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안 돼. 돌아가. 6
지수는 저도 모르게 애타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발. 제발 이 처음 보는 메시지가 제발 긍정의 결과를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순간. 끊이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처럼 몸을 감싸던 마나가 순식간에 증발하더니 이내 눈에 보이던 시스템 메시지도 전부 사라졌다.
“!?”
심지어 스킬을 실패했다는 메시지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지수가 재차 스킬을 시전하려 반지를 쓰다듬었지만, 이번엔 아예 스킬 시전 창조차 뜨지 않았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이런 현상은 본 적이 없었기에 손이 벌벌 떨렸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게 느껴졌다.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싸-한 기운이 전신을 감쌌다. 침착하려 노력했지만, 혼란한 마음에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침을 꿀꺽 삼켜 낸 지수가 다시 스킬을 시전하려는 찰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 창이 떴다.
“…….”
스킬 취소 메시지를 보고 대번 실망해 창을 닫으려던 지수는 문득, 메시지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다. 원래라면 스킬이 실패했을 때 보이는 메시지는 [지정 타겟 ‘재윤이 형’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스킬 사용이 취소됩니다] 였다.
위치가 정의되지 않는다는 부분은 처음 보는 내용이었다. 지금껏 습관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스킬을 사용하다 보니 지수는 이 메시지를 전부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온 메시지는 약간 달랐다.
[지정 타겟 ‘재윤이 형’의 위치가 정의되지 않아 스킬 사용이 취소됩니다]
“이건…….”
정의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메시지였다.
‘이 던전이 특별한 건가? 어떤 던전인지 좀 보고 싶은데…….’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인 지수가 정하진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정하진 에스퍼. 지금 별다른 일 없으면 잠깐 이어폰 빼 주실 수 있어요?”
삽입형 무선 이어폰에선 도가 지나치게 흥겨운 트로트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당연히 정하진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손이 지수의 몸을 두 번 꽉 잡았다 놨다. 미리 정한 신호대로 한 번은 가능, 긍정을, 두 번은 불가능, 부정을 뜻했다. 이어 꽉 잡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추가로 톡톡- 하고 팔을 두 번 두드리는 토토의 손길이 느껴졌다.
‘뭐지, 뭐가 있나? 정하진 에스퍼는 그냥 서 있는 것 같은데…….’
던전에 들어온 이후 정하진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래서 지수는 당연히 주변에 몬스터가 없을 거라 여겼다. 지수의 예상은 정확했다. 실제로 주변엔 몬스터나 별다른 위험 요소가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지수 일행의 주변에만 없다고 해야 정확한 말이겠지만 말이다.
* * *
정식 공략팀도 아닌 데다가 사회의 시선이 닿지 않는 던전 내부이다 보니 다들 게이트 앞에서보다 훨씬 여유로워진 상태였다. 김현아가 쥔 스캔 장비의 액정을 흘긋 본 신지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침입자를 발견하고 몰려든 몬스터는 전부 동물형으로 대략 40여 마리였다. 등급은 최소 B급부터 S급. 그중 A급이 제일 많았다.
“와……. 저것들 대부분 A급 아니면 S급이네. 일단 모인 녀석 중에 제일 낮은 녀석이 B급이야.”
발아래 평지를 왔다 갔다 하며 저들을 올려다보는 몬스터를 스캔하던 김현아는 순수하게 감탄사를 뱉었고,
“내려가서 테이밍 한번 시도해 보면 안 돼? S급이 개미 떼처럼 널려 있는데……. 한 번만~ 응?”
신지원은 테이밍 스킬을 시도하기 위해 테이밍 효과를 올려 주는 소모성 아이템을 꺼냈다가 김현아에게 제지당했다. 빛나는 날개를 펄럭이며 공중에 떠 있던 조슈아는 주변을 둘러보다 곧 고개를 숙여 바닥에 우글거리는 몬스터를 내려보며 말했다.
“위험할 것 같습니다. 내려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것은 나의 의견입니다.”
“흠~ 조슈아 에스퍼 말대로 조금 위험하긴 할 것 같네요~ 아쉽네~ 현아야, 스캔 얼마나 했어? 그냥 나가기 아까운데, 근처라도 한 바퀴 둘러볼까?”
“아니. 꽤 많이 했어. 마무리되면 바로 나가자.”
일행이 입장한 균열은 땅에서 꽤 떨어진 상공에 위치해 있었다. 지상을 보며 가늠해 본 결과, 던전 밖과 거의 비슷한 높이인 것 같았다. 신지원은 넓은 초원을 가득 채운 몬스터들을 보며 혀를 찼다. 생긴 건 지구의 고양잇과 동물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크기는 사자보다 훨씬 컸다. 덩치도 좋고 등급도 높은 동물형 몬스터를 보다 보니 탐이 났다.
“으으~ 아까운데~ 저거 타고 달리면 진짜 좋을 것 같은데~”
“스캔만 하고 나갈 거니까 포기해. 거의 다 됐어. 지형은 초원, 숲, 저 멀리 열기가 감지되는 것을 봐선 화산 지형이 있을 수도 있겠네.”
“거기까진 안 나와?”
“응. 상당히 넓은 것 같아. 아직도 보스가 안 잡혀. 꽤 멀리 있나 본데…….”
스캔 진행도는 85%로 꽤 멀리까지 파악했음에도 보스 몬스터가 잡히지 않았다. 그만큼 방대한 지형을 가진 던전이라는 뜻이었다. 김현아가 들어온 김에 보스까지 체크하고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며 한숨 쉬고 있을 때, 지수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네? 정하진 에스퍼. 이어폰 잠깐만 빼면 안 돼요?”
“토토. 안 된다고 전해라.”
“쮯!”
토토가 지수의 팔을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부 S급 이상 에스퍼라 들을 수 있는 작은 두드림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신지원이 정하진을 향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정하진 에스퍼. 괜찮지 않을까요? 지수도 궁금할 것 같은데, 그리고 딱히 지수가 본다고 자극받을 만한 건 안 보이는 것 같은데요~ 어때요?”
“…….”
정하진은 신지원의 말에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재차 주변을 360도 빙~ 돌아 관찰한 후 아무리 봐도 위험해 보이는 건 없다고 말하려던 신지원은 일순 멈칫했다. 정하진이 바라보는 방향 저 멀리 작은 점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점들은 시시각각 커져 가고 있었다.
“오~ 현아야. 저기 뭐 날아오는데?”
“확인했어. 악마형 몬스터네. SS급 두 마리, S급 세 마리.”
“오호…….”
신지원이 주로 쓰는 무기인 채찍을 꺼내 꽉 쥐자 정하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갑시다.”
“음, 그래도 제대로 한번 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저것들 범위 공격도 있을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SS급이면 무시할 수 없는 현혹 스킬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 이대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현아야. 그 정도 스캔했으면 됐어.”
“음…… 그래. 나가자. 저것들 엄청 빠른데?”
“오~ 그러게, 진짜 빠른데? 혹시 한국인인가? 아니, 한국 악마?”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재치 없는 농담이었다고 말하려던 김현아는 입을 벌렸다가 황급히 다물었다. 꽤 거리가 남은 상태였음에도 SS급 에스퍼였기에 확인할 수 있었던 악마들의 이목구비가 어쩐지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X발, 장난해? 설마 저거 다 레미니센스야?”
“그건 아닌 것 같아. 저기 왼쪽에서 두 번째 악마 아무리 봐도 예전 소속사 사장 같은데~ 난 그 인간이 전혀 그립지 않거든~”
몬스터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는 탓에 금세 생김새 구분이 가능해진 신지원의 농담 같은 말을 들은 김현아는 인상을 팍 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레미니센스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모습을 바꾸는 악마인 건 확실했다. 저들을 향해 날아오는 몬스터 중 하나는 김현아가 정말로 싫어했던 삼촌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엔 신지원이 말했던 소속사 사장이 보였다.
신지원이 대격변 전까지 소속사와 재계약 문제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는 건 김현아도 알고 있었다. 추가로 소속사에서 제안한 문제 해결 방안이 꽤 지저분했다는 것 역시 저 바닥에선 유명한 이야기였다.
“오~ 옆엔 지수 닮았다.”
“그러게, 진짜 닮았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두 사람은 매우 닮았습니다.”
파렴치한 소속사 사장 옆엔 누군지 모르겠지만, 지수를 닮은 중년 남자가 보였다. 딱 봐도 지수의 친부로 추정되는 외형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순둥순둥하게 생긴 지수와 달리 상당히 성깔머리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성격 나빠 보이는 악마 옆엔 웬 외국인의 모습을 한 악마가 있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아마 조슈아가 아는 인물 같았다. 조슈아는 해당 인물을 보고 침음을 뱉더니, 이내 고개를 쓱 돌려 피했다. 아예 쳐다보기도 힘든 인물인 것 같았다. 외국인 모습을 한 악마에게서 시선을 돌린 김현아와 신지원은 거의 동시에 혀를 찼다.
“와~ 정하진 에스퍼, 감 좋네요.”
“미친…….”
마지막 악마는 한지수가 절대로 봐선 안 될 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로 강재윤이었다.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강재윤의 껍데기를 두른 악마는 맑은 회색 눈동자로 일행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먼데도 선명히 느껴지는 살기에 김현아가 짜증스레 혀를 찼다. 만약 한지수가 봤다면 까무러칠 만큼 야차 같은 표정이었다.
“……나갑시다.”
“어우, 저 인간 꼴 보기 싫어서 먼저 나갑니다~!”
신지원이 먼저 게이트를 통과해 밖으로 나갔다. 정하진은 이어폰 좀 빼 달라고 부탁하다 악마의 살기에 짓눌린 건지, 파르르 떠는 한지수를 업은 채 게이트를 통과했다. 김현아는 조슈아에게도 나가라고 말하려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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