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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88화 (88/172)

#088.

이해 불가 영역 4

물론 그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이상하네. 마치 활짝 웃는 것 같아.’

게다가 이상한 점은 하나가 아니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저를 향한 정하진의 눈빛이 조금 전 정하율을 향한 눈빛과 똑같이 보인다는 거였다. 아니, 그리 보이는 게 아니라 똑같은 눈빛이 맞았다.

애정이 충만하다 못해 넘치는, 누가 봐도 확고한 애정이 서린 눈빛.

저 눈빛을 보고 있자니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언젠가…….

언젠가 정하진이 제게 저런 애정 어린 눈빛으로 환하게 웃어 주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시감이.

‘……뭐지?’

일순 뇌리를 스친 정하진의 얼굴은 마치 강재윤이 제게만 보여 주던 얼굴과 같은 결을 띠고 있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아끼고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눈빛. 그건 절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거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제게 환히 웃어 주는 정하진이라니.

그는 절대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모종의 계약으로 페널티를 받고 있다는 게 기정사실로 확립됐을 정도로 웃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제게 환히 웃어 주는 모습을 본 것 같다니, 꿈이라도 꾼 걸까?

만약 그런 꿈을 꿨다면 너무 충격적이라 기억에 깊이 남았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 떠올랐다 증발해 버린 그의 미소는 아마도 제 상상이 만들어 낸 게 분명했다.

‘왜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거지…….’

터무니없는 생각에 놀란 건지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거렸다.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한지수는 애써 정하진의 미소를 지워 내려 노력하며 아무 말이나 꺼냈다.

“그…… 간호하는 분은 없나요?”

“각성자 협회랑 평화 길드에서 보내 준 힐러들이 격일로 방문합니다. 오늘은 오후에 출근하시라고 했습니다.”

“아, 네.”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이번엔 정하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새근새근 잠든 것 같은 순둥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정하진이나 정하영과는 크게 닮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가?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가?’

“……!?”

‘어? 뭐지?’

또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 병원에 온 것은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병실 구조가 이상하리만큼 익숙했다. 언젠가 제가 이 위치에 서서 정하율을 내려다보며 정확히 같은 생각을 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하진과 정하영과 그리 닮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과 눈을 감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나 하는 생각까지.

‘신기하네. 연달아 두 번이나 데자뷰가 생기고.’

단순한 기시감이라고 치부하기엔 겪어 본 일처럼 또렷이 잔상이 남아 있었다. 마치 경험에 기반한 기억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수는 이에 딱히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정신은 온전하지 못한 상태니 충분히 헷갈릴 수 있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정하진이 환히 웃을 리도 없고, 그의 동생을 병문안 온 적도 없으니 이건 다 정신이 어지러워 그런 거라고 말이다.

‘이래서 사람이 정신 건강이 중요하다는 거구나.’

시답잖은 생각한 지수가 침대 옆 소파에 앉았다. 정하진은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동생의 작고 하얀 손을 연신 부드럽게 보듬어 주고. 손가락이나 손등에 입 맞추면서도 그의 시선은 동생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수는 그동안 정하진이 활동하지 않는 시기엔 늘 동생 곁에서 이렇게 있었겠구나 싶어 조심스레 두 사람을 지켜봤다. 던전 공략이 아니면 남은 시간 대부분을 동생 곁에서 머물던 사람.

대격변 이후 깨어나지 못하는 동생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이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론적으로 지수는 그가 부러웠다.

깨어나지 못하는 이를 기다리는 게 고통스럽고 괴롭다고 하더라도 감내할 수 있으니, 제 동생과 형도 이 병원 어딘가에 있길 바랐다. 그리고 또 다른 가족인 러비스 멤버들과 강재윤도 말이다.

그저 병원에 누워 숨만 쉬어 줘도 고마울 것 같았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깨어나는 날까지 평생 수발이고 뭐고 다 들어 줄 테니까 제발 곁에 있어만 줬으면 하고 바랐다.

‘부질없다…….’

시간을 되돌리는 게 아닌 이상 만날 수 없는 이들이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생각하지 않기로 한 지수가 다른 풍경을 눈에 담았다.

창밖으로 동산이 보였다. 겨울이라 앙상한 나무와 그 사이사이 쌓인 눈이 보일 정도로 헐벗은 상태였다. 지금은 저리 볼품없지만, 봄 여름 가을엔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일 나무가 많이 보였다. 이번엔 내부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전 지수도 입원한 적 있는 VIP 병실처럼 온갖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

침묵은 계속 이어졌다. 다른 이와 이렇게 한 공간에 있으면서 말없이 앉아만 있어야 한다면 어색했을 텐데, 정하진과 함께 보내는 조용한 시간은 괜찮았다. 말이 필요하지 않은 편안한 관계는 강재윤과 김현아 외에 더 없을 거라 여겼는데, 넓어진 인간관계에도 불구하고 괜히 씁쓸했다.

얼마나 봤다고 그가 벌써 편하게 느껴지는 건지. 그를 대상으로 자기에게 활짝 웃어 주는 얼굴이나 떠올리고 있는지. 그가 곁에 있어서 든든하다고 느끼는 건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그가 해 주는 음식은 전부 입에 잘 맞았고, 배달시켜 주는 음식조차 제 취향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그를 편히 여기는 자신이 조금은 미웠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지금 저가 이리 여유 있게 지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소 우울한 상념으로 빠져들려는 찰나, 정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지수 가이드.”

“……!”

놀라 고개 들자 지수를 응시하는 정하진이 보였다. 그는 평소처럼 무던한 얼굴로 지수를 살피고 있었다. 지수가 왜 불렀냐는 듯이 어색하게 웃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무슨 생각 하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그냥 이거저거요.”

“그렇습니까.”

“네……. 왜요? 표정이 안 좋았어요?”

일부러 평소보다 더 조심스레 물었다. 이런 질문에 누가 그렇다고 대답하겠나 싶어서 건넨 말이었는데, 정하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예.”

“…….”

“안 좋다기보단, 슬퍼 보였습니다.”

“…….”

“혹시 여기에 있는 게 괴로운 거라면, 그만…….”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

정하진은 그럼 뭐냐고 묻는 대신 한 손은 동생의 손을, 다른 손은 토토를 보듬어 주며 지수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 그러니까…….”

잠시 말을 고르느라 입술을 달싹인 지수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전 제 생각을 그대로 말하자니 정하진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랐기에 솔직히 말하는 게 망설여졌다. 대충 그럴싸한 다른 말을 둘러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몰라도 그게 통할 것 같진 않았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예. 한지수 가이드만 괜찮다면.”

“……음, 그냥……. 동생분 보고 있으니까 제 동생도 생각나서요.”

“…….”

“형도 생각나고.”

“…….”

“두 사람도 그냥……. 곁에 있기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음 죄송해요. 신경 쓰였겠네요.”

“아닙니다.”

“그런데 저 진짜 괜찮아요. 그냥 생각하니까 조금 슬프긴 했는데, 괜찮아요. 그리고 저도 여기에 있고 싶어요. 진심으로요.”

“…….”

“그리고, 음……. 다음엔 책이나 뭐 그런 거라도 가져오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집에만 있는 것보다 코앞이라도 이렇게 나와서 밖에 있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아, 여기도 실내긴 한데, 어쨌든요…….”

그 말에 정하진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지수는 일순 그의 눈빛에 그리움이 스쳤다고 생각했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어딘가 애잔하고, 조금은 슬퍼 보이고, 또 어찌 보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가 입술을 움직인 순간…….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

또…….

또 기시감이 들었다.

놀란 탓에 재깍 반응하지 못한 지수가 눈만 깜빡였다. 또 선명한 기시감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루에 이런 기시감이 몇 번이나 선명하게 떠오를 수 있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기시감이 들었다가 서서히 잊히겠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 마치 이 순간이 선명하게 각인된 것처럼 사라지지 않고 잔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하진의 저 표정과 낮은 목소리, 그리고 그가 한 말을 언젠가 그대로 마주한 적이 있었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말이다.

‘아무래도 꿈을 꿨나 봐…….’

어색하게 웃은 지수가 고개 숙여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정하진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지만, 이내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음, 한지수 가이드”

“네?”

“괜찮다면, 하율이 이야기를 조금 해도 될까요?”

넌지시 건넨 부드러운 말에 지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은 차라리 그가 말하는 걸 듣는 게 편할 것 같았다. 어루만지던 동생의 작은 손을 조심스레 내려 둔 정하진이 이번엔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살살 넘겨 주며 말했다.

“하율이는 러비스의 팬이었습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린 지수가 정하진과 정하율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정하진은 지수와 눈을 맞추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지수 가이드의 팬이었습니다.”

“……!”

지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반응을 본 정하진은 다정함 어린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한지수 가이드가 하율이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고 하더군요.”

“……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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