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안 돼. 돌아가. 7
다시 악마를 응시하기 시작한 조슈아의 아름다운 얼굴은 온통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슬프다 못해 아프고, 괴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김현아는 악마들이 엄청난 속도로 부쩍 가까워진 것을 확인하고 넌지시 그를 불렀다.
“조슈아 에스퍼.”
“네.”
“나가야 합니다.”
“……네. 저것은 가짜입니다. 나는 괜찮습니다. 나는 지금 나갑니다.”
게이트를 향해 날아가면서도 조슈아는 자신이 가짜라 칭한 악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돌려 그대로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김현아는 게이트로 진입하기 직전, 다시 뒤를 돌아봤다.
던전에 남은 게 김현아뿐이라 그런지, 날아오는 악마의 모습이 전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어디 이번엔 어떤 대상으로 바뀌나 보자 싶어 잠시 게이트 앞에서 대기하던 김현아는 곧 눈을 크게 떴다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악마형 몬스터 다섯 마리가 전부 김현아가 아는 얼굴로 바뀌었다. 그것도 김현아가 가장 혐오하고, 끔찍하게 미워했던 인간들의 모습으로. 그중엔 김현아 손에 죽은 사람도 있고,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살아 있다곤 해도 현실에선 식물인간인 사람이었지만.
“와, 진짜 변신 취향 한번 X같네.”
레미니센스가 그리운 대상으로 변한다면, 저 악마는 그 반대의 성향을 지닌 것 같았다. 한마디로 꼴도 보기 싫고, 경우에 따라 죽여도 시원찮을 그런 인간으로 말이다.
게이트에 한쪽 다리만 밀어 넣은 김현아는 주변을 다시 한번 더 살폈다. 아무리 둘러봐도 임세주 에스퍼의 눈으로 봤던 끔찍하게 생긴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찝찝했다.
그래도 굳이 마주치고 싶은 존재는 아니었기에 게이트로 나가려는 찰나, 삐리릭- 하고 스캐너에서 소리가 울렸다. 범위 내 정보 스캔이 100% 완료되었다는 알림 음이었다. 스캐너를 인벤토리에 넣은 김현아는 저를 향해 돌진하는 악마들을 놀리듯 게이트로 쏙 들어갔다.
* * *
플레임 길드의 길드장 신지원은 지금, 성남시에 있는 김현아의 집 거실 소파에 앉아 ‘설탕꽃’이라고 불리는 귀한 은방울꽃을 따 먹으며 S급 아이템을 주고도 못 볼 꼴을 감상 중이었다. 정확히는 SS급 에스퍼 정하진이 S급 햄스터에게 두드려 맞으며 쩔쩔매는 모습을.
“한지수 가이드, 몸에 힘을 빼야…….”
“아흣! 아, 아파! 악! 아파요! 그렇게 세게 당기지 말아요!”
“쮜잇!”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힘을 주면 오히려 근육이 더…….”
“아악!”
“쮜잇! 쮜이잇!”
오랜 시간 업힌 탓에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서 그런지, 여의도 호텔에 도착한 한지수는 바닥을 딛기가 무섭게 그대로 쥐가 나 경련하는 종아리를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정하진의 빠른 조치로 그 순간은 넘겼으나, 호텔에서 짐과 포포를 챙겨 성남시 김현아의 집으로 온 이후 또 같은 다리에 쥐가 나 버렸다.
그것도 더 심하게…….
“끄아악!”
“쮜에엑!”
“토토. 때리지 마라. 한지수 가이드를 괴롭히는 게 아니니, 그만 얌전히……. 토토, 이러다 소파 다 무너진다.”
정하진이 지수의 종아리를 잡고 발끝을 쫙 잡아당길수록 비명은 커졌고, 토토의 앞발 펀치도 점점 강도를 더해 갔다. 토토는 저 작은 몸으로 소파가 들썩일 정도로 격하게 정하진을 패고 또 팼다. 이 정도면 평소 정하진에게 원한이라도 있던 건 아닌가 싶을 만큼 차진 펀치였다.
한술 더 떠 펭귄 로봇 포포는 주변을 맴돌며 세 사람이 저러고 있는 모습을 다각도에서 열심히 촬영하고 있었다. SS급 에스퍼를 샌드백 취급하는 토토를 감상하던 신지원은 꽃 한 줄기를 따 조슈아에게 내밀었다. 신지원의 옆에서 점잖은 얼굴로 햄스터의 일방적 폭행을 감상하던 조슈아가 조용히 꽃을 받아먹었다.
저 넷이 저러고 있길 벌써 수 분째. 신지원은 쥐에게 맞으며 쥐를 풀어 주겠다고 노력하는 정하진을 구경하다 픽 웃으며 김현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김현아는 은방울꽃을 우걱우걱 씹으며 저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딱히 토토를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저 정하진과 이야기할 때만 기다리는 맹수처럼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아까 정하영 에스퍼도 그렇고, 현아도 그렇고 다들 정하진 에스퍼한테 쌓인 게 많아 보이는데……. 정하진 에스퍼 설마 현아랑 둘이 이야기하는 게 무서워서 일부러 더 저러고 있는 건가?’
신지원이 정하진에 대해 딱히 많은 걸 아는 건 아니지만, 경련이 일어난 종아리 근육을 풀어 주는 것치고는 상당히 시간을 쏟고 있었다. 이제 적당히 풀린 것 같은데도 공들여 마사지까지 하며 김현아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는 걸 보면 어째 제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정하진과 한지수라니…….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조합이었다. 길드장이라는 위치에 있으면 원하지 않아도 온갖 정보를 접하기 마련인데, 신지원이 기억하기론 저 둘이 인연이 있다는 소린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흥미로우면서도 의외의 조합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토토가 정하진의 정수리로 올라가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저 토토랑도 친해 보이고.’
누가 들었다면 저게 정말 친해 보이냐고 되물을 법한 모습이었지만, 토토가 사람을 진심으로 패던 모습을 직관한 경험이 있는 신지원의 눈엔 어째 차진 펀치에 담긴 호감이 보이는 듯도 했다.
“좀 괜찮습니까?”
“하아……. 네…….”
“마사지라도 더 해 드릴까요?”
“아뇨, 그냥…… 지금은 안 건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어느 정도 근육을 풀어 준 정하진은 티슈를 뽑아 지수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누가 본다면 저 둘이 페어가 됐거나 연인이 된 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고도 남을 법한 모습이었다. 정하진은 그만큼 한지수에게 다정했으며, 마치 지수밖에 보이지 않는 듯이 굴었다. 거의 둘만의 세상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분위기는 김현아가 정하진을 부르며 깨졌다.
“지수야. 다 풀린 것 같으니까, 다른 방 들어가서 누워 있어. 오빤 나랑 저쪽 방에서 이야기 좀 해.”
“……한지수 가이드. 제가 없어도 괜찮겠습니까?”
저 말을 들은 신지원과 조슈아는 안 괜찮을 게 뭐 있냐는 얼굴이었지만,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자기를 좀 붙잡아 달라는 정하진의 하찮은 시도를 눈치채지 못한 지수는 정하진이 자길 걱정해서 한 소리라고 생각한 건지 힘없이 웃으며 덧붙였다.
“지원이 형이랑 조슈아 에스퍼도 같이 있잖아요. 다녀오세요.”
“……예. 그럼 방으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아, 네…….”
한지수를 안아 올린 정하진은 김현아가 가리킨 거실에서 가장 가까운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직접 한지수를 눕혀 준 그는 바로 나가지 않고 토토를 지수의 옆에 내려 주며 느릿하게 덧붙였다.
“한지수 가이드. 혹시 제가 필요하면 꼭 불러 주길 바랍니다.”
“네. 그럴게요.”
“조금만 불편해도 꼭 부르셔야 합니다.”
“네, 네……. 어서 가 보세요. 누나 기다리니까…….”
“예…….”
천천히 방을 나간 정하진이 문을 살짝 닫아 주었다. 저 과하게 친절한 남자의 어깨가 축 처진 것처럼 보인 건 아마도 기분 탓이라고 넘긴 지수는 토토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 * *
신지원과 조슈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거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손님용 침실로 정하진을 데리고 들어온 김현아는 침대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리고 죄인처럼 따라 들어온 정하진은 김현아에게서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늘 그렇듯 담담하고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김현아는 정하진이 지금 퍽 긴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왜 이렇게 긴장해? 누가 때린대? 그냥 대화나 좀 하자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든.”
“……큼. 뭐가 궁금한데?”
“가만 보니까 요즘 오빠한테 행운의 여신이 붙은 건지, 운이 아주 쩌는 것 같아서 나도 덕 좀 보려고.”
“…….”
“아, 지수 쟤는 이미 오빠 덕을 좀 봤더라? 어떻게 강재윤 집에서 물건 챙기자마자 다음 날 집이 날아가? 강재윤 집 날아가는 거 보고 나 기절할 뻔했잖아. 서울 지역 대피하라고 했더니 바로 강 건너 여의도 호텔에 가질 않나……. 근데 또 운 좋게 토네이도가 코앞에서 소멸하지 않나…….”
“…….”
“사실 얼마 전까진 별생각 없었어. 오빠가 갑자기 쉬는 동안 지수 봐 주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고. 오빠가 이유 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다 뜻이 있겠거니~ 했거든?”
“…….”
“그런데 오빠를 타겟으로 삼은 녀석이 강재윤으로 변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하더라고. 오빠가 강재윤이랑 뭐 접점이 있었어야지.”
“…….”
“조슈아 에스퍼를 타겟팅한 악마가 변한 외형은 누군지 몰라도, 저 사람 반응을 보아하니 죄책감을 느끼는 상대 같았어. 신지원 길드장이랑 나를 노린 녀석들은 개쓰레기들이라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지수를 목표로 한 녀석도 마찬가지야. 지수 쟤 생물학적 친부 혐오하잖아.”
“…….”
“걔랑 오빠 사이에 대체 뭐가 있는 거야? 오빠가 최근 들어 지수한테 갑자기 집착하는 거랑 관련 있어?”
“…….”
정하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감출 수 없는 침통함과 음울함을 담고 있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감정이 드리운 정하진의 얼굴을 응시하던 김현아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이었다.
“오빠는…… 강재윤이 그날 못 빠져나온 이유가 뭔지 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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