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기시감 2
“아, 네에. 좋아요.”
그가 먼저 뭐라도 말하겠다니, 환영이었다. 신발을 벗고 다리를 올린 지수는 끌어안은 무릎에 볼을 대고 그를 바라봤다. 정하진은 호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알고 지냈던 사람은 A라고 칭하죠. A는 좋은 친구였습니다. 천성이 상냥하고, 동물과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A는 대격변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많이 잃었습니다. 누구나 그랬지만, A는 특히나 많은 사람을 잃었습니다.”
“…….”
“슬픔을 견디지 못한 A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자 소멸이 얼마 남지 않은 던전에 몰래 들어갔습니다. 던전과 함께 소멸할 생각이었죠.”
“…….”
이야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지수는 저도 모르게 그 A라는 사람이 안타까워져 입을 꾹 다물고 경청했다.
“그런데 A는 그날 소멸 직전인 던전에서 레미니센스를 마주쳤습니다.”
“아…….”
정하진 에스퍼……. 무섭다. 진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구나.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본 지수는 던전 중앙에 둥둥 떠 있는 반투명한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던전 초기화까지 남은 시간: 18:21 / 던전 입장 인원: 2명』
오늘은 아주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 * *
이야기가 꽤 길어질 것 같았기에 지수는 자세를 편히 하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 속 A라는 사람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들어간 던전에서 레미니센스를 마주쳤다. A의 기억을 투영한 레미니센스는 A를 바로 공격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곤 고유 특성대로 상대를 현혹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했다. A가 가장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의 모습과 목소리로.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들은 A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괴로워했던 이유가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원인을 알게 된 그는 레미니센스를 반려 몬스터로 만들기 위해 테이밍 스킬을 몇 번이고 사용했다.
테이밍에 성공해 반려 몬스터가 된다면, 레미니센스가 주인을 공격하지 않을 테니까. A는 마나가 고갈되어 의식을 잃을 때까지 테이밍 스킬을 몇 번이고 시도했다. 그러나 A가 온갖 노력을 퍼부었음에도 레미니센스는 끝내 테이밍 되지 않았다.
거듭된 실패에 A는 좌절했다. 마나 고갈로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 A는 레미니센스가 자신을 죽이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레미니센스는 A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의식 잃은 A에게 무릎베개까지 해 주고, A가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켰다.
A는 자신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처음 보게 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고 오열했다. 어째서 날 죽이지 않은 거냐고 물으며 레미니센스를 향해 원망의 말을 쏟아 냈다. 레미니센스는 A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A가 가장 좋아했던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안아 주었다.
A 역시 레미니센스를 끌어안은 순간, 레미니센스가 무기화한 팔로 그의 복부를 쑤셨다.
“…….”
얌전히 이야기 듣던 지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명치 부근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A는 어떻게 됐어요?”
“다행히 A와 같은 공략팀이었던 친구가 신고한 덕분에 진입한 각성자들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아…….”
“A는 구조대에게 발견되기 직전, 크게 다친 와중에 레미니센스에게 자신을 바로 죽이지 않은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째서 기절한 자길 깨어날 때까지 돌보고 기다렸는지 말이죠. 레미니센스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레미니센스가 악마종이라는 특성만 보더라도 이유는 명확히 나옵니다.”
그 말에 지수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가지고 놀다 죽이려고 그런 걸까? 하는 생각이 스칠 무렵, 정하진이 제 의견을 말했다.
“악마종은 지능이 높을수록 사람을 감정적으로 가지고 놀려고 합니다. 아마 그 레미니센스는 A의 그리움과 슬픔이 극에 다다랐을 때를 노렸을 겁니다. 일부러 그를 따뜻하게 돌보는 수고까지 해 가며 말이죠.”
“그거참…… 악마답네요.”
“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지, 저 사건 이후로 소멸 직전 던전을 지키는 인원을 필수 배치하도록 던전 특별법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였군요.”
공략을 완료한 후 던전이 소멸할 때까지 담당 길드가 각성자 협회와 함께 게이트를 지키는 특별법이 생긴 건 아마도 1년 반 전이었다. 해당 법은 애초 목적부터 던전이 소멸하기 직전에 몰래 입장해 그대로 세상에서 사라지려는 이들을 막는 것이었는데, 저런 비화가 있었다니 제정 이유가 이해되었다.
“A는 잘 지내고 있나요?”
“예. 반년 넘게 병원에 입원해 정신계 치료를 받았습니다. 퇴원 후엔 소속 길드 연구실에서 내근직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후로 만난 적은 없지만, 종종 소식은 듣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음 맞는 좋은 페어도 만났다고 하더군요. 잘된 일이죠.”
“…….”
정하진은 A가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지수의 표정은 미묘하게 불편해 보였다. 지수의 얼굴을 기민하게 살핀 정하진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음, 아뇨……. 그냥…….”
솔직히 말하자면 지수는 이 이야기에서 얻은 교훈은 레미니센스가 절대 길들일 수 없는 악마라는 것 정도였다. 물론 지수가 레미니센스에 대해 이런 고정 관념을 가지게 된 것만 해도 정하진의 시도는 절반은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A였다. 지수는 A가 과연 지금 치료 후에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하진은 A가 치료 후 복직해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 같았다. 흔히 말하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A의 구조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듯이 말이다.
‘A는 정말 잘 살고 있는 걸까?’
지수는 A가 안타까웠다. 물론 자신은 A가 아니기에 그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견디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그가 정하진의 말대로 지금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다면 당연히 축하할 일이었다.
하지만 A의 속은 그게 아니라면? 주변인의 만류로 인해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하며 억지로 타인에 의해 괴로운 삶을 강제적으로 연명하고 있다면? 저들이야 죽으려는 사람 살려 뒀으니 그거로 만족하겠지만, A의 고통은? 당신들의 만족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 평생 괴로워하며 살아야 하나?
‘A가 지금 삶에 만족하고 있는 거면 좋겠다…….’
지수는 그가 무조건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최소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며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는 기회를 타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박탈당한 채 억지로 견디는 중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지수는 저 이야기에서 A의 생각이 궁금했다. 하지만 이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이런 말을 했을 때 정하진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였다. 만약 이런 속내를 털어놓는다면 그는 한지수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해 뇌 치료 외에 정신과 치료까지 추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제 생각을 감춘 채 정하진이 원할 만한 대답을 추렸다.
“레미니센스가 왜 악마종인지 알았다고 해야 하나, 뭐…… 그러네요…….”
“…….”
“솔직히 레미니센스를 반려몬으로 삼을 생각까진 하지 않았거든요. 애초에 인간형 몬스터는 테이밍 성공한 사례가 없으니까.”
“예.”
“그래도 솔직히 말하자면, 정하진 에스퍼가 내 옆에 있으면 레미니센스도 섣불리 공격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래서 한번 마주치고 싶긴 했어요.”
“…….”
“근데, 음…… 역시 안 보는 게 낫겠네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헛소리하거나 이상한 짓거리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건 또 싫어요.”
이 정도면 되겠지. 이 정도로 속내를 드러낸 척하면 충분하겠지. 그리 생각하며 애써 담담하게 미소 지으려 노력했다. 정하진은 지수의 대답을 들으며 잠시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때론 모르는 게 나은 것도 있는 법이니까요.”
지수도 저 말은 동의했다. 세상엔 모르는 게 약인 경우도 많았다.
“맞아요. 그냥 모르고 살게요. 그러니까 정하진 에스퍼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하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그의 시선이 제게 꽂힌 걸 알면서도 정면의 호수만 바라봤다. 잔잔한 수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야 하는데, 지금은 복잡하기만 했다.
이 심란한 마음이 빨리 정리되길 바란 순간, 정하진이 고개를 돌려 제 뒤를 바라봤다. 반사적으로 함께 고개 돌린 지수는 정하진의 뒤로 뭉게뭉게 피어나는 먼지구름을 발견했다.
‘뭐야?’
당황해 눈을 크게 뜬 지수는 저 먼지구름을 일으킨 존재가 토토라는 것을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핫, 토토야!”
“쮜이이잇~!”
대체 뭐가 그리 급한지, 저 멀리서부터 우다다다 뛰어오는 모습이 흡사 작은 멧돼지처럼 보였다. 멧돼지라고 하기엔 너무 콩알만 했지만 기세는 절대 뒤지지 않았다. 야무지게 달려온 토토가 정하진의 옆에 끼이익-! 멈췄다. 그리곤 뭐가 그리 불만인지 도착하자마자 정하진을 올려다보며 노성을 토했다.
“쮯! 쮜잇! 쮜에엑!”
“……오해다.”
“쮀에에엑!”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오해라니까.”
“……정하진 에스퍼, 진짜 토토 말 알아들어요?”
대체 무슨 대화를 저리 자연스럽게 나눈단 말인가. 어이없어 저도 모르게 추궁하듯 묻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뭐가 오해라는 건데요?”
황당하다는 듯한 질문을 들은 정하진은 당황하는 대신 토토를 가리키며 말했다.
“토토를 보시죠. 전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추궁하는 모양새잖습니까.”
“…….”
“뭔지 몰라도 오해일 게 분명하니, 오해라고 말해 주었을 뿐입니다.”
“아, 네…….”
역시 이 사람도 좀 특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