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87화 (87/172)

#087.

이해 불가 영역 3

“어…….”

지수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놀란 탓에 잔뜩 굳은 몸짓이 어찌나 뻑뻑한지, 목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침을 꼴깍 삼키며 떨리는 눈동자로 느릿하게 돌아보자 배달 회사 로고가 그려진 음식 봉투를 든 정하진이 보였다.

그는 늘 그렇듯 과하게 잘생기고 덤덤한 얼굴로 지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정하진의 면을 살펴본 지수는 그의 얼굴이 평소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안심하지 못했다.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하진이었으니까.

“……안녕히 주무셨어요?”

“예. 전 잘 잤습니다. 스트레칭 중이셨습니까?”

누가 봐도 몹시 수상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지만, 지수는 달리 해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슷해요. 모, 몸이 찌뿌둥하네요. 그런데, 정하진 에스퍼…….”

“예?”

“그, 어…….”

지수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며 침실을 흘끔댔다. 그러자 지수의 시선을 따라 침대를 확인한 정하진이 봉투를 식탁으로 가져가 내려 두며 말했다.

“아, 새벽에 찾아오셔서 함께 대화하다 뉴스도 보고 잤습니다. 푹 주무시기에 굳이 옮기진 않았습니다.”

마치 오늘 날씨가 흐리군요.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래. 내가 찾아갔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눈을 질끈 감고 작게 고개를 끄덕인 지수가 곧바로 사과했다.

“번번이 죄송해요…….”

“전에도 말했지만, 정말 괜찮으니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에……. 음, 그런데……, 제 눈은 왜 이렇게 부었죠? 목은 또 왜 이렇게 쉰 건지…….”

“아, 그건…….”

말을 멈춘 정하진이 지수의 발 근처에 서 있는 토토를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 숙인 지수는 공손한 자세로 서 있는 토토의 눈도 퉁퉁 부어 있는 걸 발견하고 놀라 휘둥그레졌다. 조금 전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오밀조밀 귀여워야 할 이목구비가 평소와 다르게 찐빵처럼 부어 있었다.

“헉? 토토야, 눈이 왜 그래!?”

“간밤에 던전이 터지며 소멸했습니다. 다행히 몬스터 웨이브는 없었습니다만, 폭발 규모가 상당히 컸습니다. 뉴스에서 폐허가 된 지역을 보여 주었는데, 거기에 한지수 가이드의 아파트도 나왔습니다.”

“제 아파트요?”

“음, 정확히는 아파트였던 폐허가 나왔다고 해야겠군요. 집을 잃은 충격이 컸는지 토토가 먼저 크게 울었고, 토토를 위로하던 한지수 가이드도 함께 슬퍼했습니다.”

“…….”

절반의 사실과 나머지 거짓이 뒤섞인 저 어설픈 거짓말은 정하진이 나름대로 밤새 고민한 결과였다. 지수를 속이고 싶진 않았지만, 새벽에 강재윤 이야기를 쏟아 내며 오열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가끔은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었다.

지수가 차분한 상태였다면 제가 집을 잃고 울었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터였다. 하지만 정하진은 이상한 낌새를 느낄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토토를 주워 지수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 아이구, 우리 토토 완전 빵떡이 됐네. 토토야, 많이 울었어?”

“쮜이.”

가까이서 보니 엉망인 얼굴이 더 자세히 보였다. 대체 간밤에 얼마나 운 건지 귀여운 얼굴이 아주 쑥대밭이었다. 토토를 넘겨받은 지수는 퉁퉁 부은 털 뭉치를 보듬어 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토토야. 집은 새로 구하면 돼. 더 좋은 집으로 구하자.”

“쮜!”

상황을 잘 넘긴 것 같아 내심 안도한 정하진과 달리 지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가 아무리 약에 취했어도 딱히 애착도 없는 집이 무너져 그리 울었을 리는 없고, 아마 강재윤의 집이 사라져서 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내 집이 폐허가 됐을 정도면 재윤이 형 집은 아예 먼지가 됐겠지…….’

던전과 거리로 치면 제 집보단 강재윤의 집이 훨씬 가까웠으니, 흔적도 남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참으로 유감스럽고 속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견딜 만한 강도의 감정이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제 인벤토리에 다 보관 중이니까.

‘요즘 정하진 에스퍼 덕을 크게 보네. 나중에 선물이라도 해야겠다.’

그 덕에 강재윤의 물건도 챙긴 것도 그렇고, 간밤의 일을 자세히 말하지 않는 배려도 기꺼웠다. 고마움은 부족하지 않게 언제나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강재윤의 말을 떠올린 지수는 정하진과 함께 아침 식사 준비를 도왔다.

* * *

‘각성자 전문 병원이었구나.’

집에서 출발 전 병실로 올라가기 위해 신분 확인 절차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의아했는데, 각성자 전문 병원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던전산 수정을 쓰기도 하고, 고가의 장비가 많은 것도 있지만, 언론사와 같은 외부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기 위해서인 부분도 있었으리라.

덕분에 지수는 모자와 마스크를 써 얼굴을 가리고 외출했다. 어차피 병원은 정하진의 집 바로 길 건너였으니, 딱히 부담되는 거리도 아니었다. 정하진은 병원에서 발급받은 카드로 체크를 하고 바로 입장했지만, 처음 방문하는 지수는 변신 아이템 사용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보안 수색대 같은 장비를 통과해야 했고, 방문자 신분 역시 실명으로 기재해야 했다.

‘어차피 변신했어도 다 풀어야 했겠네.’

추후 정하진이 병원에 온다면 지수 역시 동행해야 했기에 한지수 명의로 방문자 카드도 발급받았다. 방문 기록은 전부 암호화되어 저장된다는 말에 지수는 무심히 끄덕였다. 다소 심드렁한 반응을 본 정하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이 새어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아, 네. 그런데 뭐. 딱히 새어 나가도 상관없어요.”

애초에 지수는 완벽한 비밀 유지를 신뢰하진 않았다. 어떤 기관이든 말은 새어 나가기 마련이고, 직원의 입을 전부 단속할 수는 없으니까. 이건 대격변 전부터 이미 포기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정하진은 지수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는지 굳이 말을 덧붙였다.

“의료진이나 직원 모두 고등급의 맹약을 해서 방문객에 대해 사적인 발설은 하지 못합니다. 물론 방문객까지 어떻게 하진 못하겠지만, 방문하는 환자나 보호자도 각성자거나 각성자 가족일 테니, 그들도 어느 정도 조심하는 부분은 있을 겁니다.”

“오……. 그건 좀 신뢰할 수 있겠네요.”

“예.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안 검색대 같은 게이트를 하나 더 통과한 후 내부 엘리베이터에 카드를 대자 바로 문이 열렸다. 층을 선택할 필요도 없이 엘리베이터는 알아서 움직였다.

5층에서 내려 정하진을 따라 복도를 걷는 내내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방문객의 얼굴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교육을 받은 건지, 아니면 바빠서 누가 오가든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건지 몰라도 지수로서는 달가운 일이었다.

앞서 걷던 정하진이 한 병실 앞에 멈춰 섰다. 병실 밖 팻말에 ‘정하율’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제 동생처럼 ‘율’자로 끝나는 이름을 본 지수는 간밤에 꿨던 꿈이 벌써 흐려진 게 아쉬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병실 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선 정하진의 등을 잠시 지켜본 지수는 저 역시 천천히 들어가 병실 문을 닫았다. 병실은 굉장히 넓었다. 창문도 매우 컸지만, 침대 쪽 커튼은 쳐 둔 상태였다.

지수는 문 근처에 서서 침대로 다가가는 정하진을 지켜봤다. 협탁 위에 손 세정제로 소독을 한 그가 제 동생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정하진의 얼굴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이따금 지수에게 보여 주던 표정과 비슷해 보였다. 당연히 정하율을 향한 눈빛이 그보다 훨씬 큰 애정을 담고 있지만, 보고 있자니 마음 편해지는 얼굴이라는 점에선 비슷했다.

“하율아, 형 왔어. 오늘은 형 친구도 같이 왔어.”

“……!”

지수의 눈이 커졌다. 친구라고 소개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 섰다. 가까이서 본 정하율은 그저 곤히 잠든 소년 같았다. 20대 초반이라고 들었는데 그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지수의 표정을 살핀 정하진은 엄지로 동생의 손등을 살살 보듬으며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율이는 대격변 이후 신체의 모든 성장이 멈췄습니다. 중학생 때 모습 그대로입니다.”

“아, 그렇군요…….”

‘하마터면 동안이라고 할 뻔했네.’

어색할 때 아무 말이나 내뱉는 대신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낫다는 걸 오늘도 실감한 지수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지수의 주머니에서 내내 얌전히 있던 토토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토토. 나와도 된다. 이리 와.”

“쮜!”

주머니에서 나온 토토가 침대로 폴짝 뛰어내리더니, 정하율의 배 위로 올라갔다. 지수가 말리려 했지만, 정하진은 괜찮다며 토토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하율이는 햄스터를 좋아합니다.”

“아…….”

제 동생도요. 지율이도 햄스터를 엄청 좋아했어요. 그 말이 나오지 않아 지수는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도 좋아하고요. 개랑 고양이도 좋아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웬만한 동물은 다 좋아했던 것 같군요.”

“…….”

그렇구나. 우리 지율이도 그랬어요. 이번에도 떠오른 대답을 삼킨 지수가 흐리게 웃으며 물었다.

“반려동물도 있었나요?”

“아뇨. 하율이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키운 적이 없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나중에…….”

지수가 잠시 말을 멈추자 정하진은 괜찮다는 듯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지수를 바라봤다. 그와 잠시 눈을 맞춘 지수는 정하율의 손을 보듬는 상처투성이 손으로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

“……나중에, 괜찮다면 토토랑 같이 놀면 좋겠네요.”

괜한 소리를 한 걸까. 5년 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동생을 앞에 두고 해도 되는 말일까. 조심스레 고개 든 지수는 잠시나마 사서 걱정한 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정하진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얼굴로 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