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안 돼. 돌아가. 5
“하아……. 그럼 후딱 스캔만 하고 나옵시다. 조슈아 에스퍼. 기도할 시간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바티칸 에스퍼들이 진입하기 전 기도하는 모습을 종종 봤기에 물어본 거였지만, 조슈아는 생긋 미소 지으며 사양했다. 성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미소 때문인지 정하진의 어깨 부근에서 작게 “헉…….”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작은 소리를 눈치챈 조슈아는 은은하게 미소 짓던 얼굴을 정하진에게 돌리고 어깨 부근을 바라보며 눈을 곱게 접었다. 그러자 숨 참는 소리와 동시에 누군가를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소리가 작지만 매서운 걸로 보아 때리는 쪽이 아마도 토토인 것 같았다. 정하진의 어깨 부근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김현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예, 그럼……. 정하영 에스퍼. 저와 바티칸 소속 조슈아 에스퍼, 플레임 길드장 신지원 에스퍼, 그리고 정하진 에스퍼. 총 네 명. 미확인 던전 입장하겠습니다. 목표는 내부 지형과 등급 측정 후 빠른 귀환입니다.”
“알겠습니다. 전 여기서 대기하겠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만나죠.”
정하영의 대답을 들은 김현아와 정하진이 먼저 비행 스킬을 사용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두 사람과 달리 비행 스킬이 없는 신지원은 비행 옵션이 달린 아이템을 이용해 바닥에서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조슈아가 난간 위로 사뿐히 올라서자 방송국 드론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보고 싶겠지.’
가까워진 드론을 보고 픽 웃은 김현아가 다시 조슈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을 내리감은 조슈아가 손에 칭칭 감아 둔 은색 목걸이에 키스한 후 성호를 그은 순간. 그의 등에 한 쌍의 눈부신 빛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우와아…….”
“쮜이이…….”
“쉿.”
“……!”
“……!!”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지른 지수와 토토가 동시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이 보이진 않았지만, 대충 상상한 김현아는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준 채 조슈아를 바라봤다. 겉보기에도 성스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의 등에 빛나는 날개가 생겨났다.
‘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라더니. 저런 걸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김현아는 제 부모님과 달리 무교였지만,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세간의 평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사랑을 받는 아이.
당연히 조슈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물론 저 날개는 조슈아의 스킬이겠지만, 그가 빛의 날개를 펼치면 에스퍼의 기운이 아닌, 성역이 펼쳐진 것 같다는 얘기가 있었다. 김현아 역시 지금 그걸 느끼고 있었다.
단순한 S급 에스퍼의 기운이 아니었다. 조슈아가 제 요청으로 한국에 온 후 지금까지 쭉 함께 있었지만, 이런 기운은 처음이었다. 그가 내뿜는 기운은 청량하면서도 한없이 따뜻하고 맑았다. 주변을 보호하듯 감싸는 따스한 기운을 받으니,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이 기운이 주는 느낌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자신을 아주 사랑해 주는 존재가 제 몸을 품에 안고 보듬어 주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게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 조슈아가 내뿜는 강한 기운에 압도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안도하게 된다. 이는 김현아가 SS급 에스퍼라서가 아니었다. 신지원 역시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보이진 않지만…….
“토토. 내 어깨에 침 흘리지 마라.”
정하진의 아주 작은 속삭임과,
“쮜, 쮜잇?”
그게 무슨 소리냐며 억울하다는 듯이 반응하는 토토의 반응을 보아하니 보이지 않는 녀석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상대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누구라고 지칭하진 않겠지만,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진 걸 보니, 저 성스러운 기운에 취한 것 같았다.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온 조슈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김현아가 먼저 비행했다. 허공에 길게 늘어진 균열 앞에 도착한 김현아가 멈춰 서서 정하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의 사항 있으면 지금 말해.”
“이미 다 이야기했다. 진입 준비되셨습니까?”
정하진은 이 질문을 모두에게 하는 것처럼 앞을 보고 물었다. 다들 장단 맞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누군가는 대답 대신 정하진의 어깨를 툭 하고 한 번 두드렸다.
“그럼 제가 먼저 진입합니다.”
측정기를 꺼내 든 김현아가 먼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자~ 다음은 제가 가겠습니다~!”
씩 웃은 신지원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여유 있는 걸음으로 게이트로 들어갔다. 이어 정하진을 향해 고개 돌린 조슈아가 먼저 들어가겠다는 듯이 눈짓했다. 정하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빛의 날개를 펄럭이며 게이트로 날아 들어갔다.
빛의 날개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정하진은 여전히 뒷짐 진 채 이글거리는 시커먼 게이트 안으로 몸을 던지듯 입장했다.
* * *
정하진이 준비됐냐고 물었을 때부터 눈을 꾹 감고 있던 지수는 자신이 던전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자발적으로 시각을 차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감각이 전혀 다른 세상에 도착했다고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상공에서 느꼈던 매서운 칼바람, 소음, 서울의 공기 냄새 등 혼란스러웠던 주변이 가라앉은 자리에 낯선 공기 냄새와 따뜻한 바람이 느껴졌다. 게다가 뭔지 모를 향긋한 향기도 나는 걸 보면, 얼마 전 안식의 신 덕분에 봤던 큰 꽃밭 같은 장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했다. L급 이상 등급으로 측정 자체가 불가능한 던전은 대체 어떤 곳일까? 너무 궁금했지만, 지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까 호텔에서 나오기 전, 정하진과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토토는 보고 있겠지? 나도 보고 싶어.’
지수는 정하진에게 업혀 이곳까지 오는 내내 그와 약속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던전을 진입하기 직전에 눈을 감고, 제가 눈을 떠도 좋다고 말할 때까지 절대 뜨시면 안 됩니다.-
-네. 근데 왜요? 정하진 에스퍼는 저 던전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어요?-
-한지수 가이드는 S급 이상 던전에 입장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어……, 아뇨. 제일 높은 등급이 S급 근접했던 A+급이긴 했어요. 저도 들어가 보고 싶긴 한데, 길드에서 허락을 안 해서……. S급 이상 던전은 눈을 감고 입장해야 하는 그런 규칙이 있나요?-
-늘 그런 건 아니지만, S급 이상 던전은 악마종이 주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한 정신계 스킬을 사용하는 몬스터가 많으니 애초에 보지도 말고 듣지도 않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그건 몰랐네요. 그럼 그냥 눈만 감으면 되나요?-
-귀도 막아야 합니다. 그러니 제가 던전에 진입하기 전, 준비됐냐고 물으면 음악을 크게 재생하고 눈을 감은 후 제 어깨를 한 번 두드리는 것으로 신호합시다.-
-네…….-
-약속해 주십시오. 절대 눈을 뜨거나 음악을 끄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럴게요. 약속할게요.-
-좋습니다. 한지수 가이드를 믿겠습니다. 나머지 신호도 정해 보죠. 일단, 던전에 들어간 이후엔 뭔가 이상이 생기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한지수 가이드가 말한 내용을 듣고 이상이 없다고 판단하면 전 한지수 가이드의 몸을 한 번 꽉 잡을 것이고, 만약 제 대답을 들어야 할 상황이라면 한지수 가이드의 이어폰을 빼겠습니다. 단, 이때도 눈은 뜨시면 안 됩니다.-
-네, 알았어요. 그러니까 제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말해도, 그게 괜찮은 상황이라면 이어폰은 빼지 않는다는 뜻인 거죠?-
-예.-
“…….”
지수 입장에선 그가 저를 믿겠다고 말만 하고 따로 계약서는 작성하지 않은 게 오히려 더 부담스러웠다. 신뢰하고 있으니, 나를 실망하게 하지 말아라.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오기로라도 절대 눈을 뜨지 않고 음악도 끄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눈을 꾹 감은 지수는 확 달라진 공기에 던전에 들어온 게 확실하다고 판단해 제 손에 낀 반지를 보듬으며 스킬을 시전했다. 눈을 감은 것과 관계없이 시스템 창은 선명하게 보였다. 다만,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두 개의 창이 생성됐다는 거였다.
[지정 타겟 ‘재윤이 형’에게 이동을 시도합니다.]
[지정 타겟 ‘정하진 에스퍼’에게 이동을 시도합니다.]
“…….”
지수는 두 개의 팝업 창을 바라보다 곧 첫 번째 창을 선택했다. 그러자 또 한 번 주변 공기가 달라지는 게 확 느껴질 정도로 강한 마나의 흐름이 제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사용했을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훨씬 더 선명하고, 더 부드럽고, 더 강한 기운이 제 몸을 감싸더니 전신을 훑기 시작했다. 마치 한지수라는 존재가 뭔지 파악하려는 듯이 끈덕지게 들러붙는 기운이었다. 평소라면 벌써 실패했다는 메시지가 보이고도 남았을 시간이 흘렀음에도 강한 기운은 여전히 지수의 전신을 훑고 감싸듯 주위를 맴돌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강한 기운이 볼을 스치고 증발한 순간, 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을 뜰 뻔했다. 이상했다. 시간이 너무 지났다. 원래 이렇게 캐스팅이 지연되는 스킬이 아닌데, 마치 강재윤을 찾는 듯이 끊기지 않고 계속 시전 중이었다.
“아…….”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소리 내자 정하진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지수의 이어폰에선 요란한 트로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이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로지 몸에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을 때, 새로운 팝업 창이 떴다.
[지정 타겟 ‘재윤이 형’의 위치가 정의되지 않습니다. 위치를 재탐색합니다.]
“……!!”
그동안 수없이 많이 사용했던 스킬인데, 이 메시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용이었다. 긴장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제 집사의 상태가 이상해 보여 걱정한 것인지, 정하진의 목을 둘러 안은 팔을 톡톡 두드리는 토토의 손길이 느껴졌다. 침을 꿀꺽 삼킨 지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계속 시스템 창 메시지를 응시했다.
재탐색한다는 메시지가 흐려지더니 이내 창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창이 떠올랐는데, 직전과 똑같은 메시지였다. 창이 사라지고 생기고 반복하는 동안 마나의 흐름은 계속해서 지수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한지수와 이어진 누군가를 향해 날아가듯, 끊임없이 새로운 기운이 지수의 몸을 훑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돌아오는 기운은 없었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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