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이해 불가 영역 6
홀로 가슴 깊이 품고 있었던 추억을 주섬주섬 꺼내고 나니 시간이 꽤 흘렀다.
말을 멈춘 지수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자 아침과 전혀 다른 하늘이 보였다. 흐리고 우중충했던 잿빛 하늘이 아닌, 눈부시도록 맑고 푸른 하늘이.
잠시간 하늘을 올려다보던 지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오랜만에 너무 떠들어서 그런지 배고프네요…….”
그렇게 말하는 지수의 얼굴은 기분 탓인지 몰라도 조금 홀가분해 보였다. 정하진은 평소보다 생기 있어 보이는 지수가 기꺼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일어났다.
“슬슬 힐러가 올 시간이니 식사하러 갑시다.”
“좋아요. 그 유명한 빵집 가요. 원래 희원이 형이랑 같이 빵집 털기로 했었는데, 오늘 정하진 에스퍼랑 해야겠어요.”
“좋은 각오군요. 토토도 빵집 털 준비됐나?”
“쮜잇!”
힘차게 대답한 토토가 폴짝 점프하더니 알아서 지수의 코트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지수는 아주 오래전 러비스 멤버들과 함께 계획했던 일을, 하지만 이루지 못했던 일 중 하나를 오늘 정하진과 이룰 계획이었다.
그 첫 번째는 대전의 유명한 빵집 투어였다.
* * *
“……각성자 같지?”
“그러게. 에스퍼인가 봐. 진짜 크다.”
“헉, 야야, 어깨에 저 새 봐……! 반려몬인가 봐. 진짜 귀여워.”
“으아아~! 진짜 귀엽다. 오목눈이 같지? 사진 찍어도 되나?”
정하진과 지수가 쟁반에 빵을 가득 담은 채 계산대 줄을 서 있는 동안 여기저기서 귀엽다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들은 저들 나름대로 작게 속삭였지만, 지수의 귀에도 들릴 정도니 정하진이나 토토는 더 선명하게 듣고 있을 터였다.
어린 학생들의 소곤거림에 오목눈이 새로 변신한 토토의 꽁지가 점점 올라갔다.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쑥 내밀고 부리도 치켜세운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여기저기서 숨죽인 탄성이 쏟아졌다.
“아 미친, 진짜 찍고 싶다, 개귀여워…….”
“찍어도 되냐고 물어볼까?”
하지만 토토가 아무리 귀여워도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정하진이 제 기운을 최대한 갈무리했어도, 최상급 에스퍼 특유의 압박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던 탓이었다. 심지어 계산하는 줄이 길다고 유명한 가게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뒤로 줄을 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야, 네가 물어봐 주라…….”
“……못 물어보겠어.”
“으응…….”
‘물어보면 찍어도 된다고 해 줄 텐데……. 정하진 에스퍼 기운 때문에 그런가 보네.’
이런 경우는 또 오랜만이라 새삼스러웠다. 지수가 혼자 돌아다니거나 강재윤과 둘이 다닐 때면 늘 사람이 몰렸고, 바글바글한 인파 중에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직접 허락을 구하는 이들이 오히려 적은 편이었다.
러비스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대부분은 강재윤이나 한지수를 발견하면 카메라나 폰부터 들이대고 봤으니까. 당시엔 허락을 구하는 이들보다 그냥 찍고 보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렌즈에 시달리지 않는 상황은 편하지만, 어린 학생들이 계속 아쉬워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조금 신경 쓰였다.
아쉬운 건 토토도 마찬가지였는지, 지수를 향해 고개 들고 “삐-!” 하고 작게 울더니, 날갯짓을 한 번 했다. 의도를 정확히 알아챈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작은 날개를 기민하게 움직여 날아오른 토토가 학생이 든 쟁반 손잡이 위에 살포시 앉았다.
“헉!”
“우왓……!”
오동통하고 동그란 새의 돌발 행동에 여기저기서 헉 소리가 났다. 토토는 이목이 제게 몰린 게 퍽 즐거운지 고개까지 갸웃하며 “삐이?” 하고 울었다.
“아, 미친, 미친, 으아아……!”
“귀, 귀여워! 저, 저기…… 사진 찍어도 돼요!?”
적극적인 토토 덕분에 용기를 얻은 학생이 지수에게 물었다. 지수가 미소 지은 채 흔쾌히 고개를 주억거리자 학생들뿐만 아니라 주변 다른 손님들도 토토를 찍기 시작했다. 쟁반 끝에 선 토토는 우쭐함을 감출 수 없는지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며 오랜만에 쏟아지는 관심을 온몸으로 즐겼다.
빵집을 나선 후에도 토토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하진의 차로 이동하는 내내 작은 부리로 삐로로~ 피로로롱~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고개며 엉덩이를 연신 씰룩거렸다. 토토가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지수의 입가에도 어느새 미소가 번져 있었다.
토토의 즐거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빵 먹기 딱 좋은 장소가 있다는 소리에는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던 지수도 이번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하진이 데려온 곳은 공략이 완전히 끝나 소멸까지 19시간 남은 C급 던전이었던 탓이다.
입장할 때도 성하진 신분의 출입증과 김지수 신분의 출입증을 확인한 후엔 별다른 제재가 없었다. 지수는 정하진이 던전 입장까지 미리 사전에 준비해 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간단한 절차를 마친 후 게이트를 들어선 순간, 1월의 칼바람과 확연히 다른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을 반겼다.
“와…….
한낮인 밖과 달리 던전 안은 밤이었다. 던전이 늘 그렇듯 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지구에선 보기 힘든 은하수가 몇 개나 겹겹이 포개져 하늘에 길을 만들고 있었다.
“삐이!”
붉은색의 거대한 보름달을 발견한 토토는 부리를 다물지 못했다. 별을 좋아하는 지수와 달리 토토는 달을 더 좋아했다. 특히 저리 큰 보름달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하곤 했다.
“C급 던전이니 위험한 몬스터는 없겠죠?”
“예. 3차까지 토벌이 끝났고 보스 몬스터 공략 후 다른 몬스터 리스폰은 없는 거로 확인됐습니다.”
“음, 더 입장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까 확인했을 땐 없었습니다.”
보통 이 정도로 시간이 적게 남은 던전은 급한 채집이 아니고서야 입장할 일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이 던전은 이미 필요한 식생은 거의 다 채집한 듯이 보였다. 변신 스킬을 해제한 지수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토토 역시 오목눈이 새에서 햄스터로 돌아왔다.
“그럼, 토토야. 실컷 뛰어놀아.”
“쮜이잇!”
힘차게 대답한 토토가 지수의 어깨에서 뛰어내리더니 우다다다 던전을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힘껏 박차고 달렸는지, 토토가 뛰어간 방향을 따라 움푹 팬 작은 발바닥 자국이 생겨날 정도였다.
“토토가 신났군요.”
“네. 토토가 넓은 곳에서 우다다 뛰는 걸 좋아해요.”
민간인들이 있는 장소에선 이렇게 토토가 마음껏 달리게 둘 수 없어서 던전이나 평화 길드 트레이닝 룸에서 풀어 주곤 했는데, 저리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흐뭇함보단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최근엔 던전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외출조차 할 수 없었으니 더 답답했겠지.’
그런데도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집사의 곁을 지킨 토토였다. 자신보다 토토를 위해서라도 종종 외출해야겠다고 결심한 지수가 주변을 살폈다. 던전 입구 근처는 이미 채집 팀에서 몇 차례 쓸고 갔는지 황폐한 상태였다.
대부분 뿌리째 뽑혔거나 베어 가서 무릎 높이 위로 올라오는 나무가 없었다. 이끼밭도 있었는지 땅을 아예 갈아엎은 곳도 많았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저 멀리 반짝이는 윤슬이 잘 보였다.
“저긴 바다…… 아니, 호수인가요?”
“예. 호수입니다. 빵은 저 근처에서 먹죠.”
“좋아요.”
지수가 먼저 걷기 시작하자 마찬가지로 변신 스킬을 해제한 정하진이 자연스레 나란히 섰다. 이후 두 사람은 산책하듯 느긋하게 걸었다. 지수는 걷는 동안 주변도 구경하고, 반지의 스킬도 사용해 봤다.
[지정 타겟 ‘재윤이 형’에게 이동을 시도합니다.]
[지정 타겟 ‘정하진 에스퍼’에게 이동을 시도합니다.]
상단 재윤이 형 탭을 선택하자 우우우웅- 마나가 응집되고,
[지정 타겟 ‘재윤이 형’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스킬 사용이 취소됩니다.]
스킬 사용 실패 메시지가 팝업됨과 동시에 주변을 맴돌던 마나가 흩어졌다. 이번엔 L급 이상 던전에서 봤던 것처럼 다른 문구가 나오지 않고 평소와 똑같았다.
‘안식의 신은 여전히 답이 없고…….’
대체 얼마나 바쁘기에 지금까지 답이 없는 걸까 싶었다. 스킬도, 답장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는지 입이 쭉 나왔다.
‘아냐. 너무 기대하지 말자. 원래 바쁘다고 했으니까. 언젠가 대답해 주겠지.’
또 우울한 생각으로 빠질까 싶어 기를 쓰고 주변 풍경을 감상하려 노력했다. 그래 봤자 던전 게이트 근처는 여러 차례 채집을 진행한 터라 볼만한 건 없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특이한 수풀도 남아 있었고, 거대한 그루터기도 보였다.
보통 토벌이 끝난 던전에 들어서면 작은 소동물형 몬스터가 많이 보이는 편인데, 지금은 딱히 눈에 띄는 개체가 없었다. 가끔 수풀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긴 해도 정하진 때문에 주변에 다가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기 분포 몬스터는 뭐가 있었나요?”
“보스는 몽마였고, 필드엔 동물형과 하급 악마종이 섞여 있었습니다. 악마종은 대부분 토벌했고, 보스 공략 후 보스의 방으로 도망쳤습니다.”
“악마종……. 레미니센스도 있었나요?”
그 물음에 정하진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지수는 앞만 보고 걸으며 그를 마주 보지 않았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저를 보는지 몰라도 레미니센스라는 존재를 언급한 순간 괜히 뜨끔했기 때문이었다. 지수가 계속 눈을 맞추지 않자 정하진 역시 정면으로 고개를 다시 돌리며 대답했다.
“레미니센스는 없었습니다.”
“…….”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히 눈치가 보였다.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정하진에게 왜 레미니센스를 찾느냐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았기에 지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