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83화 (83/172)

#083.

터지는 게 낫지 4

코코아를 한 모금 홀짝거리며 가볍게 던진 질문에 정하진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는 딱히 없군요. 아, 오늘 저녁은 치킨이 먹고 싶다고 해서 배달시켰습니다.”

“오, 치킨……. 좋네요.”

퍽 오랜만의 치킨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메뉴 선정은 또 잘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 뿌듯했다. 정신 빼고 살아도 굶어 죽진 않겠구나, 싶은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샘솟았다.

그런데 정하진의 표정이 다소 복잡해 보였다. 혹시 말하지 못한 게 있는 건가? 이게 전부가 아닌가? 싶어 왜 그러냐는 듯이 바라보자 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한지수 가이드가 맥주도 꼭 마시고 싶다고 하셔서 같이 주문하긴 했습니다만…… 오늘은 치킨만 먹도록 하죠. 지금 상태에서 음주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

어째 ‘꼭’ 부분에 힘이 조금 들어간 걸 봐선 보통 조른 게 아닌 것 같았다. 정하진에게 24시간 내내 온갖 신세를 다 지고 있으면서 술까지 시켜 달라고 했다니!

정신 놓고 살아도 굶진 않겠다며 미약하게 생기려던 뿌듯함이 순식간에 증발하고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수치심에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감추고자 코코아를 홀짝인 지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대체 술은 왜 시켜 달라고 한 거야!’

평소에 술도 안 마시면서, 갑자기 웬 맥주 타령인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이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인간이 바로 자기라고 소개해도 될 것 같았다. 혹시 기억이 끊기는 구간엔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한지수 가이드. 괜찮습니까?”

“크, 큼! 그, 정하진 에스퍼. 혹시……. 제가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나요?”

“예?”

“혹시 주정뱅이처럼 굴거나…….”

정하진이 드물게 놀란 내색을 감추지 않고 연신 눈을 깜빡였다. 저 반응을 보아하니 다행히 추태 부린 건 아닌 것 같았지만, 확실히 하고자 대답을 기다렸다. 정하진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더니 대체 왜 그런 걸 묻냐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약 평소와 다른 모습이 보였다면 제가 눈치챘을 겁니다.”

“어으,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요…….”

진심으로 안도한 지수가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늘 그렇듯 지수는 제게 상냥한 사람에게 저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래서 항상 노력하고 있지만, 제정신이 아닐 때도 그 노력이 이어질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항상 뇌에 힘주고 살자…….’

* * *

자정이 넘은 늦은 밤 경기도 임시 본부 사령실.

곧은 자세를 유지하며 속속 들어오는 정보를 전부 체크한 국방부 장관 안재일은 하루 사이에 10년은 더 늙어 있었다. 안재일의 급격한 노화의 시작은 바로 어제저녁, 마포구 상공에 터진 던전 때문에 1급 대피령을 내린 순간부터였다.

1급 대피령.

말이 1급 대피령이지, 서울 시민을 외곽으로 대피시키는 건 어마어마한 인력과 자원이 필요한 일이었다. 대격변 이후 대한민국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해도 여전히 서울엔 사람이 많았으니까.

이는 대격변 이후 다른 도시보다 서울의 재건이 훨씬 빨랐던 탓도 있지만, 애초에 행정 시스템이 다시 작동하던 시기에 각성자와 생존자를 서울로 집결시켰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낀 서울로 사람이 몰리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런 와중에 마포구를 둘러싼 주변 일대를, 사실상 서울 내 민간인을 전부 대피시켜야 한다는 말을 들은 참모들은 거품을 물었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며 우는소리 하는 참모들의 입을 틀어막고 국내 모든 길드와 힘을 합쳐 대피를 강행한 덕분에 게이트화 징후로 발생한 토네이도로 인한 인명 피해는 없었다.

물론 대피에 응하지 않고 숨어서 버티는 민간인도 많겠지만, 현재로서는 사망자 0명이 유일하게 이번 대피에서 건진 긍정적인 결과였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볼 수 있는 결과임에도 안재일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몬스터 웨이브가 터져 ‘그것’이 던전 밖으로 나온다면…….’

김현아가 보낸 임세주라는 에스퍼가 보여 준 정체불명의 괴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놈이 보스 몬스터일 것이다. 던전 자체 등급은 L급 이상이라 현존하는 장비론 상세 측정이 불가능하고, 내부에 널린 몬스터만 해도 최소 B급부터 S급이 널려 있는 상태. 보스 등급은 보통 던전 등급을 따라가니 보스도 L급 이상일 확률이 높았다.

“후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안재일이 옆에 밀어 둔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블릿 액정엔 각국에서 공유하는 던전 기록이 보였다.

인류가 던전에 대해 기록을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상공에 나타났다가 공략에 실패한 던전은 총 75건. 그중에 상공 던전 소멸 시 게이트 밖으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온 ‘몬스터 웨이브’의 경우는 단 2건이었다. 나머지 73건의 상공 던전은 모두 게이트가 폭발하며 소멸했다.

‘이번에도 제발 터지고 끝나라. 그냥 터져, 제발.’

지금 안재일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몬스터 웨이브 없이 던전이 터지는 거였다. 밀려오는 피로감에 미간을 주무르던 안재일은 일순 의아함을 느꼈다. 지금껏 내내 시끄럽게 싸우고 언성 높이던 이들이 모두 동시에 조용해졌으니까.

“……?”

태블릿에서 시선을 뗀 안재일이 주변을 둘러봤다. 회의실 내 보이는 인원이 전부 눈을 크게 뜬 채 참모 회의장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고개 돌린 안재일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스크린에 보이는 마포구 던전 게이트가 길게 세로로 찢어지듯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태, 태종대처럼 게이트가 변형되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연기도 나옵니다!!!”

안재일은 나도 같은 화면을 보고 있으니 굳이 입으로 외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길게 찢어지던 게이트가 이번엔 납작해지더니 가로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반죽을 쥐고 늘리는 모습 같은 게 얼핏 보면 태종대 던전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때 들렸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은 없는 대신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게이트가……!! 게이트가 줄어듭니다!!!”

이대로라면 태종대처럼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고 소멸하지 않겠냐는 기대 어린 반응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안재일 역시 일말의 희망을 품은 순간, 눈 깜짝할 새 게이트가 사라져 버렸다. 불과 1초 전만 해도 존재했던 게이트가 팟- 하고 사라지자 일순 조용해진 회의장이 다시 혼란해졌다.

“게, 게이트는……? 소멸인가!? 파장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시 확인해!”

“여전히 확인되지 않습니다!”

“혹시 모르니 다시 측정해 봐! 그리고…… 어어!?”

“뭐야? 누가 장비 건드렸어?”

가장 큰 대형 스크린 화면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이내 새카만 바탕으로 바뀌며 신호 없음 문구가 팝업되었다. 그러더니 곧 주변 다른 스크린 화면 역시 하나둘 차례대로 나가기 시작했다. 안재일은 직접 앞으로 나가 장비를 조작해 조금 멀리 떨어진 지역의 스크린을 화면에 띄웠다.

돌아온 화면이 비춘 것은 저 멀리서부터 터져 나오는 강렬한 빛이었다. 이어 눈부시게 발광하는 빛의 돔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건물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비추더니, 바뀐 화면 역시 몇 초 버티지 못하고 암전됐다.

다시 조작해 여의도로 화면을 바꾼 안재일은 대격변도 버텨 냈던 금빛 빌딩 상층부가 잘려 나가 뒤에 있던 건물을 뭉개는 장면을 지켜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이후에도 더 먼 지역으로 화면을 계속 바꿨지만, 전부 얼마 버티지 못했다.

거리를 아예 벌려 더 멀고 높은 지역으로 설정하자, 처참하게 파괴되는 도심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모래로 만든 것처럼 속절없이 부서지는 빌딩과 백화점, 무너져 산 밑으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한 이젠 과거형이 된 남산의 명물, 서울 타워까지 본 순간엔 온몸에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함께 화면을 지켜보던 참모들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특히 김현아의 말을 무시하고 남산 근처 벙커로 대피하자고 불평했던 이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

“…….”

또다시 화면이 나갔다. 부산스럽던 회의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 가까스로 침음을 삼켜 낸 안재일이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소멸 여부부터 확인합시다.”

* * *

아직 깊은 새벽.

앞다퉈 이륙한 각 채널 뉴스 헬기들이 서울을 누비고 있었다.

-이 아래는 각성자가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유명한 아파트 단지가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모습입니다!!-

던전 소멸 이후 각 채널에선 마포구를 기준으로 여의도, 용산, 을지로 등 초토화된 도심을 각자 위치에서 송출하고 있었다. 방송국 헬기 사이로 대형 드론에 탑승해 직접 현장을 담으며 생방송 하는 너튜버들도 간간이 보였다.

-에휴, 여기까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죠. 살아서 다행이긴 한데…….- <을지로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김○○ 씨>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아니, 마포에서 터진 던전이 여기까지……. 아이고, 이제 겨우 자리 잡았는데, 앞으로 또 어떻게 그 고생을 다시 하라고……. 아이고오오…….- <용산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박○○ 씨>

-아직 새벽이라 회사에서 어떻게 하라고 지침이 없는 상황이네요. 건물이 사라졌으니 다른 센터로 출근하라고 하지 않을까…….- <○○전자 AS센터 홍대입구점 엔지니어 윤○○ 씨>

음소거 상태로 뉴스를 확인한 정하진은 스마트폰 액정을 끄고 협탁에 내려 두었다. 그러자 조금 전 한지수의 집이 있었던 터를 알아본 후 바짝 굳어 있던 토토가 눈을 깜빡이며 정하진을 바라봤다. 퍽 심란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