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89화 (89/172)

#089.

이해 불가 영역 5

지수의 시선이 다시 정하율에게로 꽂혔다. 이렇게 귀엽게 생긴 남팬이라면 기억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텐데, 아마 오프라인 행사에선 만난 적이 없나 보다. 정도로 생각하며 살피자 정하진이 말을 이었다.

“하율이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습니다.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수술을 두 번이나 하기도 했고, 연약한 탓에 무리하면 금세 앓아눕곤 했죠. 그래서 콘서트나 팬 사인회는 가지 못했지만, 대격변 전 독감 때문에 대체된 영상 통화 사인회는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아…….”

영상 통화라는 말만 듣고 시기를 대충 짐작한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격변이 일어나기 직전, 지구엔 약 3년간 여러 가지 큰 전염병들이 몰아닥쳤다. 특히 전염병 중 바이러스가 계속 변이되는 지독한 독감이 가장 오래도록 인류를 괴롭혔다.

치사율도 높은 데다가 전염력도 어마어마해서 팬 사인회나 콘서트를 모두 취소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당첨자들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오프라인 행사 대신 영상 통화로 대체해 사인회를 진행했고, 그 덕에 오히려 많은 팬을 만날 수 있었다.

“영통 팬싸에 동생분도 참여했었나 봐요.”

“예. 제가 알기론 한 번뿐이었지만,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통화하던 날 하율이는 입원 중이었습니다. 계속 악화하는 건강 문제로 학교생활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많이 우울해하던 시기였고요.”

“……힘들었겠네요. 그때 통화 내용도 들으셨어요?”

“당시 전 없었지만, 하영이가 옆에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한지수 가이드가 하율이를 많이 격려해 주었다고 하더군요.”

“아…….”

솔직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그때 한지수였다면 어린 팬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제게 살갑게 구는 팬과 말이라도 한마디 더 나누고 싶고, 사진 포즈라도 한 번 더 취해 주고 싶은 게 이 바닥 프로의 마음이었으니까.

물론 아닌 사람도 많았지만, 적어도 러비스 멤버들은 모두가 똑같은 생각으로 임해 왔다. 팬들이 없으면 저들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속된 말로 ‘동태 눈깔’이 되지 않도록 서로 채찍질을 아끼지 않았다.

“음, 저도 기억하면 좋을 텐데, 기억에 없어서……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도움 되었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예. 하율이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많이 힘들어하던 시기였는데, 한지수 가이드 덕분에 눈에 띄게 밝아졌으니까요.”

저 말을 듣고 있자니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물론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지수야 최선을 다했겠지만, 지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아이돌과 영상 통화 한 번 하고 응원을 받았다고 해서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하지만 과거 저가 했던 말을 누군가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기억해 준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게다가 정하진이 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지 간에 저렇게 말해 준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수 역시 저가 느끼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말을 고르느라 잠시 멋쩍게 볼만 긁어 댔다.

“좀 민망한데…… 기분은 좋네요.”

“예. 마음껏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셔도 됩니다. 그럴 만한 일이니까요.”

그러자 일순, 지수의 눈이 장난스레 가늘어졌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를 캐치한 정하진이 의아한 듯이 눈썹을 살짝 움찔한 순간, 지수가 과장되게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럼 정하진 에스퍼가 제 팬이라는 건 역시 그냥 한 말이었군요?”

“…….”

“그렇죠?”

“……큼.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에이~ 괜찮아요. 정하진 에스퍼가 제 팬인 게 오히려 더 신기할 정도인걸요. 그치, 토토야?”

“쮜!”

얌전히 있던 토토가 거들고 나서자 정하진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눈에 띄게 당황한 정하진의 모습에 묘한 고양감을 느낀 지수가 부러 집요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제 어디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라는 듯이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지그시 바라보자, 답지 않게 입술을 달싹인 정하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가 물론 현아 정도로 열렬한 팬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팬은 팬입니다.”

“에이~”

“쮀이~”

“큼. 크흠. 진짜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아이돌이라곤 한지수 가이드뿐이었습니다.”

“흐음~”

“쮸우~”

토토와 지수의 거센 합공이 이어졌다. 저 둘이 거의 작정하고 노골적으로 놀리는 반응을 본 정하진은 식은땀을 줄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덧붙였다.

“하율이 덕분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저도 러비스가 나오는 프로그램은 많이 봤습니다. 하율이 대신 콘서트장이나 팝업 스토어에서 한정 굿즈를 사기도 했고……. 한지수 가이드를 본떠 만든 솜인형을 사기 위해 불특정 다수와 치열한 경쟁도 했습니다. 하율이랑 같이 들은 노래도 대부분 다 외웠으니 저도 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흠~”

“쮜~”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정하진은 나름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자기가 김현아처럼 열성팬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생과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에는 늘 러비스 자컨을 봤었다고 말이다.

동생이 러비스가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특히 좋아해서 유닛끼리 다닌 여행 프로는 몇 번이고 같이 돌려 봤고, 자체 컨텐츠 중 귀신의 집을 거의 부수며 돌파하는 영상도 재미있어서 이미 외울 정도로 많이 봤다는 이야기도 늘어놓았다.

또 일본의 유명한 테마파크에서 기네스에 오른 롤러코스터를 탄 지수가 내릴 땐 다리가 풀려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오열했던 장면도 기억한다며 은근히 놀려 보려 했지만, 수적 열세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지수는 배시시 웃고 있었다. 이 과묵한 남자가 필사적으로 저렇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이 재미있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가 지금 왜 저리 구구절절 노력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신경 써 주고 있네…….’

지수가 웃으면 웃을수록 정하진의 이야기는 길어졌다. 그는 제가 기억하는 러비스의 모든 이야기를 쥐어짜 내려 했다. 아니, 정확히는 한지수의 이야기 위주로 말이다. 지수가 먼저 꺼내지 않는 다른 멤버들의 이야기나 강재윤의 이야기는 최소화하면서 오직 지수와 관련된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았다.

지수는 솔직히 그가 제 팬이라는 건 믿기 힘들지만, 그래도 이 정도 정보력이면 자길 속이려고 공부했어도 인정해 줘야 할 수준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즐거웠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형들과 함께 힘들게 안무 연습하고 숙소로 돌아와 널브러져서 씻김 당했던 기억. 남산에 유명한 돈가스 맛집에 가자고 했으면서 치과에 데려가는 자컨을 촬영해 이틀 내내 토라져서 형들이랑 말 한마디도 안 했던 기억.

해외 콘서트를 마치고 함께 마스크나 모자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갈매기에게 강탈당했던 기억 등등……. 전부 가슴 속에 억지로 묻어 두었던 추억이었다. 생각하면 너무 괴롭고 그립고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웠으니까.

떠올리면 너무 가슴 아파 주저앉을 만큼 괴롭고,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강한 통증이 느껴지곤 했는데, 지금은 달랐다. 정하진이 들려주는 추억의 파편을 하나하나 듣고 있자니, 가슴이 아리긴 했지만 뭉클하고 눈가가 욱신거리는…… 딱 그 정도의 견딜 만한 통증이 잔잔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했었고, 하율이는 그 에피소드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맺은 순간,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어쩐지 볼이 얼얼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지수는 얼얼한 제 볼을 손으로 살살 문지른 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내쉬며 어느덧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슬쩍 훔쳤다.

“저도 그때 진짜 좋았어요. 특히 그때…… 각자 미니캠만 들고 자유 시간 가졌을 때, 전 희원이 형이랑 재윤이 형이랑 셋이 테마파크 갔었잖아요.”

“…….”

정하진은 지수가 먼저 강재윤과 러비스 멤버 신희원을 언급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한 번 더 심호흡한 지수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진짜 재미있었어요. 이 형들이 허세가 있어서 인형 뽑을 때까지 돈을 얼마나 썼는지…….”

“예. 저도 그 영상은 특히 재미있게 봤었습니다. 돈을 바닥에 버리는 게 나을 수준이더군요.”

“푸흡! 맞아요. 제가 그렇게 말했었죠?”

“예. 보다 못한 직원이 인형을 쉬운 위치로 옮겨 준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그 말에 작게 웃음 터뜨린 지수는 이후에도 두어 번 심호흡하더니, 그날 방송에 나오지 않았던 뒷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날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또 중간에 먹었던 피자는 토핑도 부실해 보였는데 얼마나 맛있었는지……. 너무 사소해서 돌아서면 잊을 만한 일들이 말하면 할수록 점점 생생하게 떠오른다.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다가도 중간에 먹먹해질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지수는 꾸준히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그간 계속 말하지 못했던 탓인지 제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해 하나하나 말하고 싶기도 했고, 또 정하진이, 그리고 제 팬이었다는 정하율이 들어 주었으면 했다.

지수는 형들이 자길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 주었는지, 단지 카메라 앞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얼마나 서로를 아꼈는지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진짜 가족이었다는 것을, 함께하는 동안 너무 행복했다는 것을 다른 이들도 알아주었으면 했다.

정하진은 중간중간 맞장구쳐 주며 지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토토 역시 정하율의 배 위에 앉아 지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수는 실로 오랜만에 말을 많이 했다. 나중엔 목이 좀 칼칼할 지경이라 냉장고에 있던 생수 한 통을 다 비우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지수는 묻어 두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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