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터지는 게 낫지 2
상공에 나타난 던전은 공략에 실패하거나 공략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일정 시간이 지나 폭발하며 소멸하곤 했다. 하지만 걱정거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상공 던전이라고 해서 꼭 100% 폭발하며 소멸하는 게 아니니까.
극소수지만 상공 던전이 터지면서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켜 던전 안의 몬스터가 쏟아져 나온 사례도 분명 존재했다.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면 주변에서 대기하던 각성자들이나 몬스터 살상용으로 개발된 신무기를 다루는 특수 기동대에서 처리하긴 하지만, 문제는 이 던전의 등급이었다. S급 몬스터가 다수 쏟아져 나온다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
놀란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정하진이 평소와 같은 얼굴로 말했다.
“상공 던전이니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늘 그랬던 것처럼 터지고 끝날 겁니다.”
확신 가득한 저음의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지만, 저 목소리만 들으면 꼭 그리될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정하진의 말 역시 100% 확신을 담은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적도 있잖아요?”
“예. 하지만 정말 드문 경우였죠. 만에 하나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다 해도 몇 년 전처럼 큰 피해는 없을 겁니다. 신무기는 계속해서 개발되고 있으니까요.”
정하진은 이번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마치 아무 걱정할 것 없다는 듯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걱정이 사그라드는 것 같기도 했다.
몬스터 대용으로 만들어진 각 속성별 신무기.
사실 지수는 말만 들어 봤지, 사용하는 걸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작년에 새로 개발된 무기의 성능을 테스트한다고 던전 안에서 각성자들이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그 결과가 어땠는지까지는 생각해 보니 자세히 들은 적이 없었다. 그저 ‘A급 던전에서 신무기 성능 테스트 진행, 성능 기대치 이상’이라는 제목의 뉴스만 봤을 뿐이다.
실제 성능이 어떤지 몰라도 정말 현존하는 무기들로 괜찮은 걸까? 몬스터 웨이브를 그리 쉽게 감당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니, 김현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물론 대부분 범위 공격용 무기라 주변 일대 피해는 가볍지 않겠지만, 몬스터 처리만큼은 괜찮을 거야. 애초에 대격변 이후 인간도 손 놓고 놀고만 있던 건 아니거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말에 차분하게 듣던 조슈아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끼어들었다.
“탄도 미사일로 개발된 신무기도 많습니다. 위험해지면 동맹국도 도울 겁니다. 반드시. 이젠 서로 돕지 않고 살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바티칸도 신성력 무기가 많습니다.”
“아…….”
지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슈아의 말을 경청했다. 정말 신이 이 땅에 내려 준 천사가 아닌가 싶은 외모와 목소리도 그렇지만, 그를 감싸고 있는 기운만으로도 그에게 집중하기에 충분했다. 정하진이 주는 느낌과는 결이 다르지만, 이 사람은 믿어도 되겠다는 확고한 신뢰감이 샘솟게 하는 그런 기운이었다.
‘바티칸 에스퍼들 기운이 왜 성스럽다고 하는지 알겠어.’
실로 범상치 않은 기운이었다. 본래 S급의 강력한 기운에는 민간인이나 등급 낮은 각성자들이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불안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조슈아의 기운은 오히려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고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마치 어서 이리 오라는 듯이, 내가 너를 품어 주고 사랑해 주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 어떤 조건 없이 퍼붓는 애정과 같은 충만한 기운…….
단지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맑고 청량한 기운이 전신을 감쌌다. 그 덕분일까? 기분 탓인지 몰라도 늘 찌뿌둥했던 몸 상태가 확 좋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욱신거리던 종아리에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고, 늘 긴장한 듯이 미묘하게 뻐근했던 미간과 관자놀이도 편해졌다.
‘언제 이런 상쾌한 기분을 느껴 본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비교적 최근이었던 것 같은데? 당장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지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정신이 맑아지고, 제 몸에 들러붙은 온갖 부정한 것들이 사라지는 홀가분함이 너무나도 큰 만족감을 주어 현재에 집중하고 싶었다. 지금은 그저 이 남자의 곁에 있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지수를 향해 고개 돌린 조슈아 역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눈을 맞춰 올 뿐이었다. 마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는 듯이. 저 자애로운 눈빛을 보고 있자니 조슈아에게 더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마구 솟구쳤다.
풀린 눈으로 조슈아를 멍하게 바라보는 지수를 지켜보던 신지원은 피식 웃었고, 정하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토토의 엉덩이를 손가락으로 툭 치며 앞으로 밀었다.
“쮜잇!?”
거실에 나온 이후 내내 정하진을 노려보던 토토가 고개를 돌렸다가 털을 펑 부풀렸다. 맞은편에 앉은 제 집사가 초점 없는 눈동자로 조슈아만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토토의 눈에도 퍽 이상하게 보인 탓이었다. 마치 정신계 스킬이라도 걸린 것처럼 멍하니 있다가 조슈아와 눈이 마주치니 헤벌쭉 웃는 모습이…….
“와, 얘 진짜 얼빠졌네. 사진 찍어 두고 싶다.”
“그만둬. 한지수 가이드 상처받는다.”
김현아와 정하진이 한마디씩 하니, 상체를 아예 앞으로 빼고 구경하던 신지원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와, 우리 지수 어떡하냐, 진짜. 얜 정신계 방어 아이템도 있으면서…… 아, 현혹은 방어 못하나? 음? 그것도 정신계니까 방어할 수 있을 텐데?”
그러자 이번엔 조슈아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한지수 가이드를 현혹하지 않았습니다. 컨디션이 나빠 보여서 그를 위해 축복의 기도를 했을 뿐입니다. 한지수 가이드는 제 축복의 기운을 느낀 것 같습니다. 진심을 담았으니까요.”
그 말에 김현아가 킬킬 웃으며 그런 것치고 너무 과하게 현혹된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조슈아도 내심 그 말에 공감했다. 아무리 비각성자나 다름없는 가이드라고 해도 이 정도 반응이면 과한 편이었다.
한지수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 점을 고려해도 S급 에스퍼의 기운을 거부감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확실히 이만큼 무방비한 상태면 곁을 지킬 사람을 붙일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SS급 에스퍼 정하진이 곁을 지키는 건 조금, 아니, 굉장히 과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게다가 한지수 가이드를 신경 쓰는 건 이들뿐만이 아니지…….’
눈앞에 둥둥 떠 있는 반투명한 상태 창을 흘긋 본 조슈아는 별다른 말 없이 축복의 기운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앞으로 관계를 다져 나갈 김현아 에스퍼가 아끼는 이라면 저 역시 우호적으로 대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보다 짙어진 신성력에 취하다시피 홀린 지수가 무의식중에 조슈아를 향해 몸을 기울이려는 찰나, 불만스레 그 광경을 지켜보던 토토가 더 참지 못하고 힘차게 점프했다.
“쮜이이잇!!”
“……!!”
타깃은 한지수가 아닌 조슈아였다. 토토는 정하진에게 했던 것처럼 앞발을 휘두르는 대신 조슈아의 안면에 찰싹 붙었다. 흡사 날다람쥐 같은 움직임이었다.
“쮜잇!”
“걱정했군요, 귀여운 햄스터. 미안합니다. 하지만 정말 기도와 축복만 했습니다.”
“쮝! 쮯! 쮜익!”
“알겠습니다. 그만하겠습니다.”
스킬을 거둔 조슈아가 제 안면에 붙은 토토의 등을 토닥인 순간, 멍하니 있던 지수가 흠칫하더니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어째서인지 조슈아의 얼굴에 붙어 있는 토토의 푸짐한 뒷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실실 웃고 있는 김현아와 유감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의 정하진이, 뒤에는 고개 숙여 입을 틀어막은 채 큭큭 웃고 있는 신지원이 보였다.
“…….”
지수의 눈동자가 눈에 보일 정도로 흔들렸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을 때, 끕끕거리며 웃음을 참던 신지원이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큽, 조슈아 에스퍼 축복이 좀 심하게 홀리하더라고. 지수한텐 좀 과하게 좋았나 보네.”
“으으…….”
그냥 지금이라도 망각 스킬을 받으러 갈까…….
* * *
이마가 차가웠다. 정수리까지 얼얼할 정도로.
‘차가워…….’
이마가 왜 시린 건지 이유를 몰라 갸웃한 지수는 코앞에 비친 반투명한 제 얼굴을 보고 “아…….” 하고 탄식했다. 내내 이마를 대고 있던 창에서 고개를 떼고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풍경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현아 일행과 인사를 나누고, 대전으로 향하는 평화 길드 셔틀에서 졸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낯선 거실 창가에 서 있었다.
“…….”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이마가 너무 차가웠고, 곁엔 토토와 포포도 있었다. 포포의 정수리 위에서 물끄러미 집사를 바라보던 토토가 두 발로 서서 앞발을 뻗었다. 저 귀여운 행동이 뜻하는 바를 쉽게 이해한 지수가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으로 올라선 토토가 팔을 타고 와다닥 올라와 어깨에 토실한 엉덩이로 자리를 잡는 감각이 선명했다. 확실히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주변을 살핀 지수의 시선이 다시 창으로 향했다. 밖은 이미 캄캄했는데 길 건너 조명을 밝게 켜 둔 종합 병원이 보였다.
“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