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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96화 (96/172)

#096.

일기 3

남자는 어차피 들리지 않을 제 숨소리조차 조심하며 한지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남자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인 순간, 등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일부러 기척을 숨기지 않고 왔는데도 남자는 한지수만 바라볼 뿐,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이어 나타났던 이가 이럴 시간이 없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제자야. 슬슬 눈 떠라. 너무 오래 빠져 있었다.”

“…….”

제자라 불린 남자가 여전히 대답하지 않자, 뒤에 선 사람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시야를 채운 한지수의 모습이 빠르게 흐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이내 발끝부터 재가 된 것처럼 흩날렸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증발했다. 공허의 세계로 돌아온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 백색 무(無)의 공간에 널브러져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제자야. 미련을 버려라. 이젠 정말 눈 떠야 한다.”

“…….”

“혼자 있을 땐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러다 혼돈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너 이러면 평생 승급 못 해.”

“…….”

스승의 말을 들었음에도 남자는 쉽게 눈을 뜨지 못했다. 그 역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듯했으나 여전히 꾹 감긴 눈꺼풀이 잘게 떨릴 뿐이었다.

스승이 고개를 기울이자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제자의 얼굴을 간질였다. 그 자극을 불쾌하게 느낀 제자가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하…….”

“짜식, 정신 차려라. 너무 빠지면 위험하다고 했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익숙한 공간을 둘러본 제자가 다시 머리 위로 시선을 옮겼다. 제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 내려다보는 스승이 보였다. 제자는 오랜만의 ‘감상’을 방해한 스승을 노려봤다.

“어쭈? 눈 똑바로 안 뜨냐?”

“……그저 보는 것뿐인데, 좀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제자야. 결국 꿈에 빠져 허우적대는 거나 마찬가지다. 누누이 말했지. 쉬워 보여도 길을 잃기 쉽다고. 너 그러다 큰일 난다.”

제자는 스승의 잔소리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잠깐 보고 오는 것 정도는 저도 이제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정신과 육신의 결속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전엔 늘 스승이 도와줘서 쉽게 다녀왔을 뿐, 저 혼자였으면 정말 까마득한 혼돈에서 길 잃을 수 있었던 상황이라는 걸 깨닫자 무력함에 대한 짜증이 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 되겠다. 너 이번 일 마치기 전까진 혼자 들여다보지 마라. 이건 명령이다.”

“……!”

제자의 회색 눈동자에 짙게 어린 살기를 느낀 스승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 제자의 저런 살기는 어린아이 투정보다도 못했으니까.

아서라며 손을 내저은 스승이 새카만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묶기 시작했다. 꽤 높이 묶었는데도 기장이 워낙 길어 또 제자의 얼굴에 닿았다.

제자는 얼굴을 간질이는 스승의 머리카락을 노려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서 꽤 오랜 세월 경험을 쌓으며 지구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머리카락조차 건드릴 수 없었다.

‘괴물 같은 새끼…….’

정말 괴물이라고 느끼게 되는 건, 지금 제자가 손댈 수 없는 저 모습조차 진짜 힘을 가진 본체가 아니라, 스승이 직접 제자의 앞에 나타나기 위해 만들어 낸 가짜라는 거였다. 겉보기엔 평범한 인간처럼 보여도 엄밀히 말하자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에 가까웠다. 즉 제 곁에 쭈그리고 앉은 저 남자도 결국 본체에서 추출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환상인 셈이었다.

굳이 가짜를 만들어 제자와 대면하는 이유도 가관이었다. 스승이 본체로 현현했을 때, 실수로 재채기라도 하는 날엔 기운을 견디지 못한 제자가 터져 죽을지도 모른단다.

잘라 버린 손톱을 주워 먹은 쥐가 변한 것처럼, 도사가 머리카락 두세 가닥을 뽑아 분신을 만들어 낸 것처럼 아주 작은 대가로 만든 존재이건만, 그 분신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릴 수 없는 현실이 답답했다.

“제자야. 왜 또 그리 화가 났냐.”

“그냥 이 상황이 짜증 나서 그렇습니다. 짜증 나서.”

“까칠하긴. 조급해하지 마라. 저쪽은 아직 한 달도 안 지났다.”

“후우…….”

일어나 앉아 깊게 한숨 쉰 제자가 “한 달도 안 지났다라…….”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이번 행성에 다녀오면…… 그땐 얼마나 지났을 것 같습니까?”

“흠.”

고개를 기울이고 잠시 다른 곳을 보던 스승이 다시 제자에게 시선을 돌려 씩 웃으며 반문했다.

“르뒤옌 별은 지구보다 5억 년은 더 선배 격인 별이다, 제자야. 지금 네 수준으로도 구제가 힘들 수 있어. 거기서 살아 돌아올 자신은 있고?”

한 2년 전이었다면, 제자는 저 말에 크게 긴장해 침을 꼴깍 삼키며 눈알을 굴렸을 거다. 그래도 저 스승 밑에서 몇 년 굴렀다고 이젠 도발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제자는 평소처럼 여유 있는 얼굴로 돌아와 대답했다.

“예. 걱정 안 합니다. 전 무조건 살아 돌아올 테니까요.”

“왜 그리 확신하냐?”

“그야 이 몸이 죽으면 스승님 손해잖습니까? 아쉬운 분이 살려 주셔야죠.”

“…….”

스승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를 오래 알고 지낸 게 아닌 이상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미미한 변화였다. 그 작은 반응을 확인한 제자는 내심 만족했다. 그래도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진 않았다. 여기서 괜히 스승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간 피곤해질 수 있었다.

다행히 이는 현명한 처사였다. 스승은 평소처럼 약간 투덜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지구 기준으로 대충 두 달 좀 넘을 것 같은데. 길어도 석 달 이상은 안 지날 거다.”

고개를 끄덕인 제자가 스승에게서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인벤토리를 열고 안을 뒤적이던 제자가 정갈하게 포장한 상자 두 개를 꺼내 스승에게 하나 내밀었다.

‘아낀다고 아꼈는데, 생각보다 많이 먹었군.’

정확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대략 3년…… 혹은 3년 반쯤 전, 제 반려가 꽉꽉 채워 주었던 비상식량 키트가 꽤 줄어든 상태였다. 될 수 있으면 다른 행성의 자원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최대한 아꼈는데도 상당히 많이 먹은 편이었다. 그다지 맛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키트 수량을 확인한 제자가 짜증스레 혀를 찼다. 식량이 부족해서 짜증 난 건 아니었다. 그저 제 반려가 챙겨 주었던 키트가 점점 줄어드는 게 싫었다. 그래도 오늘은 그와의 추억으로 위로받고 싶었다.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든 날이 있는데, 오늘이 그날인 모양이다.

스승은 제자가 제게 내민 도시락 키트를 받고 쓰게 웃었다. 그가 익히 아는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알던 로고에서 약간 변형된 형태였지만, 그래도 제 뿌리를 대표하는 상징을 모를 수 없었다.

“이거저거 먹어 봤는데, 평화 길드에서 만든 키트가 제일 맛있더군요.”

“……그래. 고맙다. 이건 나중에 먹도록 하지.”

“그러시죠. 전 일단 지금 먹어야겠습니다. 문은 언제 열어 주실 겁니까?”

“그거 다 먹으면 열어 주마.”

그 말에 제자는 바로 키트를 까 안에 내용물을 먹기 시작했다. 새로운 행성에 방문할 땐 항상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어느 정도 허기는 달래 놓고 가는 게 좋았다. 이전에 구제했던 몇몇 행성을 공략하며 경험이 쌓여 내린 결론이었다.

키트를 순식간에 해치운 제자가 준비됐다는 듯이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 역시 따라 일어나 제자의 앞 허공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공간에 긴 빛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길게 네모 모양으로 선을 그리다가 끝과 끝이 만나 완벽한 직사각형이 되었을 때 문이 생겼다. 다가가 문을 열려던 제자가 멈칫하고 스승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번엔 조언 없습니까?”

“르뒤옌엔 인간형 종족이 없어서 아마 쉽지 않을 거다. 처음부터 공포정치로 가는 게 좋지 않나 싶구나.”

“흠.”

“그리고 제자야. 르뒤옌에 여섯 번째 재앙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 놈이 나타나면 바로 맞닥뜨리지 말고, 두 개의 달이 교차하는 날을 노려라. 그전까진 선민 종족부터 보살피고.”

멱따는 소리만 고래고래 질러 대는 떼쟁이 재앙을 떠올린 제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여섯 번째 재앙은 일곱 개의 대재앙 중에 세 번째로 상대하기 싫은 녀석이었다.

“꽥꽥이 놈이 그쪽으로 갔군요.”

스승은 제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언을 이었다.

“르뒤옌 건만 잘 해결해도 네 승급은 훨씬 쉬워질 거다. 그쪽 관리자가 키우는 교육생들은 아직 재앙을 상대할 수준이 못 돼. 네가 르뒤옌을 구제하면 그도 더는 중립을 고집하지 못하겠지. 그러니…… 재앙을 발견하더라도 바로 처리하진 말거라.”

“…….”

“재앙은 아마 남대륙에 나타날 것 같다. 난 널 행성 반대편으로 보낼 거다. 거기서 일단 선민 종족부터 통제해라. 그럼 관리자가 네게 접촉할 거다. 관리자가 행성을 구제해 달라 부탁하면 그 핑계로 꼭 빚을 달아 둬라. 확실하게. 아직 네 수준으로도 혼자 재앙을 상대하긴 벅차다는 걸 계속 강조해. 재앙을 상대하다 네가 죽을 수도 있다고도 꼭 말하고.”

“그것참…… 살벌하네요.”

그렇게 말한 제자의 얼굴은 막상 여유 있어 보였다. 제자는 스승이 만들어 준 문을 열었다. 문 너머로 홍해(紅海)가 보였다.

“저번 행성은 하얗더니 여긴 또 시뻘겋네. 여튼. 다녀오겠습니다.”

대충 인사한 제자는 스승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았다. 차원을 이어 주는 길이 끊기자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문이 스르르- 사라졌다.

쯧쯧 혀를 찬 스승이 시스템 창을 불렀다. 그간 제자의 힘을 키워 주느라 바빠서 제대로 확인 못 한 다이렉트 메시지나 볼 생각이었는데, 피후견인들이 보낸 메시지가 꽤 쌓인 상태였다.

평소 같으면 무조건 김현아의 메시지부터 확인했겠지만, 오늘은 제자를 보내고 신경이 쓰여서인지 중간에 있는 다른 메시지를 먼저 열었다.

[지구-한지수]

[안식. 아직도 바빠? 내가 전에 보낸 메시지도 다 볼 수 있지? 안식이한테 물어볼 거 엄청 많으니까 보면 바로 답장해 줘.]

저 메시지 이전에 한지수가 보낸 메시지만 8통이 더 있었다. 안식의 신은 메시지를 하나하나 열어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궁금한 것도 많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안식의 신이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지구-김현아]

[야, 안식. L급 이상 던전 나왔다. 그리고 안에서 눈깔 없는 대머리 새끼가 나오려고 하던데, 저 새끼 뭐냐.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답장해라. 너만 바쁜 거 아니다. 나도 바쁘다.]

“큼…….”

안식의 신의 시야에 작은 시스템 창이 하나 팝업됐다. 화면엔 김현아의 모습이 보였는데, 꽤 화려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팔짱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안식의 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김현아의 볼을 쓰다듬었다.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수차례 화면을 어루만진 후에야 다이렉트 메시지 답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엔 언뜻 서글퍼 보이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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