까 아마도 안식의 신이 확실할 이 남자의 위에 또 상급자 개념이 있는 모양이라고 여겼다.

‘후원자끼리도 등급이 있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남자의 혼잣말에 정보를 얻은 지수가 조용히 끄덕였다.

“일단. 네가 보낸 질문은 다 확인했어. 그중에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더라. 미안하게도 후원자가 간섭할 수 없는 내용들이라…….”

“…….”

지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자는 저 불신 가득한 눈초리를 보고 큭큭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해해 줘. 원래 세상일이 다 그런 거란다.”

“…….”

“그래도 후원자들은 인간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있어. 가끔 좀 삐딱하게 구는 녀석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지구가 유지되길 바라는 후원자들만 피후견인을 만들고 있으니까, 너무 의심하진 말아 줘.”

“…….”

지구가 유지되길 바란다니. 그럼 지구가 유지되지 않는 게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걸까? 예전의 지수였다면 코웃음 쳤겠지만, 지금은 확실히 가능할 것 같았다. 만약 현존하는 에스퍼만으론 감당 못 할 만큼 많은 던전이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터진다면 그게 지구 멸망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혼자 끔찍한 상상을 하고 부르르 떨고 있으니 옆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리 즐거운 걸까? 내내 눈을 곱게 접어 웃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누군가가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누구랑…… 좀 닮았는데,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또 눈을 가늘게 뜨고 부리부리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본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관둬라. 어차피 꿈에서 깨면 기억 못 할 테니까 쓸데없이 용쓰지 말고.”

“어?”

이곳에서 꾼 꿈은 나가서도 기억나던데, 왜 기억 안 날 거라고 하는 걸까? 지수는 질문하는 대신 어서 알려 달라는 의미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수의 노골적인 고갯짓을 본 남자가 노력이 가상하다는 듯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일단. 아까 말했던 것처럼 네가 이 모습을 본 것 자체가 기억에 남으면 안 되니까 그 부분은 내가 지울 거야. 널 위해서니까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진 말고.”

“…….”

“그리고. 네게 당부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

“일기를 자주 써. 아니. 가능하면 매일. 네 일기를 양분 삼아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내 일기를 어디에 쓰게요? 양분이 뭔데요?”

너무 황당한 당부라 저도 모르게 질문을 해 버린 지수가 뒤늦게 입을 막았다. 남자는 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했다.

“이번 질문은 이거로 해야겠네. 이것도 자세히 말하긴 어려운데. 원래 세상에 기록되는 건 다 중요하거든. 그리고 난 내 피후견인들의 기록을 모으고 있어. 그 기록을 모아서 일종의…… 음.”

중간에 말을 멈춘 남자가 이어 몇 번 더 입을 벙긋하더니 이내 포기했다.

“아 씨, 이건 또 말 못 하는 부분인가 보네. 음. 그런데 이렇게 말하다 말면, 너로선 아무래도 궁금해할 것 같으니 이것도 기억에서 지워야겠다. 아, 걱정하진 마. 네가 일기를 써야 하는 건 주입 시켜 둘 테니까.”

“아 잠깐. 마음대로 제 기억 건드리지 말아 줄래요?”

“그래도 명확하게 답을 얻지 못하면 괜히 궁금하고 답답하지 않을까? 차라리 기억을 조금만 손보는 게…….”

“아, 내 기억이라고요. 건드리지 말라고요, 진짜. 멋대로 건드리기만 해 봐요.”

지수가 드물게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격한 반응을 본 남자는 더 설득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여간에 일기는 매일 써. 이유는 나중에 때가 되면 꼭 설명해 줄 테니까 지금은 궁금해하지 말고. 넌 그냥 쓰는 거야. 알았지?”

“……일단 알았어요.”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원래 하던 일이니 상관없었다. 대체 양분이 뭐고, 어디에 쓰려는 건지 궁금하지만 그것도 나중에 알려 준다고 약속했으니 지금은 일단 묻어 둘 생각이었다.

질문을 이미 사용해서 그런지 남자는 이젠 지수를 꿈에서 내보내겠다고 했다. 약속한 대로 기억을 지우진 않겠지만, 그래도 제 모습을 본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삭제해야 하니 이해해 달라며 초월자이면서도 제게 양해를 구했다.

알았다며 지수가 끄덕인 순간. 정신이 꿈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수는 완전히 깨기 직전, 제게 손을 흔들며 웃는 남자를 보면서 누군가를 확실하게 떠올렸지만, 어째서 그 사람을 떠올렸는지는 까맣게 잊은 채로 꿈에서 쫓겨났다.

* * *

눈을 깜빡거린 지수가 방을 살폈다. 아직 어둑했고 밖도 조용한 걸 보니 이른 아침인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협탁 위에 전용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든 토토가 보였다. 침대맡에 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5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무슨 꿈이 이래?’

이상한 꿈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 방문했던 순백의 공간에서 차와 온갖 디저트를 먹고, 안식의 신과 대화를 나눈 것 같은데, 대화의 내용이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나눴던 상황만 기억나고, 그곳에서 겪었던 것 중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디저트를 가득 담은 테이블과 그 맞은편의 빈 소파뿐이었다.

‘이전 질문은 전부 대답 못 해 준다고 했고, 후원자를 의심하지 말라고 했고, 또 뭐였지. 아, 기록이 중요하니 일기를 쓰라고, 무슨 양분이 어쩌고…….’

지수가 이전에 안식의 신에게 다이렉트 메시지로 보냈던 질문들을 떠올렸다.

똑같은 던전이 다시 나타나기도 하는지. 사라진 던전은 어떻게 되는지. 던전에 삼켜진 채 소멸당한 각성자들은 어떻게 되는지. 반지 스킬을 썼을 때 나왔던 메시지가 왜 다른지. 혹시 레미니센스를 테이밍 할 수 있는지. 정하진 에스퍼의 동생 정하율은 정말 L급 회복 포션으로 깨어날 수 없는 건지 정도가 당장 떠올랐다.

‘다 못 알려 준다고 하니 어쩔 수 없네.’

후원자가 알려 주지 못한다면 결국 궁금증이 해소될 때까지 직접 행동해 볼 수밖에 없었다. 워치에 던전 알림 설정을 전국으로 지정한 지수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

일기를 열심히 쓰라는 안식의 신의 당부가 다소 당황스럽긴 했지만, 오늘은 또 어떤 하루를 보내고, 어떤 일기를 쓰게 될지 조금 기대됐다.

지수는 자기가 오늘 하루를 기대하게 됐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늦은 아침까지 기분 좋은 늦잠을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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