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일기 2
1월 29일 맑음
1. 오늘도 정하진 에스퍼 동생의 병문안을 갔다. 오늘 또 상태 이상 해제 포션 써 보자고 했는데, 이미 써 본 적 있다며 거절했다. 근데 기존 드랍템 중 L급 상태 이상 포션이 드랍된 기록이 있었나? 뭐, 정하진 에스퍼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정하진 에스퍼는 동생에게 종종 책을 읽어 준다고 했다. 동생이 좋아하는 작가가 다행히 지금도 신간을 내고 있다고 한다. 좋겠다. 부럽다. 좋아하는 책의 뒷이야기를 볼 수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대격변 이후 소식이 없다. 부디 좋은 곳에 가셨길. 가끔 끝까지 보지 못한 이야기들의 결말이 궁금하다.
2. 오늘도 동네 빵집을 둘러봤다. 조각 케이크도 여러 개 샀다. 생일 케이크는 필요 없고 그냥 이거저거 먹고 싶었다. 토토가 제일 신났다. 그런데 요즘 토토 버릇이 좀 나빠진 것 같다. 이미 빵을 너무 많이 사서 나중에 오자고 했더니, 날아다니며 빵에 발자국을 찍었다. 그것도 10개나! 어쩔 수 없이 전부 사긴 했지만, 아무래도 훈육이 필요할 것 같다. 토토가 사춘기인가? 흠.
3. 저녁은 빵이랑 케이크로 대신했다. 케이크만 먹다 보니 느끼해서 김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정하진 에스퍼가 충격받았는지 포크를 떨어뜨렸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원래 다들 케이크 먹다가 김치 먹는 거 아니었나? 생각해 보니 나도 형들이랑 활동하기 전까진 그렇게 먹지 않았던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그렇게 먹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단 말이지??? 정하진 에스퍼가 저렇게 놀라는 건 첨 봐서 웃겼다. 가끔 놀라게 하고 싶다. 정하진 에스퍼가 놀랄 만한 일이 또 뭐가 있을까?
1월 30일 맑음
1. 오늘은 내 생일이다. 정하진 에스퍼가 미역국을 끓여 줬다. 불고기도 해 줬다. 잡채도. 아침부터 배 터지게 먹었다. 오늘도 정하진 에스퍼 동생 병문안을 갔다. 오늘은 책을 안 읽어서 그냥 수다나 떨었다. 정하진 에스퍼가 각성 전에 했던 일을 들었다. 근데 정보부 요원으로 일했던 것보다 특수부대에서 복무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다음에 또 물어봐야겠다.
2. 오후엔 현아 누나랑 조슈아 에스퍼가 대전에 놀러 왔다. 저 둘이 친해진 건가? 현아 누나가 생일 선물로 이거저거 퍼 줘서 겨우 정리한 인벤이 또 꽉 찼다. 조슈아 에스퍼는 내가 뭘 좋아할지 몰라 원하는 거로 사 주고 싶다고 했다. 딱히 원하는 건 없는데 자꾸 말해 달라고 해서 그냥 성수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 조슈아 에스퍼가 생수통을 하나하나 붙들고 기도하며 축복했다. 덕분에 냉장고에 2L짜리 성수가 5개나 있다. 대신 식수가 없다. 성수를 마셔도 된다고는 하는데 아깝잖아. 식수 사자는 핑계로 다 같이 장 보러 갔다.
3. 조슈아 에스퍼는 마트를 좋아하는 것 같다. 토토도 마트 좋아하는데, 토토와 조슈아 에스퍼의 공통점을 찾았다. 사실 나도 장 보는 거 좋아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 셋의 공통점이다. 예전에 카트 끄는 건 언제나 재윤이 형 몫이었다. 그리고 카트를 멋대로 채우는 건 나랑 희원이 형이랑 정진이 형이랑 지오 형 몫이었다. 오늘 카트는 정하진 에스퍼가 끌었다. 난 여전히 이거저거 넣는 담당, 토토는 이거저거 물어 오는 담당이었다. 오랜만에 같이 장 봐서 좋았다.
정하진 에스퍼가 맥주를 못 사게 하려고 했는데 현아 누나가 생일인 사람 맘이라며 내 편 들어 줬다. 조슈아 에스퍼에게 맥주도 축복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근데 못 한다고는 안 하더라. 내심 해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조금 더 졸라 볼걸. 정하진 에스퍼가 술 이야기 그만하자고 해서 못 했다. 정하진 에스퍼는 술을 안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딱 한 캔만 마셨다. 조용히 보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시끌벅적하게 보냈다. 그래도 즐거운 하루였다.
1월 31일 눈 조금 내리고 맑아짐
1. 조슈아 에스퍼가 생일 선물을 거하게 줬다. 정말 성수면 충분했는데, 좋은 꿈을 꾸는 축복을 해 줬다. 꿈에서 형을 만났다. 지율이는 왜 안 데려왔냐고 하니까, 지율이는 지금 꿈나라에 있다고 했다. 아쉽다. 지율이도 보고 싶었는데. 형이랑 오랜만에 꿈에서 수다 떨고 놀았다. 형이 생일 축하한다고 했다. 꿈인데 진짜 같아서 엄청 울었다. 깼는데 눈이 금붕어 같앴다.
그래도 조슈아 에스퍼 덕분에 형에게 사과했다. 평생 못 할 줄 알았는데, 꿈이지만 했다. 그날 약속 잡지 말 걸 그랬다고, 형이랑 지율이한테 미안하다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는데 형이 그냥 웃기만 했다. 왜 웃냐고 하니까 잊으라고 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어차피 꿈이니까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건 아는데, 그래도 조금 위로가 됐다. 진짜 사과는 나중에 내가 만나러 가서 해야겠다.
2. 토토가 조슈아 에스퍼한테 까칠했는데, 간밤에 둘이 뭐 했는지 친해졌다. 왜지? 아무래도 토토가 조슈아 에스퍼한테 뭔가 받아 놓고 숨기는 것 같다. 조슈아 에스퍼도 말을 안 한다. 뭘까. 어쨌든 토토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은 건 환영이다.
토토가 원하는 것 같아서 다 같이 놀이공원에 갔다. 토토 핑계가 아니다. 진짜 토토가 원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신기했다. 대격변 이후 다시 그럭저럭 모든 게 돌아가기 시작하고 한국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놀이공원 복구였다. 그런데 한국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나라도 똑같다고 정하진 에스퍼가 알려 줬다. 다들 이런 즐거움이 없으면 미칠 것 같았던 걸까?
3. 난 원래 롤러코스터를 못 탔는데, 오늘은 재미있게 탔다. 그런데 토토는 재미없는지 침울해했다. 현아 누나가 던져 주는 게 더 재미있나 보다. 오늘도 현아 누나가 토토를 던져 주었다. 30초 정도 떨어진 걸 보면 대체 어디까지 올라갔다 온 걸까? 조슈아 에스퍼는 정중하게 사양했는데 누나가 그냥 냅다 던졌다. 토토도 또 던졌다.
누나가 우리도 노려서 정하진 에스퍼 등에 업혀 도망쳤다. 누나가 살살 던진다며 추격하는데 불 뿜는 드래곤 같았다. 장난인 건 알지만 3초 정도는 진심으로 무서웠다. 정하진 에스퍼도 현아 누나는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달리더라. 진짜 눈썹이 휘날렸다. 롤러코스터보다 더 빨랐다. 재미있었다. 추격전은 세종시에서 끝났다. 거짓말 같지만 정말 세종시였다. 현아 누나 폰으로 인증 샷도 찍었다. 조슈아 에스퍼랑 토토를 데리러 갔더니 폐장한 공원 정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둘이 츄러스를 나눠 먹고 있었다. 아주 웃기는 하루였다. 오늘도 자기 전에 맥주 한 캔. 왜 다들 저녁에 맥주를 마시는지 알 것 같다.
2월 1일 흐림
1. 현아 누나랑 조슈아 에스퍼는 바티칸으로 갔다. 확인할 게 있다고 했다. 나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해 준다고 했다. 조슈아 에스퍼가 또 축복해 줬다. 오늘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아침엔 병원에 가서 책을 읽었다. 정하진 에스퍼는 오늘 동생의 몸을 닦아 주었다. 신기했다. 옷을 벗기지 않고 물을 다뤄서 몸을 깨끗하게 해 주는 방식이었는데, 아주 보송보송해졌다. 나도 씻기 귀찮을 때 해 달라고 할까?
2. 여성복을 쇼핑했다. 김지수 신분으로 다닐 때 너무 단벌로 다니는 것 같아서 사긴 했는데 뭘 어떻게 사야 할지 몰라서 아무거나 샀더니 내 옷이랑 크게 차이가 없어서 좀 웃겼다. 어차피 옷을 사긴 해야 했으니 그냥 입으면 되겠지. 정하진 에스퍼가 골라 준 옷은 전부 운동복이라 다시 걸어 뒀는데, 나중에 보니 저걸 기어이 샀더라...
선물이라며 주던데, 정말 선물일까? 등산복이랑 운동복이? 운동은 그렇다 치고, 등산은 진짜 싫은데, 등산 가자고 하면 어떡하지? 환불 못 하게 택도 다 뗐던데, 내 인벤토리에 숨겨 놔야겠다. 토토는 새로 변했을 때 쓸 귀여운 모자를 사 줬다. 서양 귀족 아가씨가 쓸 것 같은 모자인데 토토랑 잘 어울린다.
3. 머리카락이 자꾸 눈을 찔러서 자르고 싶은데 샵 가긴 싫어서 정하진 에스퍼에게 부탁했다. 5살 이후 이런 바가지 머리는 처음 해 보는 것 같다. 요즘은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이런 가발은 안 쓸 텐데. 이 나이에 눈썹 위로 올라오는 일자 앞머리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토토도 엄청 웃었다. 굴러다니며 웃더니 배 아픈지 개구 호흡까지 하더라. 누나랑 조슈아 에스퍼가 이 꼴 안 봐서 다행이다. 정하진 에스퍼가 너무 미안해해서 괜찮다고 하긴 했는데 솔직히 안 괜찮다. 이게 뭐냐고. 샵은 내일 가기로 했다. 씻고 나와서 봐도 심란하다. 근데 좀 웃겼다. 아니 좀 많이 웃겼다. 토토한테 맡겼던 폰을 돌려받았다. 셀카 찍으려고. 오랜만에 토토랑 셀카 찍었다. 다시 봐도 진짜 어이없네ㅋ 맥주 한 캔 마시고 자야지. 술이 있었는데, 없다. 정하진 에스퍼가 마셨나 보다. 설마 버린 건 아니겠지?
“…….”
손님방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선 남자는 말 없이 색색 잠든 한지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손을 뻗으려던 남자가 멈칫하더니 이내 손을 거두고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마음 같아선 한지수의 취향대로 이불을 코까지 덮어 주고 싶었다. 잠자리에 예민한 녀석이니, 혹시나 간지러워서 깨는 일이 없도록 머리카락을 잘 넘겨 정리해 주고 싶었다. 또 습관대로 웅크리고 자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리도 잘 펴 주고 싶었다.
저러다 또 피 안 통한다고 나중에 아파하면 어쩌려고…….
한지수가 작게 입술을 오물거리거나 미간을 찌푸릴 때마다 남자는 손을 움찔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아니, 가능하다면 손을 뻗고 싶었지만, 닿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저 주먹을 꽉 쥘 뿐이었다.
남자의 맑은 회색 눈동자에 제어할 수 없는 그리움이 가득히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