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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93화 (93/172)

#093.

기시감 3

타이밍 좋게 돌아온 토토 덕분에 지수는 내심 안도했다. 조금 전만 해도 대화 주제를 돌리려 고민했는데, 토토가 등장한 덕분에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토토는 혼자 신나게 뛰어놀아 배고팠는지, 제 몫으로 남겨 둔 빵부터 흡입하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고, 천천히 먹으라며 빵을 옆으로 치우려는 정하진의 손과 맹렬한 전투도 벌이기도 했다.

당연히 둘 중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서로 장난스럽게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지수는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 둘을 보고 있으면 이젠 만담 콤비를 보는 것 같았다.

정하진의 손과 열심히 싸워 쟁취한 빵을 전부 먹어 치운 토토가 이번엔 호수로 달려갔다. 바로 입수할 것처럼 맹렬히 달려가더니, 물가에 멈춰서 앞발을 참방참방 닦은 토토가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쮜이! 쮜!”

앞발로 수면을 두드린 토토가 원하는 것이 있는 눈빛으로 정하진을 바라봤다. 정하진은 토토와 눈을 맞춘 상태로 지수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뭐라고 하는 겁니까?”

“어…….”

“쮜이잇!”

이번엔 수면을 다림질하듯 앞발로 쫙쫙 펴며 비비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지수는 정하진처럼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요.”

“예.”

“아마 물 위를 걷고 싶은 것 같아요. 예전에 물 위를 걸었을 때 토토도 엄청 재미있게 놀았거든요.”

정하진 역시 토토가 지수가 아닌 자길 보며 수면을 두드리는 모습을 확인하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거라면, 저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한지수 가이드도 해 보시겠습니까?”

“아, 으음…….”

바로 대답하려던 지수가 돌연 입을 다물고 대답을 망설였다. 저 말을 듣고 나니 또 물 위를 걸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쩐지 조금 꺼려졌다.

정하진을 믿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SS급 물 속성 에스퍼. 저를 물에 빠뜨리는 실수는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망설여지는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별을 머금은 호수를 걷고 춤을 췄던 기억은 온전히 강재윤과 둘만의 추억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분명 흥미가 동하는 듯 보였던 지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선을 피하자, 정하진이 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빠뜨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지수는 그게 걱정되는 게 아니라고 말도 못 하고 애매하게 웃었다. 지수를 잠시간 살핀 정하진은 왜 그러냐고 묻는 대신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예전과 똑같진 않겠지만, 그래도 분명 재미있을 겁니다.

“예전과 똑같진 않겠지만, 분명 재미있을 겁니다. 저를 믿어 주시죠.”

“…….”

또 훅 뇌리를 스친 기시감에 지수는 그가 제 고민을 정확히 간파한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완벽하게 똑같은 말은 아니었지만, 장소나 저 말을 건네던 정하진의 다정한 목소리 등이 거의 비슷하게 맞물렸다.

‘또 데자뷔가…… 오늘 진짜 이상한 날이네.’

기시감이라는 건 원래 간혹 느끼는 게 아니었나? 하루에 몇 번이나 연달아 몰아친 적이 있었나? 확신할 순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언젠가…… 언젠가 저 남자의 손을 잡고 귀여운 소파에서 일어나 물 위를 걸었던 것 같았다. 강재윤과 함께였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제 기억엔 없지만, 기시감으로 잠깐 느꼈던 그날의 지수는 강재윤과 저만의 온전한 추억이 방해받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정하진에게 미안하다고 느꼈던 것 같았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종일 선명한 기시감이 반복되다 보니, 뇌가 이를 현실과 착각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인간의 뇌는 생각보다 망각을 잘한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정하진이 제 손을 잡고 일으킨 바람에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떨결에 붙들려 일어난 지수는 정하진과 손을 맞잡은 채 호숫가로 걸어갔다. 걷는 내내 그가 제 손을 이리 자연스럽게 잡는 게 이상하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그저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기억의 잔상에 머릿속이 혼란했다.

정하진은 물이 찰랑거리는 호숫가에 도착해서야 손을 놓았다. 그리곤 이제 어서 수면을 밟아 보라는 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정하진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수는 저도 모르게 강재윤이 서 있던 위치와 그를 두고 비교하다 정신 차리고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정하진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하지만 다정한 눈빛이었다.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혼란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일순 혼탁했던 정신도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차분한 생각이 이어졌다.

‘같을 리가 없는데…….’

만약 여기가 똑같은 호수였어도, 그때처럼 물 위를 걷는다고 하더라도, 강재윤과 나눈 추억을 침범하거나 덮어씌울 수 없다는 건 자기가 가장 잘 알 터였다.

머리로는 알면서 잠시나마 망설인 이유가 참 부질없고 바보 같다고 느낀 지수가 자조하며 웃었다. 그리곤 곧 애써 기대감 가득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정하진을 향해 말했다.

“정말 빠뜨리면 안 돼요.”

“믿어 주시죠.”

자신이 가장 믿었던 이 앞에서 물을 밟았던 날처럼, 천천히 호수 위로 왼발을 먼저 내디뎠다. 발이 호수면에 닿는 순간. 발밑을 단단히 받쳐 주었던 다른 이가 떠오르려던 찰나. 작은 소음이 들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 숙인 지수는 제 발바닥 아래 생긴 얼음 결정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발바닥 아래 수면에 생긴 얇은 얼음 결정이 뻗어 나가며 크기를 키우더니 축구공 정도 면적을 유지하며 지수의 발을 받치고 있었다.

정하진을 돌아보자 그는 똑같은 자리에 서서 더 가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발도 호수 위로 올리자 마찬가지로 결정 맺히는 소리가 들렸다. 쩌적- 쩌저적- 쨍- 둔탁한 것 같으면서도 맑은 소리가 유독 시원하게 들렸다.

딱 제 두 발만 받칠 정도로 얕게 얼어붙은 수면을 바라보던 지수는 천천히 호수를 걸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각기 다른 모양의 얼음 결정이 예쁘게 맺히며 발밑을 든든히 받쳤다.

그대로 열 걸음 정도 걸은 지수는 이 얼음 결정이 그저 보여 주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걸 눈치채고 쓰게 웃었다. 상식적으로 이렇게 작은 부표를 밟고 서면 출렁거려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발밑에 얼음 결정은 흔들림 없이 발을 받쳐 주고 있었다.

강재윤이 그랬던 것처럼 정하진 역시 호수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물을 지배하는 그가 이런 얼음 결정을 만들어 보여 줄 필요는 없을 텐데……. 그런데도 그는 굳이 강재윤과 다른 방식을 보여 주려 한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수는 신중한 남자의 배려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정하진 에스퍼는 안 올라오세요?”

“전 괜찮습니다.”

조금 전 얼핏 느꼈던 잔상에선 분명 그와 함께 호수를 걸었던 것 같았는데, 저리 거절하는 걸 보니 역시 기시감일 뿐이었나보다. 괜한 데 신경 썼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안도감이 밀려와 홀가분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럼 토토도 올라와도 되나요?”

“예. 가라, 토토.”

“쮜이잇~!”

와다닥 물 위를 달리는 토토의 발 크기에 맞춰 안개꽃처럼 작은 결정이 맺히는 걸 발견한 지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리 웃음이 나나 했는데, 지금 이 상황이 즐거워서 그런 것 같았다.

즐거움이라니…….

최근 들어 제대로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정확히는 슬픔에 빠져 즐거운 상황을 외면하려 노력했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천천히 하자. 하나씩 하나씩.’

지수는 악마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무의식중에 레미니센스를 떠올릴 정도로 그리운 이가 많았다. 형들과 동생, 그리고 강재윤의 부재를 느낄 때마다 가슴은 여전히 아팠다.

그런데 최근 며칠간은 조금 이상했다. 제 마음이 점점 슬픔에 무뎌지려는 것 같았다. 아직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벌써 기분이 좋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평온함을 느끼기도 하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오락가락해서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지수는 이 순간 느껴지는 즐거움을 굳이 거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강재윤이라면, 그가 홀로 남은 한지수에게 바라는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 고민할 것도 없었으니까.

[종국엔 마침내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합니다]

절대 저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또 약속했으면서, 만에 하나……, 혹시라도 혼자 남겨질 자신을 위해 그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당장은 힘들어도, 천천히 하면 돼. 형은 내가 느린 걸 아는 사람이니까. 노력하고 계속 노력해도 정 안 되면……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된다면…… 그땐 형도 이해해 주겠지.’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당장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다고 해서 초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예 홀가분해진 건 아니더라도 말이다.

“쮜! 쮜이이!”

토토가 지수의 발치에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가만히 하고픈 대로 하게 내버려 두니 따라오라는 듯이 먼저 호수 중앙을 향해 우다다 달려갔다. 정하진을 돌아본 지수가 괜찮겠냐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정하진은 고개를 끄덕일 뿐, 기시감으로 언뜻 보였던 것처럼 호수로 올라오지 않았다.

‘역시 데자뷔였나 봐.’

겪은 적 없는 희미한 장면 따위는 기억에서 지운 지수가 토토와 함께 물 위를 달렸다. 정하진이 만들어 준 얼음 미끄럼틀을 타고, 갑자기 훅 치솟은 얼음 언덕에서 토토와 데굴데굴 구르며 크게 웃었다.

정하진이 말한 그대로였다. 예전과 전혀 똑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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