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이해 불가 영역 2
바람이 불어온다. 잔잔했던 호수에 물결이 일며 윤슬이 넘실거린다. 한지수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제 옆에 앉은 강재윤과 함께.
거대한 호수는 하늘을 수놓은 별과 푸른 달을 품고 있었다. 밤하늘과 어두운 호수의 경계가 보이지 않아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보이는 풍경이었다. 잔물결이 잦아들어 잠잠해진 호수를 응시하던 지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주 같네. 우주에 가 본 적은 없지만.”
“그러게.”
“근데 형, 이상하지 않아?”
“뭐가?”
“봐 봐. 별들은 하늘이나 호수에 비친 거나 크게 다를 거 없이 보이는데. 달빛만 길게 늘어져서 징검다리처럼 보이잖아.”
“흠, 그러네. 왜 그럴까?”
강재윤은 그 이유가 딱히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지수가 말했다는 이유로 호기심이 생긴 척을 한다. 지수는 강재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쿡쿡 웃었다. 이 사람은 제가 뭔가 말하면 이렇게 호응해 주긴 하지만, 정말 관심을 두거나 궁금해하진 않는 것도 한결같아 재미있었다.
“밟아 보고 싶다.”
“달빛?”
“응.”
“밟아.”
“그래도 물 밑에 몬스터 있으면…….”
“괜찮아. 형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못 기어 나와.”
그렇게 말한 강재윤이 먼저 일어나 손을 내민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난 지수가 배시시 웃었다. 지수의 주머니 속에서 꾸벅꾸벅 졸던 토토가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집사가 호숫가로 걸어가기 시작하니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본다.
“쮜?”
“토토야. 아빠랑 재미있는 거 해 보자.”
호수에 다가선 지수가 강재윤을 바라봤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애정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지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곤 어서 가 보라는 듯이 맞잡고 있던 손을 살포시 놓았다. 넘실거리는 수면을 바라보던 지수는 길게 늘어진 희미한 달빛 위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찰방-
작은 소리가 울렸다. 힘을 살짝 줘 봤지만, 수면 아래로 발이 빠지진 않았다. 제 발을 내려다보던 지수가 조심스레 강재윤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강재윤이 여유 있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괜찮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는 신호였다.
잠시 망설였지만, 결심을 굳힌 지수가 다른 발도 천천히 물 위로 올렸다. 두 발 모두 수면을 밟고 서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느리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딘 지수는 제 발밑을 받쳐 주는 강재윤의 염력을 느끼며 살풋 미소 지었다.
단단하다. 마치 지면처럼.
한지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강재윤이 저를 놓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럼에도 새삼스러웠다. 이토록 저를 온전하게 지탱해 주는 그가.
“……그럼, 이제 걷는다?”
“응.”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달빛을 밟으며 수면을 걷는다. 일정한 속도로 열 걸음 정도 걸어간 지수가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본다. 강재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오직 한지수만을 눈에 담은 채. 한지수가 강재윤을 마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은 순간, 주머니에 있던 토토가 “쮜이잇!” 울며 힘차게 뛰어내렸다.
“토토야!”
“쮜히힛~!”
강재윤이 염력으로 빠르게 밑을 받쳐 준 덕분에 토토 역시 물에 빠지지 않고 호수 위에 찰박 네 발로 섰다. 그러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호수에 비친 큰 별빛을 향해 점프했다.
“쮜엣!”
찰방-!
“쮜에엣!”
찰방-! 찰방-!
“토토야, 천천히 다녀, 재윤이 형 힘들어.”
분명 알아들었으면서, 토토는 강재윤이 힘들든 말든 제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여기저기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힘껏 점프해 착지할 때마다 작은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윤슬이 일렁인다.
제 주변을 빙빙 돌다 저 먼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토토를 지켜보던 지수가 몸을 돌리자 시야에 강재윤이 가득 들어찼다. 지수는 제 뒤로 소리 없이 다가온 그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올 줄 알았다는 듯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강재윤은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오직 한지수에게만 지어 주는, 한지수가 가장 좋아했던 미소를.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눈가가 시큰거리고 축축하게 젖어 들었지만, 한지수는 환하게 웃는 낯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여기가 꿈속이라는 것은 알지만.
과거의 기억을 뇌가 복기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만.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를 마주한 강재윤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지금 제 앞에 그가 있으니까. 그가 언제나처럼 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으니까.
참 신기한 일이었다. 여기서 더해질 수 없을 것 같은데도,
“형.”
“응.”
이렇게 강재윤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어.”
“…….”
그리움이 짙어진다.
“진짜 엄청나게 보고 싶어.”
“…….”
담담하게 건넨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강재윤의 미소가 더 깊어진다.
이거로 됐다. 그가 대답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이곳은 꿈. 제 기억이 빚어낸 허상의 세계니까.
하나, 그럼 어떠한가.
꿈이든 현실이든 강재윤은 언제나 한지수가 원하는 말만 들려주고 원하는 모습만 보여 주었는데.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그는 대답 대신 저리 웃고만 있다. 지수의 생각을 안다는 듯이. 이보다 더한 답은 없다는 듯이.
그가 들려준 무언의 답을 확실히 인지한 순간, 시야가 흐려진다. 눈앞에 서 있는 강재윤의 이목구비가 뿌옇게 번지다 못해 이젠 하나의 덩어리로 보였다. 그럼에도 한지수는 오직 강재윤만을 눈에 담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강재윤도 지수만을 눈에 담는다. 일순 강재윤의 눈동자에 짙은 그리움이 서렸지만, 당연하게도 지수는 그 찰나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다.
꿈의 주인인 한지수가 점차 흐려지더니, 달빛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공간의 주인이 사라지자 아름답게 반짝이던 밤하늘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한다. 크게 갈라져 조각난 하늘의 파편이 호수로 추락한다.
쿵-
쿵-
쩌저적-
쿠웅-
파편이 떨어진 호수도 마치 거울처럼 거미줄 같은 금이 생기며 쩍쩍 갈라진다. 균열 위에 새로운 균열이 생기고, 와르르 쏟아지는 하늘을 감당하지 못해 공간 전체가 순식간에 무너져내린다.
찰나의 순간.
꿈의 주인을 잃고 무너져 버린 세계는 올려다볼 하늘도, 딛고 설 땅도 없었다.
모든 것이 소멸한 세계에 남은 것은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공간을 가득 채운 그리움뿐이었다.
* * *
그리운 꿈을 꾸었다. 그것도 두 개나 연달아서.
처음 꾼 꿈은 예전 집에서 형과 동생과 일상을 보낸 꿈이었고, 두 번째 꿈은 강재윤과 공략했던 던전이 나오는 꿈이었다. 역시 꿈이라 그런지 기억과 다른 장면이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선명한 자각몽이어서 그런지, 진짜 형과 동생과 강재윤을 만난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었다. 그럼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호수 위에서 강재윤과 함께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운 적도 없는 멋들어진 춤 대신, 그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천천히 발을 맞춰 움직일 뿐이었기에 여유로웠던 그 춤 말이다.
이대로 다시 잠들면 꿈을 이어 꾸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아직 완전히 깨지 않은 얕은 잠을 그대로 이어 가려는 찰나.
쪽-
“…….”
쪽쪽-
“…….”
쪽- 쪽쪽쪽-
작은 주둥이가 코끝에 연신 뽀뽀해 대기 시작했다. 일부러 반응하지 않고 있으니, 더 격한 뽀뽀가 쏟아졌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지수가 결국 부스스 눈을 떴다. 초점이 제대로 맞진 않았지만, 제 코를 앞발로 잡은 채 서 있는 토토가 보였다.
“으음……. 트트으…….”
토토가 뒷발로 입술을 밟고 선 탓에 뭉개진 발음이 흘러나왔다. 그게 재미있었는지 “쮜히힛~!” 웃더니, 제 집사의 코를 살짝 깨문 토토가 폴짝 뛰어내렸다.
“아야…….”
따끔한 코를 문지르며 반대로 돌아눕자 창밖으로 우중충한 회색빛 하늘이 보였다. 꽤 이른 아침인 것 같은데 날이 흐려 상쾌함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요즘 날씨 진짜 왜 이러냐…….”
“쮜이-!”
날씨가 어떻든 간에 빨리 일어나라는 듯이 침대에서 뛰어내린 토토가 지수를 돌아봤다.
“으음……. 10분만…….”
토토 때문에라도 일어나고 싶은데 쉽지 않았다. 누가 들으면 어이없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한지수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일이 버거울 정도로 힘들었다.
“쮜이!”
“토토야, 아빠 딱 10분만 누워 있을게……. 가서 포포랑 놀고 있어…….”
“쮜! 쮜이!”
하지만 토토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 집사가 침대에서 벗어날 때까지 부를 생각인지, 침대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퍽 단호했다. 비틀대며 겨우 몸을 일으켜 앉은 지수는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부었지?’
잘못 본 건가 싶어 손으로 눈두덩을 만져 보니 퉁퉁 부어 있는 게, 쌍꺼풀 수술 했냐는 질문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으으……. 토토야. 아빠 목도 쉬었고……. 온몸이 삐걱거리는 것 같아, 아무래도 조금 더 쉬어야…….”
“쮜에엑! 쮜엑! 쮜에엣!”
“어, 어어, 알았어, 아빠 일어날게. 화내지 마. 아빠 일어난다, 일어나.”
비척비척 일어나 방을 나서려던 지수는 문득 멈춰서서 방을 다시 돌아봤다.
“어?”
아무리 봐도 어제 저가 잠든 방이 아닌 것 같았다. 정하진이 제게 내준 방은 이보다 더 화사한 느낌이었다. 침대는 하늘색 침구 세트였는데, 방금 벗어난 침대는 시트부터 이불과 베개까지 아주 짙은 회색이거나 새카맸다.
“엄마야…….”
밤에 누운 침대와 아침에 일어난 침대가 다르단 것을 확인하자마자 혼탁했던 정신이 확 깨어났다. 굳이 둘러볼 것도 없었다. 여긴 누가 봐도 정하진의 방이 분명했다. 지수의 떨리는 눈동자가 급하게 주변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쓴 흔적이 가득한 침대. 침대 옆 휴지통을 절반가량 채운 뭉쳐 있는 휴지들. 퉁퉁 부은 눈. 왜인지 모르겠지만 쉬어 버린 목…….
“…….”
갑자기 뒷골이 싸~해지는 기분이었다. 설마설마하며 방에 딸린 욕실로 뛰어 들어가 급히 뭔가(?) 확인해 보려던 찰나.
“아, 일어나셨군요. 좋은 아침입니다.”
침실 주인의 담백한 인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