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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91화 (91/172)

#091.

기시감 1

레미니센스를 언급한 이후론 두 사람 모두 별다른 말 없이 느긋하게 걸었다.

던전 게이트에서 호수까진 약 10분 정도가 걸렸다. 지수는 아름답게 넘실거리는 별빛에 시선을 고정했다. 일순 바다로 착각할 정도로 넓은 호수를 보고 있자니, 불가항력으로 꿈에서 봤던 호수가 떠올랐다. 오래전, 강재윤과 둘이 수면을 밟으며 춤을 췄던 넓은 호수가.

지수가 앉을 만한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정하진이 제 인벤토리에서 1인용 소파를 꺼냈다. 보통 던전에서 사용하는 보급용 의자가 아닌, 쿠션까지 있는 제대로 된 하늘색 소파였다. 어떻게 포장해도 정하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디자인을 본 지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하진은 이런 반응이 왜 나왔는지 안다는 듯 굳이 해명하듯 말했다.

“하영이가 줬습니다. 하율이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 하율이 취향 가구 정도는 들고 다니라고 하더군요.”

“네……. 준비를 철저히 해서 나쁠 건 없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하진은 제 소파도 꺼내 지수의 소파 바로 옆에 내려 두었다. 두 번째로 꺼낸 소파는 연분홍색이었다.

‘동생분이 파스텔 톤을 정말 좋아하나 봐…….’

정하진의 가구 배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높이가 적당한 테이블도 꺼내 지수의 앞에 세팅하고 빵 봉투를 올려 두었다. 이어 평소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접시와 포크, 심지어 빈티지 랜턴까지 끄집어내는 그를 보며 지수는 입을 틀어막았다.

“흡……!”

지수가 숨을 참든 말든, 정하진은 상차림에 집중했다. 접시와 포크와 나이프를 나열해 둔 각도마저 완벽했다. 기본 세팅을 마친 정하진이 신중한 동작으로 빵을 꺼내 접시에 올려 두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더 지켜볼 자신이 없었던 지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 제발…….’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세간에 신비주의로 알려진 SS급 에스퍼 정하진이 던전 안에서 파스텔 톤 귀여운 소파와 테이블을 꺼내고, 빵을 차리는 모습이라니…….

심혈을 기울여 세팅한 덕분인지, 접시 위에 올려진 빵은 무슨 고급 요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입술을 말아 물고 끙끙대며 웃음을 참던 지수는 그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드시죠.”라고 정중히 권한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정하진 에스퍼, 이런 캐릭터였냐고…….’

기분 탓인지 몰라도, 세팅을 마치고 빵을 권하는 그의 얼굴엔 약간의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지수는 접시에 빵이 존재했던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평균 남자와 비교했을 때 지수는 입이 짧은 편이었다. 그런 지수가 앉은 자리에서 빵을 세 개나 먹다니, 형과 동생, 그리고 러비스 멤버 형들이 봤다면 놀랐을 게 분명했다.

‘……의외로 국수 빵도 맛있었어.’

지수가 고른 튀긴 소보로와 소금빵도 맛있었지만, 정하진이 권했던 ‘볶은 국수’가 들어간 야키소바 빵도 맛있었다. 빵 사이에 끼워 넣은 국수라니……. 지수 입장에선 괴식이었지만, 정하진은 본인이 좋아하는 빵이라며 세 개나 담았다.

평소 지수였다면 절대 도전하지 않았을 텐데, 한국에서 파는 곳이 별로 없는 데다 맛있으니 한번 도전해 보라던 정하진의 말에 속는 셈 치고 하나 담았다가 후회해 버렸다.

‘두 개 담을걸…….’

다행히 아쉬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집에 가기 전에 다시 방문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나중 일을 계획하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최근엔 의욕적으로 계획을 짜면서 움직이는 편이 아니었는데, 하고 싶은 일이 생기고 나니 정하진과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토도 먹어 보라고 하나 사 줘야겠다.’

아까 가게에서 야키소바 빵 비주얼을 보고 오만상 쓰던 토토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찌나 질색하던지, 그 작은 얼굴이 쭈굴쭈굴 찌그러지는 것을 떠올린 것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힘차게 달려 나간 토토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신나게 달리고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며 노는 중일 게 뻔했다.

던전 등급이 낮은 덕에 지수는 별다른 걱정 없이 호수를 감상했다. 흔히 말하는 ‘물멍’을 하며 소파에 파묻혀 있으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지난밤 꿈에서 본 것처럼 넓은 호수는 하늘과 물의 경계가 불분명해서 거대한 우주처럼 보였다.

호수와 하늘의 불분명한 경계를 그나마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건 넘실거리는 달빛뿐이었다. 꽤 긴 시간 초점 없는 눈빛으로 물만 바라보는 지수를 흘긋거린 정하진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네. 그냥 옛날 생각이요.”

짧게 대답한 지수는 일순 그가 혹시나 레미니센스 이야기는 왜 했냐고 물을까 싶어 구구절절 말을 이었다.

“음, 그…… 예전에 던전 공략할 때 이런 호수를 본 적이 있거든요. 그때도 이렇게 별이 떠 있었어요. 하늘에도 별. 호수에도 별. 얼마나 예쁘게 반짝이는지, 우주 같다고 생각했어요. 우주에 간 적은 없지만.”

정하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자 지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구에서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어서 홀린 듯이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에 비친 하늘이 너무 예쁘고 반짝거리니까 저 빛에 닿고 싶다고.”

“…….”

“그날 전 토토랑 물 위를 걸었어요. 물에 비친 달빛을 밟고 서서 춤도 췄어요. 음악도 없고, 배운 적도 없는 춤이라 완전 엉망이었죠. 그래도 즐거웠어요.”

취한 것도 아닌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매끄럽지 않은 데다가 두서없었다. 듣는 이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건너뛰어 하고 싶은 말만 내뱉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정하진은 지수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즐거웠을 것 같습니다.”

“네. 진짜 즐거웠어요. 그립네요. 엄청……. 엄청 많이.”

“…….”

아련한 미소를 지어 보인 지수가 말을 멈추자 정하진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지수에게서 시선을 떼고 호수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지수 가이드.”

“네.”

“레미니센스는 왜 물어보신 겁니까?”

아, 역시 그냥 넘어가지 않는구나. 일부러 아련하게 말했는데…….

낭패감을 느낀 지수가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 말해야 할까. 그냥 순간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그냥…….”

“예.”

“그냥 궁금했어요…….”

“그 많은 악마종 중에, 이유 없이 레미니센스만 궁금하셨군요.”

“큼. 그냥 넘어가면 안 돼요?”

“예. 다른 종이라면 몰라도 레미니센스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으, 저 빵 먹은 거 체할 것 같은데요…….”

“체하면 소화제 드리겠습니다. 손도 주물러 드리고 옆구리도 두드려 드리죠.”

지수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냐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흘겨봐도 소용없었다. 정하진은 지수의 부리부리한 눈빛을 담담하게 받았다. 거기에 네 눈빛 공격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피력하듯 소파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대며 말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 주시죠. 우리 사이에.”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뾰족하게 물으려던 지수는 정하진이 갑자기 자기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듯 만지기 시작하자 당황해 굳어 버렸다. 입을 벌리긴 했지만, 입술 사이로 나오는 말은 없었다. 저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도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

그러고 보니 요즘 가이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 설마 지금도 그러는 걸까 싶어 조심스럽게 물어보려는 찰나. 그가 갑자기 다리를 꼬고 제 허벅지를 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제발…….”

“…….”

“……정하진 에스퍼. 지금 장난하는 거죠?”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차라리 말을 해요!”

“예. 장난입니다.”

“아, 진짜아…….”

순간 울컥했지만, 그래도 저가 파렴치한 가이딩을 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크게 안도한 지수가 눈치 보며 물었다.

“하아……. 지금 가이딩은 괜찮아요?”

“예. 과하게 기분 좋습니다. 상쾌한 기분이군요.”

“……상쾌해요?”

“예. 마치 겨울 숲에 혼자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그냥 춥다는 소리 아닌가? 싶었지만, 굳이 딴지 걸고 싶지 않았던 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적절하게 답했다.

“어, 네. 솔직히 무슨 느낌인지 잘 모르겠지만, 상쾌하면 좋은 거니까 다행이네요…….”

“예. 그러니 이제 말씀해 주시죠.”

“…….”

정말 그냥 넘어갈 생각이 요만큼도 없구나. 결국 포기한 지수가 작게 한숨을 쉬며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애초에 정말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말이었다. 이 던전에 레미니센스가 있다는 걸 알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이 구역에 악마종이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정말 모르겠어요. 그냥 문득 생각났어요.”

“이유 없이 말입니까?”

“네……. 악마종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냥…… 그냥 바로 떠올랐어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그는 지수의 시선이 닿은 호수로 고개를 돌렸다. 이후 두 사람은 또 잠시간 대화 없이 앉아 있었다.

‘괜히 눈치 보여.’

평소 같으면 정하진과 이렇게 말없이 보내는 시간이 편했을 텐데, 지금은 유독 불편하고 눈치가 보였다. 그에게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리 신경 쓰이는 걸까? 대상 없는 불만에 입술이 삐죽 나왔다.

여기가 집이었다면 쉬겠다는 핑계로 방에 처박혀 잠이라도 잤을 텐데, 지금은 나란히 딱 붙여 둔 소파에 앉아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상태였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에 남겨 둔 빵이라도 먹을까 싶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정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아니. 예전에 알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드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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