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안 돼. 돌아가. 4
종일 곧은 자세로 뒷짐 진 채 서 있던 정하진은 자꾸 흘러내리는 지수가 조금이라도 편히 업혀 있을 수 있도록 정하영에게 다가가며 은근히 자세를 고쳤다. 삽입형 이어폰으로 협회와 대화 중인 정하영은 짜증을 삭히는 중인지 양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입술을 짓씹으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뭐 하는 시늉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 놓고 있다가 터지면 그거 트집 잡히는 게 더 피곤할 텐데요? 예. 일단 정하진 에스퍼와 김현아 에스퍼는 진입해 내부 스캔만 하고 1분 안에 나오겠다고 합니다. 신지원 길드장도 들어갈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음, 예.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건지 정하영이 폐를 토할 만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정하진을 바라보며 지수를 향해 말했다.
“한지수 가이드. 잠시 귀 좀 막아 주시겠습니까?”
“네? 아, 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정하영은 한지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양심에 알아서 맡기겠다는 듯 거침없이 정하진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야, 정하진. 요즘 들어 왜 이러는 거냐 대체? 너 돌았냐?”
“…….”
“제정신이야? 아니, 대체 어쩌자고 저길 들여보내 준다는 약속을 해? 저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
“……뭐냐? 눈을 왜 그렇게 떠? 뭐 아는 거라도 있어?”
“…….”
조금은 억울한 듯한 눈빛을 띤 정하진이 대답도 못 하고 그대로 시선을 피하자 정하영은 그 침묵을 나름대로 해석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답답해 속 터지기 직전인 정하영과 달리, 정하진의 얼굴엔 일말의 걱정도 없었다. 마치 산책이나 다녀오겠다는 듯이 태연한 모습이었다.
“네 후원자가 알려 줬어?”
“……아니.”
“그럼. 어떻게 알아. 몰래 들어갔다 나온 건 아닐 테고. 이것도 대답 못 하는 거냐?”
“……사정이 있어.”
“대체 그놈의 사정은 언제 말해 줄 수 있는 건데?”
“…….”
“하, 정하진 너 진짜…… 대체 어떤 새끼랑 무슨 맹약을 한 거야…….”
“…….”
“아오, 됐다. 됐어. 그래. 말할 수 있으면 진즉 입 털었겠지.”
정하진은 제 쌍둥이의 질타에 면목 없다는 듯이 시선을 흐리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정하영은 그 모습에 더 열받는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쌍둥이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제 쌍둥이 형제가 갑자기 이상해진 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동생 정하율밖에 모르던 정하진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정하영이 정하진의 기행을 눈치챈 건 대략 올해 초쯤이었다. 그때쯤부터 뒤에서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까지 잔뜩 저지르고 다녔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정하진은 제대로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단단히 화난 정하영이 따지고 들어도 그저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외면할 뿐이었다. 그러다 하루는 저도 퍽 억울했는지, 뭔가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는데 이번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정하영에겐 오히려 그게 대답이 되었다.
정하진이 뭔가 말하려던 찰나, 목에서 나온 건 목소리가 아니라 피 한 바가지였다.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조건이 포함된 맹약의 징후였다. 대체 누구와 어떤 맹약을 했는지 몰라도 정하진이 그렇게까지 했다면 그건 꼭 해야만 했던 일이었을 거라고 믿기로 한 정하영은 그 후로 웬만한 일은 답답해도 그냥 넘겼다.
지금처럼 등급조차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해 보이는 던전에 B급 가이드를 데리고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일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그래도 저리 평온한 모습을 보니 뭔가 대책이 있겠지…… 싶었다.
“일단. 난 못 들어가. 대기하래. 근데 너랑 평화 길드가 들어간다고 하면 말리진 않겠대. 인근 기업들이 아주 개지랄 하나 봐.”
“그렇겠지.”
“하아……. 됐고. 하나만 묻자. 피 토하지 않을 만큼만 내색해. 눈치껏 알아들을 테니까.”
정하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정하영은 S급 이상이 아니면 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너랑 작별 인사 뭐 그딴 거 안 해도 되는 거 맞냐?”
“최대한 빨리 나올게.”
평소와 다름없는 무덤덤한 표정을 본 정하영이 짜증스레 혀를 찼다.
“그래. 그럼 됐어. 하아~ 진짜 너 때문에 내가 제명에 못 산다.”
툴툴대며 대답한 정하영이 제 쌍둥이의 어깨를 털어 주는 척하며 한지수를 톡톡 두드렸다.
“……어, 대화 끝났어요?”
“예. 미안합니다. 한지수 가이드.”
“아니에요. 저야말로 죄송해요…….”
괜찮다고 대답한 정하영은 김현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등을 눈으로 좇던 지수는 여전히 찝찝한 표정으로 정하진을, 정확히는 그에게 업힌 자신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김현아와 눈을 마주치자 몸을 움찔 떨었다.
지수는 저 때문에 걱정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미안해져서 괜히 정하진의 목을 더 꽉 끌어안았다. 조금 전, 정하진과 저 상공 던전에 딱 1분만 들어갔다 나오겠다고 말했을 때, 김현아는 당연하게도 절대 안 된다고, 돌아가라고 했다.
하지만 지수는 평소처럼 김현아의 말을 얌전히 따르지 않았다. 꼭 던전에 들어가서 사용해야 하는 스킬이 있다고,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스킬 결과만 확인하고 나올 테니 1분만 들어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안식의 신과 계약도 했으니 그가 지켜 줄 거라는 말도 들먹였다. 최근 그가 바빠 대답도 없다는 내용은 쏙 빼놓았지만 말이다.
김현아는 지수가 사용하려는 스킬이 뭔지 단번에 알아챈 듯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도 자세한 사정까진 몰라도 대강 어떤 스킬을 쓰려는지 예상한 듯이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강재윤이 서로에게 이동할 수 있는 소환 스킬 반지 한 쌍을 경매에서 비싸게 구매했던 것은 어지간한 각성자들이라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지의 나머지 한 짝은 한지수에게 갈 거라는 것도 말이다.
정하진에게서 시선을 돌린 김현아는 게이트화 된 균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보면 L급 이상으로 측정된 던전 진입을 두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정확히는 한지수 때문에 걱정이 앞서서 저도 모르게 오만상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온갖 커뮤니티에선 강재윤의 장례식이 너무 이른 게 아니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었다. 인터넷 뉴스도 심심치 않게 이런 주제를 다룰 정도로 분위기가 과열된 상태였다.
그중 가장 어그로를 끄는 내용은 던전에서 나오지 못한 각성자들의 장례식을 진행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나라의 경우엔 공략팀이 공략에 실패해 던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경우가 있어도 ‘실종’으로 처리하지, 한국이나 일본처럼 ‘사망’으로 처리하진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강재윤의 사건을 계기로 여태 물밑에서나 부글거리던 목소리들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또 다른 얘기로는 언젠가 같은 던전이 생기면 그들이 귀환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소리도 돌았다. 던전에 대해 정의되지 않은 게 많다 보니, 온갖 유언비어가 넘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지수의 요청을 더 적극적으로 만류할 수 없기도 했다. 혹시라도 정말로 그 실험이 성공할 가능성을 외면할 수 없었으니까.
동시에 김현아는 정하진이 계속 못 들어가게 했다가 나중에 몰래 사고 치게 두느니 차라리 한 번 들여보내 주자고 한지수 몰래 속삭였던 말을 떠올렸다. 제법 설득력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긴 했지만, 생각할수록 지금이라도 번복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래도 확실히 해 두는 게 낫겠지…….’
김현아가 아는 한지수라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굳이 파헤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게 강재윤과 연관된 부분이라면……, 단 1%의 가능성이라도 끝까지 고집을 밀고 나갈 확률이 높았다. 오늘 여기서 막는다면 물러나는 척하면서 언젠가 저와 정하진 몰래 다른 던전에라도 들어갈 녀석이었다. 그게 무모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다소 잔인한 방법이지만, 한지수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과정이라고 결론 내린 김현아는 결국 생각을 굳혔다. 지금 걱정되는 건 한지수의 멘탈이지, 저 던전이 아니었다. 아니, 조금 전만 해도 던전이 걱정되긴 했지만, 최초로 나타난 L급 이상 던전을 보면서도 걱정 없어 보이는 정하진을 보고 있자니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하긴, 괜찮다는 보장이 없으면 애초에 지수를 저기에 데려가려 하지 않겠지.’
다른 이들은 모르는 어떤 루트를 통해 이미 괜찮은 던전이라는 것을 확인했거나, 또는 후원자의 언질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김현아가 신지원과 조슈아를 향해 고개 돌렸다.
“신지원 길드장님. 정말 들어가실 겁니까?”
옆에서 조슈아와 악마형 몬스터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신지원이 생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1분도 안 걸린다면서요? 저도 좀 끼워 주세요~”
“위험할 수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만약의 경우라도…….”
“에이~ SS급 에스퍼 두 분이 지켜 주실 텐데 하나도 걱정 안 됩니다. 그리고 뭐, 뭔 일 터져도 조슈아 에스퍼께서 기도해 주실 테니, 어련히 좋은 곳 가겠죠~”
“인간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래도 외부라고 내내 예의 차리던 김현아가 저도 모르게 편히 말해 버리자, 정하진을 제외한 주변인들이 모두 피식 웃었다. 그 와중에 “쮸힛~” 하는 토토의 웃음도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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