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일기 1
던전에서 실컷 밤을 보내고 나왔을 땐 지구도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정하진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지수는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게 귀가 전, 지수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이었다.
눈을 떴을 땐 손님방 침대에 누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저녁을 꽤 든든하게 먹었는지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몸에선 은은한 보디 워시 향이 났다. 토토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침대 옆 낮은 서랍장 위에 누워 있었다. 토토가 눕기 좋은 크기의 귀여운 침대를 본 지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침대도 꺼내 줬나 보네.’
토토는 손수건만 한 이불을 덮은 채 색색 숨을 내쉬고 있었다. 던전에서 실컷 뛰어놀아서 그런지 깊게 잠든 것 같았다. 반면 지수는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눈을 감은 채 뒤척였다. 포포를 불러 귀가한 이후 영상을 확인해 볼까 하다 이내 생각을 고쳤다.
‘특별한 일이 없으니 방에 누워 있는 거겠지……. 기억 끊기는 구간이 좀 길어지는 것 같은데, 약은 안 먹은 건가?’
정하진이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 리는 없었다. 방에 시계가 따로 없어 시간을 가늠하긴 어렵지만, 자정은 훌쩍 넘긴 것 같았다. 주변이 고요했다.
얌전히 누워 잠을 자려고 노력했지만, 지수의 정신은 오히려 맑아졌다. 한참 그대로 누워 있자니 이젠 갈증까지 느껴졌다. 정신도 육체도 잠을 청하긴 글렀다 판단한 지수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일순 토토가 귀를 쫑긋거렸다. 지수는 혹시나 저 때문에 토토가 깰까 봐 천천히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방을 나섰다. 불 꺼진 거실은 고요했다. 포포는 구석에서 수면 모드로 충전 중이었고, 정하진의 방문은 닫혀 있었다.
냉장고를 연 지수는 생수를 꺼내려다 저 구석에, 다른 음료수 뒤에 있는 캔 맥주를 발견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큰 캔인데, 저거 마시면 잠 오겠지?’
평소 술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라 그런지, 지수의 주량은 형편없는 쪽에 속했다. 지수가 기억하는 술자리는 대부분 러비스 멤버들과 치킨을 먹을 때였다. 독주도 아니고 맥주만 조금 마셔 놓고 혼자 술은 다 마신 사람처럼 졸다가 잠든 적이 서너 번 있었다.
다행히 주사가 있는 편도 아니었다. 지금처럼 잠도 안 오고 갈증이 날 때 큰 맥주 한 캔이면 딱 기분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한 지수는 구석에 있는 맥주를 꺼냈다.
치익- 맥주를 따자 짧게 김이 훅 빠지는 소리와 함께 맥주 특유의 향이 코를 찔렀다. 엄청 오랜만이라 생각하며 한 모금 홀짝이자 식도가 따끔거릴 만큼 강렬한 탄산과 시원함이 퍼졌다.
“크…….”
입술에 묻은 맥주를 핥으며 창가로 걸어간 지수는 커튼을 살짝 열었다. 창밖 야경을 보며 먹을 생각이었는데, 열자마자 보인 거라곤 큰 종합 병원과 어둑어둑한 건물들 뿐이었다.
‘아 맞다…….’
평화 길드 초고층 기숙사가 아니라는 걸 상기한 지수는 소파에 앉아 맥주를 홀짝였다. 꺼진 TV에 제 모습이 은은하게 비쳤다. TV를 켤 생각은 없어 무릎을 세우고 앉아 조용히 술만 기울였다.
맥주는 살짝 얼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시원했다. 목구멍을 긁으며 내려가는 톡톡 쏘는 느낌이 좋았다.
꿀꺽- 꿀꺽- 마신 지수는 저도 모르게 크으으~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정하진은 귀가 밝을 테니, 작은 소음에 깰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도 강재윤처럼 잠을 많이 자지 않는 편일 수도 있었다.
강재윤은 S급 에스퍼로 각성 후, 하루 3시간 정도만 자도 충분하다고 말하곤 했으니까. 어떤 때는 사흘 내내 잠을 자지 않고 던전을 공략한 적도 있다고 했다. 피곤하긴 해도 정신적 한계에 몰리진 않았다는 걸 보면 등급에 따라 수면을 줄여도 크게 영향받지 않는 것 같았다.
‘SS급이면 더 적게 잘지도 모르겠네.’
약에 취해 정하진의 방에 찾아갔던 걸 떠올린 지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적게 자는 사람의 숙면을 방해한 것 같아 더 미안해졌다. 그나마 오늘은 혼자 잠든 상태로 새벽에 깬 게 다행이었다.
큰 맥주 한 캔을 거의 다 비운 지수는 알딸딸해진 정신으로 인벤토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안에서 일기장을 꺼내 펼치자 최근에 쓴 일기가 보였다.
‘뭐야, 일기도 썼어?’
날짜를 보니 1월 28일이었다. 즉, 몇 시간 전, 제 기억이 없는 상태로 쓴 일기라는 의미였다. 지수는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아껴 마시며 일기를 읽었다.
1월 28일 아침에 흐리다 맑음
1. 오늘 정하진 에스퍼 동생을 처음 만났다. 그냥 잠든 것처럼 보였다. 중학생 때 잠들었다고 한다. 이후 성장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유는 모른다고 했다. 아직 앳된 얼굴을 보니 지율이 또래처럼 보였다. 지율이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좀 나긴 했지만 엄청 슬프진 않았다. 오히려 마음 편하게 지율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정하진 에스퍼는 역시 내 팬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생이 내 팬이었다. 세상 참 좁다. 정하진 에스퍼 동생이 빨리 깨어나면 좋겠다.
2. 오늘 정하진 에스퍼랑 토토랑 대전 빵집 투어도 했다. 원래 희원이 형이랑 대전 빵집 투어 하기로 했었는데, 이렇게나마 해서 좋았다. 오늘은 일단 네 곳만 갔는데, 다 맛있어서 놀랐다. 정하진 에스퍼 집 근처에 있는 작은 빵집도 맛있는 빵이 많았다. 당분간 대전에서 지내며 종류별로 다 먹어 볼 예정이다. 역시 빵의 도시다. 이대로 대전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야키소바 빵은 의외로 맛있었다. 내일도 빵 먹자고 해야지.
3. 저녁은 갈비찜이었다. 정하진 에스퍼는 요리를 진짜 잘한다. 빵을 많이 먹어서 솔직히 밥은 못 먹을 것 같았는데, 엄청 맛있게 먹었다. 너무 많이 먹어서 살찔 것 같았는데, 이제 몸매 관리할 필요 없으니 그냥 먹었다. 맛있는 걸 잔뜩 먹어서 그런지 오늘은 기분이 꽤 좋은 하루였다.
그리고 정하진 에스퍼가 내 생일을 알고 있었다. 벌써 모레가 생일이라니... 솔직히 하고 싶은 건 없어서 그냥 빵이나 먹자고 했다. 빵이 맛있는 동네니까 케이크도 맛있겠지? 아님 말고. 그냥 꿈에서 재윤이 형이랑 여행이나 갔으면 좋겠다. 생일날 안식이한테 받은 꿈 수정이나 써야겠다.
“…….”
지수는 일기장 마지막 줄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눈을 내리떴다. 자정이 지나 29일이 되었으니, 바로 내일이 제 생일이었다.
생일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1월 6일 아침에 강재윤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생일 선물로 산토리니 여행을 언급했을 때, 강재윤은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꼭 가자고. 분명 좋을 거라고 말하던 그를 떠올리고 있으니 가슴이 욱신거리면서도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정말 좋을 텐데. 함께 갔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보다 좋을 수는 없었을 텐데…….
지수는 남은 맥주를 전부 다 마셨다. 주량이 늘어난 것도 아닐 텐데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적당히 몽롱해 기분이 좋았다. 그대로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강재윤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눈을 감으면 제대로 보일까?
천천히 눈을 감고 강재윤을 떠올린 지수는 저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침대에 옆으로 누운 강재윤이 보였다. 늘 그런 것처럼 단추는 제멋대로 풀어 헤치고 단정하지 못한 차림이었지만, 지수는 강재윤의 저 느슨한 모습이 좋았다.
마주 보고 누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지수가 강재윤과 둘이 하고 싶은 일을 하나둘 언급할 때마다 그는 무조건 좋다며 웃곤 했다. 아마 지수가 함께 지옥에 떨어지자고 해도 좋은 생각이라며 웃어 줄 사람이었다.
유독 따뜻한 품과 온전히 저만을 담았던 맑은 회색 눈동자가 그리워진 지수는 소파 등받이에 이마를 콩 박고 몸을 웅크렸다. 강재윤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은 것만은 못해도 나름 푹신했다. 딱히 말한 적은 없지만, 매일 밤 강재윤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누워 너른 품에 안기는 게 좋았다.
잠들기 직전 몽롱한 상태로 중얼거리고 있으면, 강재윤은 지수의 말에 무조건 긍정해 주고, 작게 웃어 주곤 했다. 그리곤 큰 손으로 제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등도 보듬어 주다가 꼬옥 안아 주었다.
강재윤이 제 이마에 가볍게 키스해 주는 게 좋았다. 이어 볼과 입술에도 쪽쪽 입 맞춰 주면 그저 행복해서 쿡쿡 웃다 잠들곤 했다.
“…….”
등받이에 이마를 꾹 누른 지수가 눈을 감은 채 반지에 입을 맞췄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지수의 숨소리가 안정된 것을 확인한 정하진이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평소처럼 약에 취해 제 방으로 오려나 했지만, 지수는 거실 소파에서 잠들어 버렸다.
“…….”
거실 테이블에 놓인 빈 캔이 음료수가 아닌 것을 확인한 정하진은 작은 한숨을 뱉었다. 색색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진 지수의 얼굴은 붉게 열이 오른 상태였지만, 평소보단 편해 보였다.
정하진은 지수를 바로 옮기는 대신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 주며 잠든 얼굴을 살폈다.
-하진 씨. 딱 한 캔만 더해요. 네? 많이 안 마셨어요. 딱 한 캔 마셨다구요. 그러니까 하나만 더. 네?
기분 좋은 듯이 잠든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제게 웃으며 조르던 이의 목소리가 귓전에 아른거렸다. 붉게 상기된 지수의 볼을 검지로 톡톡 두드린 정하진은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자 밀려난 음료수 사이로 남은 맥주 한 캔이 보였다. 망설임 없이 맥주를 꺼낸 정하진은 그 자리에서 맥주를 깠다. 그리곤 싱크대에 전부 쏟아붓기 시작했다.
-하진 씨, 진짜 치사하다. 하루 딱 한 캔이면 반주잖아요. 알았어요. 그럼 오늘만 같이 마셔요. 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대는 목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울렸다. 정하진은 제 마음을 어지럽히는 잔상을 애써 무시한 채 조용히 술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