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터지는 게 낫지 1
약간이라곤 해도, 한지수가 자기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하는 건 실로 기꺼운 일이자 정하진이 바라던 바였다.
정하진이 아는 한지수라는 사람은 온전히 제 곁을 내주는 이는 아니었다. 겉보기엔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도 막상 들여다보면 자기가 그어 둔 선 안으로 들어온 소수의 몇몇 사람을 제외한 타인과 늘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타입이었다. 그런 한지수가 단기간에 저를 덜 부담스럽게 여기게 된 것만 해도 큰 발전이었다.
정하진의 기쁜 속내를 모르는 한지수는 제 궁금함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정리하듯 뜸을 들였다. 이런 부분도 어느새 익숙해진 건지 정하진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토토를 열정적으로 쓰다듬던 지수가 다시 입을 연 건 1분 정도 지나서였다.
“아까 던전에서 반지 스킬을 사용했는데, 메시지가 평소랑 달랐어요.”
“어떻게 달랐습니까?”
“평소에는 타겟을 찾을 수 없다고 나왔는데, 아까 던전에선 타겟의 위치가 정의되지 않아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고 나오더라고요.”
“그렇군요. 혹시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습니까?”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되묻자, 한지수는 토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우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뇨, 전혀요. 정의되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겠어서 후원자 안식의 신에게 일단 물어봤는데, 답이 없네요. 바쁜가 봐요.”
지수의 실망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정하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실망할 것 없습니다. 안식의 신은 원래 바쁜 후원자 중 하나입니다.”
“음, 네……. 어, 그래서 말인데요. 무리한 부탁일 수 있는데…….”
“예.”
“……음, 혹시 나중에…… 측정 불가 던전이 생기면……. 거기도 들어가 보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그땐 제가 성하진 신분으로 함께 입장하겠습니다.”
“……!”
내심 거절당할 거라 여기고 있었는지, 대답을 들은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반응을 본 정하진은 어려운 것 없는 일이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한지수 가이드가 원하는 던전이라면 어디든 동행하겠습니다. 그런데……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저도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 네. 뭔데요?”
“저 없이 혼자 던전에 몰래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참고로 한지수 가이드가 꼭 그럴 거라 여겨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뒤에 덧붙인 말 덕분에 오히려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이 훅 가늘어졌다. 한지수는 게슴츠레 좁아진 눈에 불신 가득한 눈빛을 띠고 대답했다.
“정하진 에스퍼가 저랑 같이 입장해 준다고 하셨는데, 굳이 몰래 갈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도 약속해 주시면 제 마음이 조금 편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 평소답지 않게 살짝 장난스러운 투로 은근히 약속을 종용하자 지수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표정만 봐도 ‘당신! 꼭 내가 사고 칠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라는 마음이 드러나 퍽 억울해 보였다. 졸지에 말썽꾸러기 취급당한 지수가 입술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약속할게요. 절대 몰래 던전에 혼자 가지 않을게요. 됐죠?”
“예. 그거면 됩니다.”
약속을 받아 낸 정하진의 눈매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마치 미소 짓는 것처럼.
그와 눈을 맞추고 있던 지수는 푸른 눈동자에 어린 다정함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걸까? 이상한 일이었다. 저 눈동자가 담고 있는 것이 뭔지 정확힌 몰라도, 확실한 건 상냥함과 배려보단 조금 더 사적이고, 깊은 감정이 담긴 듯한 눈빛이라는 것이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눈빛. 그 시선을 마주하니 옆에 나란히 누워 제게 저런 눈빛을 보내던 이가 떠오르는 건 너무도 당연해서, 지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살짝 내리며 눈을 내리떴다. 정하진은 지수의 반응을 보고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 세 사람은 곧 각성자 협회로 갈 것 같습니다.”
“음, 그럼 저희도 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어요.”
“현아가 이 집을 이용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아니면 다른 지역 평화 길드 기숙사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으니, 한지수 가이드가 편한 쪽으로 따르겠습니다.”
“아…….”
김현아가 평소 이 집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다른 이의 집에 머무는 게 편할 리는 없었다. 정하진 말대로 경기도 길드 기숙사를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지수는 기숙사보다 조금 더 개인적인 곳을 떠올렸다.
“음, 정하진 에스퍼. 그러지 말고 그냥…… 대전으로 갈까요?”
“대전 말입니까?”
“네, 동생분 계신 곳에서 지내면 더 좋지 않을까 해서요.”
“…….”
조심스럽게 물은 지수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정하진은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직전처럼 다정한 시선으로 물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굳이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가서 동생분도 만나고 그래요. 저 때문에 동생분께 못 간 지 오래됐잖아요.”
이는 지수가 내심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이었다. 평소 정하진의 일정이 어떤지 그와 친분이 없는 사람들조차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로 투명하게 공개된 탓이었다. 그는 늘 던전 공략 아니면 김현아나 정하영과 만남, 그 외에 모든 시간을 동생이 입원한 병원에서 보낸다고 했다.
시민들이 SNS에 올리는 목격담이나 각성자를 주제로 다루는 너튜버들 사이에 몇 번이고 나온 이야기고, 언론에서도 다룬 이야기다 보니 사실 모르는 게 더 어려웠다.
정하진은 지수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한 듯이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하진이 가까이 다가온 것도 아닌데, 이상할 만큼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진 기분이었다.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오직 저만을 담은 깊은 눈동자 때문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를 마주하기가 어색했다. 가슴 주변이 조금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딱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고 있는 지수에게 정하진의 큰 손이 천천히 뻗어 왔다. 느리게 다가온 손은 아까부터 지수의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넘겨 주었다. 어중간한 길이라 어차피 또 흘러내릴 게 분명해 방치하고 있던 앞머리였다.
‘슬슬 머리도 다듬어야겠네.’
지수가 고맙다고 말하려던 찰나. 내내 얌전히 있던 토토가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정하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쮜잇!”
“……!?”
힘을 실어 점프한 토토가 정하진의 큰 가슴에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탄력 좋은 가슴에 폭 박혔다가 반동으로 나동그라지고도 벌떡 일어나더니, 이번엔 야무지게 몸통을 등반해 옷깃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앞발로 너른 가슴을 찰싹찰싹 때리기 시작했다.
“토토야?! 갑자기 왜 그래! 죄, 죄송해요, 정하진 에스퍼. 토토야, 아빠한테 와.”
“쮜이잇-!”
찰싹찰싹!
난데없는 일방적 폭행이었다. 토토의 돌발 행동에 식겁한 지수가 말리려는 찰나, 손을 내저은 정하진이 가슴에 토토를 달고 일어나 앉았다.
“토토가 저를 편히 생각해서 장난치는 것 같습니다. 괜찮으니 쉬고 계시죠. 현아에게 말 전하고 오겠습니다.”
“아, 저기…….”
“쮜에엑!!!”
‘토토는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정하진은 침대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지수를 향해 걱정하지 말라고 덧붙인 후 토토를 달고 방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살짝 열린 문틈 새로 토토를 부추기는 김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후엔 거실에 모인 사람들끼리 대화가 오갔는데,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진 않아도 진중한 이야기 같았다.
그대로 몇 분이 흘렀다.
지수는 저들의 이야기에 끼어도 될지 몰라 되도록 방에 있으려 했지만, 중간중간 토토의 노성과 김현아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걱정스러운 마음에 결국 일어났다. 아직 욱신욱신 아픈 다리를 이끌고 절뚝거리며 방을 나서자 거실에 앉아 있던 이들의 시선이 지수에게 쏠렸다.
“어, 지수야. 조금 더 쉬지 않아도 괜찮겠어?”
“응, 나도 들어도 되는 거면 여기 앉아 있을게.”
“당연히 되지. 이리 와.”
김현아가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지수가 김현아와 정하진 사이에 앉으려는 순간, 아직도 정하진에게 매달려 앞발질하던 토토가 흠칫하더니 폴짝 뛰어내려 두 사람 사이에 앉았다.
“어, 토토야. 토토가 거기 앉고 싶어?”
“쮜!”
“알았어. 그럼 아빠 여기 앉을게. 대신 얌전히 있어야 해?”
“쮜이~!”
토토가 자리를 차지한 덕분에 지수는 맞은편 신지원과 조슈아 사이에 앉았다. 반듯하게 앉아 있던 조슈아와 달리 신지원은 소파 팔걸이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고 있던 터라 지수가 편하도록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뭐, 하던 이야기 계속하자면. 일단 플레임 길드는 공략하지 않기로 했어. 정하진 에스퍼는 바로 대전으로 가시나요?”
“예. 셔틀이 도착하는 대로 떠날 예정입니다.”
“흠, 그럼 평화 길드는?”
질문을 받은 김현아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공략은 무슨, 저건 못 해. 건물이야 다시 지으면 되니 터지게 둬야지, 뭐. 건물주들 생각은 다르겠지만.”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조슈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는 평화 길드의 초대로 한국에 잠시 방문한 손님이니 공략에 참여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같았다. 모두의 반응을 들은 지수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토토를 바라봤다.
‘그럼 던전엔 더 안 들어간다는 거구나……. 다행이다.’
내심 던전을 공략한다고 할까 봐 신경 쓰였는데, 방치한다니 좋은 선택이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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