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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79화 (79/172)

#079.

안 돼. 돌아가. 8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김현아는 재촉하지 않았다. 제 질문을 들은 순간 그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찔거린 걸 봤으니까. 100% 확신하고 던진 말도 아니었건만, 정하진과 오래 알고 지낸 김현아로서는 이미 대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추가로 그간 추측만 했던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에도 확신이 생겼다.

‘피 토했단 소리 들었을 때부터 그럴 것 같더라니, 역시 맹약인가 보네. 그것도 생각보다 높은 등급.’

한 마디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지금껏 정하진이 보인 엄청나게 운 좋은 행보만 봐도 견적이 나왔다. 맹약의 이행으로 후원자에게 미래 언질을 받은 것이라면, 묶여 있는 맹약을 어겼을 때 받을 페널티는 아마도 사망일 확률이 높았다. 저 정도로 큰 대가를 받는다면 걸어야 하는 것도 큰 법이었으니까.

김현아는 궁금한 게 많았다. 허구한 날 시간이 남을 때마다 동생 정하율 곁에 머무르던 정하진이 왜 갑자기 동생은 뒤로한 채 한지수에게만 집중하는 건지, 악마종이 강재윤으로 변한 이유가 뭔지, 그리고 강재윤이 던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유를 알고 있는지 등등…….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강재윤의 생사가 가장 궁금했다. 강재윤이 진짜 죽은 건지, 아니면 요즘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이야기처럼 던전 안에 갇힌 건지 말이다.

하지만 정하진이 맹약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이상, 이건 쉽게 물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다가 제 질문을 들은 정하진이 평정심을 잃고 허용치 이상의 반응을 보일 경우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김현아는 더 묻는 대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 그래도 나름 이 바닥에서 5년 굴렀다고 대충 견적 나오네.”

“…….”

“에휴……. 더 안 물을게. 나중에 오빠가 말할 수 있을 때 말해 줘.”

네 상황은 대충 눈치챘으니, 묶인 제약이 사라지는 날에 알려 달라는 말이었다. 이를 기민하게 이해한 정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맙다. 꼭 그럴게.”

“뭘. 근데, 쟤 옆엔 얼마나 더 붙어 있을 거야?”

“가능하면 오래.”

“흠~ 앞으로도 계속 붙어 있을 거라면 어느 정도 그럴싸한 핑계가 필요할걸?”

“…….”

“SS급 에스퍼가 별 이유 없이 자기한테만 붙어 있으려고 하면, 아무리 무던한 애라도 다른 이유가 있다고 의심할 거야. 쟤가 귀찮은 건 싫어하는 애라 포기가 빠르긴 한데, 또 자기가 마음먹은 건 엄청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거든.”

그 말에 정하진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알고 있어. 명분을 만들라는 거지?”

“어. 그럴싸한 명분이 없으면 쟤 분명 의심한다? 아, 그리고 지수는 거짓말하는 사람 진짜 싫어하거든. 우유부단해 보여도 끊는 건 또 칼 같은 애라……. 하여간에 꼭 붙어 있어야 하는 사정이면 휴식기 핑계 말고 그럴싸한 명분 하나 만들어서 철저하게 속여. 안 그러면 자기가 납득할 때까지 물어볼 테니까.”

“음…….”

“아, 그리고 이건 혹시나 하는 소린데, 러비스 팬이었다~ 뭐 이런 핑계는 절대 대지 마. 안 믿을 테니까. 물론 오빠가 그 정도로 일차원적인 핑계는 안 대겠지만.”

“…….”

그거 이미 댔는데…….

하지만 정하진은 굳이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김현아에게 100% 놀림당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래서 내색하는 대신 괜히 진지하게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며 말했다.

“적당한 핑계를 생각해야겠군.”

“그래. 일단 나가자. 조슈아 에스퍼랑 신지원 길드장이랑 던전 내부에서 본 건 발설하지 않기로 계약서 하나씩 쓰는 게 낫겠지? 저쪽도 지금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 말에 정하진은 고맙다는 말 대신 제 인벤토리에서 SS급 기밀 유지 계약서를 네 장 꺼내 내밀었고, 김현아는 예의상 거절도 없이 냉큼 받아 먼저 방을 나갔다. 김현아가 나간 후, 정하진은 그답지 않게 멍하니 반쯤 열린 문을 바라봤다.

김현아 말대로 대격변 후 에스퍼 경력 5년이면 대충 반응만 봐도 뭔가 켕기는 게 있거나 맹약을 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저도 김현아나 정하영에게는 어느 정도 선에서 내색하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울컥해 과하게 내색하려던 날엔 피를 토했지만, 덕분에 유연하게 넘어가지 않았는가.

고생했어도 그날의 울컥함, ……아니. 그날의 과감한 선택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 일이 없었더라면 제 의뭉스러운 상태가 김현아의 귀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거고, 더 늦게 특이점을 눈치챘을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럼 더 집요하게 물어뜯겼겠지…….’

김현아는 한지수가 집요한 구석이 있다고 말했지만, 정하진은 한동안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을 한지수보다 김현아가 훨씬 무서웠다.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상대를 쥐어짜는 건 김현아의 특기였고, 그렇게 시달리기 시작하면 아무리 정하진이라도 견디기 힘들었다.

-오빠……. 나랑…… 약속해 주라……, 부탁할게…….

정하진은 문득 오래전 김현아가 그렇게 제게서 쥐어짜 냈던 불공정 계약을 떠올렸다.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던 대재앙의 날. 곧 죽을 것처럼 피를 울컥 토하는 와중에도 김현아는 평화 길드 길드장과 부길드장을 걱정했었다. 두 아들은 오래전에 먼저 떠나보내고 이제 자식이라곤 저 하나 남은 제 부모님을 정하진에게 부탁할 정도로 말이다.

그때의 김현아를 떠올리고 있으니 자연스레 다른 이들도 줄줄 떠올랐다. 저 멀리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하는 정하영, 제 품에 안긴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막내 정하율, 나름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다른 에스퍼와 힐러들, 발에 챌 정도로 바닥에 널린 수많은 민간인.

서울 중심 고층 빌딩이 전부 반토막 나거나 아예 무너지고,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는 와중에 텅 빈 공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강재윤…….

“…….”

불바다가 된 서울. 저들 힘만으론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를 상대해야 했던 절망감.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타개할 힘을 가졌으면서도 지킬 가치가 없는 세상이라는 소리나 지껄이며 손 놓고 있던 이에 대한 분노와 극심하게 끓어오르는 혐오감…….

떠올리기 싫은 과거를 생각해서인지 골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사로잡히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다는 생각에 신경을 돌리려 마음먹은 순간, 거실에서 김현아가 신지원과 조슈아에게 비밀 유지 계약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저 세 사람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들숨에 산소가 충분히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속이 갑갑했지만, 정하진은 알고 있었다. 이 답답함은 실제가 아니라 제 스트레스에서 오는 반응이라는 것을.

이럴 땐 뭐라도 하는 게 좋다는 것을 알기에 거실로 나간 정하진은 계약서 조율은 김현아에게 맡긴 채 한지수가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소리에 문을 연 정하진은 조금 전 제가 눕혀 준 자세 그대로 늘어져 있는 한지수에게 천천히 다가가 침대맡에 앉았다.

“다리는 이제 괜찮습니까?”

“네. 그냥 좀 욱신거리는 거 빼면 괜찮아요…….”

어째 툴툴대는 듯한 말투였다. 아파 죽겠다며 포션을 먹으려 할 때 정하진이 말려서 그런 것 같았다. 다 고통에 약해 쉽게 포션에 의존하려는 한지수를 위한 저지였지만, 정하진은 이를 굳이 상기하는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마사지를 좀 더 해 드릴까요?”

“……! 아,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그대로 두면 또 뭉칠 테니, 풀어 두는 게…….”

“저, 정하진 에스퍼 마사지 엄청 아프거든요! 차라리 토토한테 부탁할래요!”

다급하게 사양했으면서도 불안했는지, 지수는 정하진에게서 거리를 벌리려는 듯 옆으로 몸을 한 바퀴 굴려 멀어졌다. 완곡한 거절을 넘어 정색에 가까운 반응을 본 정하진은 눈썹을 살짝 늘어뜨리며 부러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싫어하다니…… 저 상처받습니다.”

“으헉!?”

“쮜잇?”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지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했고, 토토는 쳇바퀴를 타다 튕겨 나가 데굴데굴 구르더니 멀미라도 하는 것 같은 얼굴로 정하진을 바라봤다. 거의 토하기 직전이란 소리였다. 정하진은 토토의 미묘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울한 척, 눈치 보는 척하며 지수를 흘긋 바라봤다. 누가 봐도 끼 부리는 얼굴이었지만, 이를 알아채지 못한 지수는 그저 당황했다.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어버버 입술만 벙긋거리던 지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귀까지 새빨개져서 시선을 홱 피한 지수가 연신 헛기침하더니, 몇 초 버티지도 못하고 다시 정하진의 얼굴을 흘긋거렸다. 흔히 볼 수 없는 정하진의 침울한 표정이 은근히 마음에 든 기색이 역력했다.

“크, 큼……. 그…… 자, 장난이었어요. 상처받지 마세요.”

누가 봐도 진심이었잖아.

그래도 저 한결같은 반응을 확인한 정하진은 내심 안도했다. 한지수는 예쁘고 잘생긴 사람에게 약했고, 다행스럽게도 제 얼굴은 ‘한지수의 자체 심미 랭킹’ 상위에 들어 있었다. 과거 수많은 경험으로 이미 확인했던 부분을 이렇게 재차 확인하니 새삼스럽기도 하고,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다.

“저도 옆에 누워도 됩니까?”

“네.”

흔쾌한 허락에 옆으로 누운 정하진이 지수를 바라봤다. 중간을 토토가 막고 서서 부리부리한 눈으로 지켜보긴 했지만, 두 사람 사이 공백이 꽤 멀어서인지 딱히 제지하진 않았다. 정하진은 눈을 깜빡거리며 무언가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는 한지수를 응시하다 먼저 운을 뗐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습니까?”

“……어, 음, 네. 티 많이 났어요?”

“예. 사실 한지수 가이드는 뭐든 티가 많이 납니다.”

“솔직하시네…….”

민망했는지 살짝 투덜거리듯 말한 지수가 괜히 토토를 쓰다듬었다. 정하진은 한지수의 저런 반응이 기꺼웠다. 그만큼 저를 편히 생각해 주고 어느 정도 마음의 거리가 좁혀졌다는 뜻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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