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터지는 게 낫지 3
몽롱한 기분으로 옆에 서 있는 포포를 향해 고개 돌린 지수가 쭈그리고 앉아 둥근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포포야. 계속 녹화하고 있지?”
“네, 지수님. 영상을 보여 드릴까요?”
“응. 오늘 초저녁부터 보여 줄래?”
포포의 배 부분 패널에 저장해 둔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수는 포포의 배를 터치해 음소거 상태로 영상을 뒤로 쭉 돌렸다. 셔틀에 탑승한 후부터 재생하기 시작하자, 지수의 기억대로 영상 속 자신은 창가에 앉아 졸린 듯 눈을 반쯤 감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떨구었다.
얼마나 깊게 잠든 건지 고개를 떨구고 창문에 이마를 쿵쿵 박으면서도 절대 깨지 않았다. 옆자리 정하진이 그 모습을 보다 못해 지수의 머리를 조심스레 끌어당겨 제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내내 자던 지수는 셔틀이 착륙하자마자 부스스 일어났다. 눈은 반쯤 감은 상태로 비척비척 걸었지만, 거동은 스스로 하고 있었다.
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손을 씻고 나와 정하진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그와 몇 마디 나눈 지수가 비척비척 거실 전면 창으로 다가가 멍한 시선으로 창밖을 응시하다 이내 눈을 감고 창문에 이마를 댄다.
그리곤 대략 3분 정도 지난 후 눈을 뜨더니 당황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쭈그리고 앉아 포포를 향해 말을 걸었다. 바로 조금 전 모습이었다. 기억에 없는 장면을 모두 확인한 지수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이거 무슨…… 정신 조종당하는 것도 아니고…….’
셔틀에서 내리자마자 차디찬 겨울바람을 맞았으면 정신이 번쩍 들었을 테니, 어렴풋이라도 기억이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지수의 기억은 셔틀에서 잠든 이후 뚝- 끊겨 있었다. 누가 봐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저번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으니,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정하진에겐 미리 말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차였다. 마침 가까이 다가와 거실 낮은 테이블에 머그잔을 내려 둔 정하진이 소파에 앉으며 이리 오라는 듯 눈짓했다.
타박타박 걸어간 지수가 정하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타 준 코코아를 마시자 전신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몇 모금 더 조심스럽게 마신 지수는 머그잔을 감싸 무릎에 올려 둔 채 입을 열었다.
“정하진 에스퍼.”
“예.”
“제가 기억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셔틀에서 잠든 후부터 조금 전까지 기억이 뚝 끊겼더라고요.”
“잠든 이후부터 말입니까?”
“네. 포포가 24시간 영상을 녹화하고 있어서 쭉 확인해 봤는데, 이 집에 들어오면서 정하진 에스퍼랑 이야기도 나눈 것 같던데, 전혀 기억에 없어요.”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들은 정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가이딩 조절 약으로 인한 부작용 중 하나입니다. 단기 기억 상실이나, 기면증 같은 증상이 가장 흔하다고 하더군요.”
“아, 진짜요? 저도 부작용 설명은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내용은 기억에 없네요…….”
사실 기억이 안 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지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김현아에게 설명을 듣긴 했지만, 의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대부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우울했던 상황을 떠올리고 있자니 입매가 살짝 굳었다. 지수의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챈 정하진이 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그 외에도 멀미 증상이나 갑작스러운 현기증이 일어나는 경우도 꽤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욕 중엔 조심해야 합니다. 될 수 있으면 입욕 대신 샤워를 권했던 것도 이런 이유였습니다.”
“아…….”
정하진의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 덕분인지, 담담한 반응 덕분인지 마음속에 불쑥 솟아오르려던 걱정이 사그라들었다. 단순히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라면 제가 우려한 만큼 큰일은 아니었다. 마음 편해진 지수와 달리 정하진은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약을 바꿀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가이딩을 차단할 수 있는 약은 현재 복용 중인 약 외에는 없습니다. 대신 제가 항시 곁에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괜찮아요. 옛날에도 비슷한 부작용이 있었거든요. 그땐 수면제 먹을 때였는데, 자기 전에 기억이 비었어요. 아마 제가 정신력이 좀 약해서 그런가 봐요.”
“이건 한지수 가이드가 약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약 부작용이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겐 일어나고 누군가에겐 일어나지 않죠. 단순히 체질의 문제일 뿐입니다.”
네 탓이 아니라는 확고한 대답을 들은 지수가 흐리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재윤이 형도 딱 저렇게 말했는데…….’
대격변 이후 세상이 안정되긴 했지만, 트라우마가 극심했던 지수는 대부분의 생존자처럼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육체가 아무리 피곤해도 잠들지 못했고, 겨우 잠들었다 쳐도 바람 소리나 기타 작은 소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곤 했다. 매일 꾸는 끔찍한 악몽은 덤이었다.
혼자 고생한 거면 모르겠지만, 지수의 곁엔 당연하게도 강재윤이 있었다. 저가 오밤중에 비명을 지르며 발작하듯 일어나면 강재윤과 토토도 잠을 설치며 일어났고, 놀라 벌벌 떠는 지수를 진정시켜 주며 다시 재우는 일이 하루에 몇 번이나 반복됐었다.
사람이 잠을 제대로 못 자면 미친다는 소리가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라는 걸 몸으로 체험했던 시기였다. 그런 와중이었으니 별다른 기대 없이 처방받아 먹었던 약이 발휘한 효과가 실로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꾸던 악몽도 꾸지 않았고, 깊은 잠에 빠져서 자다가 발작하며 깰 일도 없었다.
덕분에 지수는 꽤 긴 기간 약을 복용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성이 생겨 복용량을 늘려 가는 것을 눈치챈 강재윤이 억지로 끊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계속 먹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도 부작용이 심각했지…….’
당시 강재윤이 약을 끊게 했던 이유는 지수의 기억에 공백이 자주 생겼기 때문이었다. 지수는 자기가 약을 먹고 바로 잠들었다고 기억했지만, 수면제를 복용하면 한두 시간 정도 깬 상태로 기억에 없는 일을 저지르고 다녔다.
일이라고 해 봤자 대부분 강재윤과 대화하다 잠들거나, 강재윤이 없는 날엔 전화를 걸어 잠들 때까지 통화하는 정도였지만 이 시간이 전부 기억에 남지 않았다는 건 큰 문제였다. 심지어 어떤 날은 야식을 주문해 먹기도 하고 토토와 무아지경으로 놀다가 거실에서 기절하듯 잠든 적도 많았다.
지수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걸 눈치챈 강재윤은 지수의 수면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꽤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했다. 당연하게도 약에 익숙해진 몸은 다른 치료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두 사람은 이 문제로 생각보다 오랜 시간 고생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지수가 극복할 수 있었던 건 강재윤이 늘 제 편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치료 센터를 다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약을 찾으려는 제 모습에 자괴감을 느낀 지수가 홀로 웅크리고 있으면 강재윤은 늘 네 잘못이 아니라고 또박또박 단호하게 말해 주었다.
이건 절대 네가 약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약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고. 애초에 쉽게 의존하게 되고, 중독될 수밖에 없는 성분인데 그게 어떻게 네 잘못이겠냐고 말이다.
‘뇌도 참 제멋대로네…….’
이 기억은 3년도 더 된 기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강재윤의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제 볼을 쓰다듬어 주는 다정한 손길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바로 조금 전의 일은 뭉텅이로 잃어버렸으면서 말이다.
“한지수 가이드.”
아 맞다, 나 이 사람하고 대화 중이었지.
잠시 상념에 빠졌던 지수가 천천히 정하진을 바라봤다. 저를 향한 정하진의 눈빛에 숨길 수 없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많이 걱정됩니까?”
“아, 잠시 다른 기억이 나서…… 죄송해요. 대화 도중에.”
“아닙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래도 혹시 다른 치료 방식을 알아보고 싶으시다면 최성훈 교수님께 연락드려 보겠습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정하진 에스퍼도 있고 토토도 있으니까요. 아, 그리고 이제 포포도 있으니까 혹시 기억이 안 나는 구간이 있으면 영상으로 확인도 할 수 있고요.”
그 말에 내내 얌전히 있던 토토가 지수의 목덜미에 몸을 비비며 작게 울었다. 내가 네 곁에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포포 역시 쓰윽 다가와 지수의 무릎에 은근히 몸을 기댔다. 지수는 포포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고, 어깨 위의 토토도 쓰다듬어 주며 애써 미소 지었다.
‘약을 안 먹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약물 치료를 거부하면 최성훈 교수는 정신계 스킬 치료를 권할 게 분명했다. 괜히 고집부려 뇌를 달구다가 또 수면 치료나 세뇌받고 답답하게 사느니, 약간의 기억 상실을 감수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지수가 미련 없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여기는 정하진 에스퍼의 대전 집인가요?”
“예. 바로 길 건너에 동생이 입원한 병원이 있어 계약한 집입니다.”
“그렇구나……. 아, 좀 아까 집에 들어오면서 정하진 에스퍼랑 대화도 한 것 같은데, 제가 무슨 이야기 했나요?”
“내일 오전에 함께 하율이를 보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꼭 가고 싶었다는 유명한 빵집도 가기로 했습니다.”
“유명한 빵집…….”
기억이 끊겼던 구간을 영상으로 확인했을 때 정하진과 나눈 대화는 딱히 길지 않았다. 단순히 몇 마디 주고받은 그 짧은 찰나에 빵집 이야기까지 꺼냈다니…… 대격변 전부터 대전의 명물 빵집은 가 보고 싶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지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또 다른 이야기는 안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