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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74화 (74/172)

#074.

안 돼. 돌아가. 3

“…….”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부분도 이상했다. 자세한 이유는 몰라도 그들은 항상 ‘아무개 후원자가 누구에게 이렇다고 합니다.’ 정도로 말하지, 피후견인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악몽 속에선 저 메시지 이후 또 다른 시스템 메시지가 연달아 팝업됐다. 다급함이 느껴질 정도로 빠른 팝업 수십 개가 미친 듯이 쏟아지고 사라졌는데, 글자가 대부분 깨져서 내용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심지어 누가 보낸 메시지인지도 불분명했다. 확실한 건 제 후원자는 아니었다. 진보라의 후원자는 정체 모를 존재의 공격을 막아 주기 위해 쉴드를 몇 겹이나 두르느라 정신없어 보였으니까.

게이트가 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몰아치는 공격에 후원자가 만들어 준 겹겹의 쉴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공략팀은 각자 귀환석을 사용했다. 문제는 스킬은 시전되지 않고, 글자가 깨져 보이지 않는 오류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는 메시지만 팝업되었다는 점이었다. 귀환석이 사용되지 않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기에 모두 패닉에 빠졌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후원자의 직접적인 메시지. 그리고 사용할 수 없는 귀환석.

진보라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꿈이 단순한 악몽이라고 치부했던 건 저 두 가지가 컸다. 대격변을 거치며 귀환석이라는 아이템을 발견한 후, 귀환석 사용에 실패한 경우는 단 한 건도 보고된 바가 없었으니까.

악몽 속의 강재윤은 공략팀이 귀환석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걸 눈치챘는지 허공에 대고 계약을 이행하라며 누군가에게 피를 토할 듯이 소리쳤다. 그러자 그 순간, 지금껏 저들을 지켜 주던 후원자보다 훨씬 큰 힘을 가진 존재의 개입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한 쉴드가 게이트를 향한 길을 만들 듯 연이어 생겨났다. 하지만 이토록 강한 힘이 느껴지는 쉴드도 보이지 않는 공격이 닿으면 금이 쩍쩍 갔다.

“다들 뭐 해! 정신 차려! 진보라! 당장 애들 챙겨 나가!!!”

강재윤의 호통에 정신 차린 진보라는 쓰러진 힐러와 가이드를 한 명씩 양쪽 어깨에 들쳐 멨다. 그리곤 자신의 후원자와 다른 후원자들이 둘러 준 쉴드에 몸을 의탁한 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렸다.

거의 혼이 쏙 빠져나간 상태로 게이트를 통과하기 직전, 진보라는 리더를 돌아봤었다. 던전에 홀로 남은 그는 자신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진보라는 강재윤의 등을 보며 나가자마자 김현아와 다른 S급들에게 당장 지원 요청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복기하며 게이트를 나선 순간.

바다 특유의 짠 내를 맡자, 휘몰아치던 온갖 감정이 가위로 싹둑 자르듯 끊겼다. 충격과 경악, 전신을 압도하던 공포가 던전을 나옴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증발해 버린 것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왜 겁에 질려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모든 기억이 순식간에 소실되었다.

“…….”

드문드문 끊긴 악몽을 토대로 기억을 시간순으로 나열해 생각하던 진보라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 모든 것이 전부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단순한 악몽으로 치부하기가 어려웠다. 진보라는 분명하게 느꼈었다. 악몽 속에서 게이트를 통해 던전을 나간 직후 갑자기 증발해 버렸던 공포와 절망을.

나는 이 장소에서 죽는다.

나는 오늘.

나는 지금 죽을 것이다.

평온하지 않은, 강제적인 안식을 제 의지와 관계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절망감. 그건 절대 악몽으로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정신계 스킬을 받고 있는지도 조사받았는데…….’

수사 과정에서 공략팀 전원은 당연히 정신 감정도 받았다. 정신계 에스퍼의 면밀한 감정 결과 공략팀원 모두 그 어떤 세뇌도 당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진보라는 자신이 악몽을 꾸는 이유가 그저 존경하는 리더를 잃은 슬픔과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원자의 가호]

정신계 공격 스킬 및 세뇌 스킬 방어 (SS) - 재적용 중

활성화 / 비활성화 두 개의 옵션만 있는 자신의 스킬에서 처음 보는 상태인 ‘재적용 중’을 확인한 순간, 평범한 악몽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진보라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SS급 이상의 정신 세뇌를 받았다 쳐도, 그걸 해제할 수 있는 더 높은 등급의 정신계 에스퍼나 아이템이 없었으니까.

‘L급 상태 이상 해제 포션이라도 존재한다면 모를까…….’

아니, L급 포션이 있다고 해도 자신이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등급상 무척 희귀템이기도 했고, 애초에 그런 포션이 지구에 출현했다는 기록도 없었으니까.

“어으, 머리야…….”

해소되지 않고 층층이 쌓여 온 의문 탓에 스트레스가 심해졌는지, 최근 진보라는 두통약을 달고 살았다. 한 손으로 건물 벽을 짚은 진보라가 다른 손으론 제 관자놀이를 퍽퍽 때렸다. 그렇게 두통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생각이 스멀스멀 머릿속을 장악해 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진보라가 지금 가장 해결하고 싶은 것은 이 끔찍한 악몽이 정말 단순한 악몽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덜 중요하다고 여겼던 문제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한술 더 떠서 저 덜 중요한 문제들을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초조해졌다. 결국 진보라는 이 모든 흐름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악몽에 대한 생각은 기억 저편으로 미뤄 두었다.

‘아, 지금 마석 제련 맡기는 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진보라가 제 생각의 우선순위에 위화감을 느끼려는 찰나, 건물 입구에 대기 중이던 각성자 협회 소속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도 안 돼!”

“이거 거짓말이지?”

“이게 무슨 소리야, 평화 길드 제정신이야? 아니 저길 왜……, 헉, 진보라 에스퍼.”

“쿨럭! 쿨럭! 지, 진보라 에스퍼. 크흠.”

“뉴스에 뭐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나요?”

진보라가 제 길드를 욕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다가가 여상하게 묻자 안도한 두 직원이 거의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지, 진보라 에스퍼! 김현아 에스퍼와 친하시죠!?”

“……네, 일단은 제 상관이니까요?”

대격변 전부터 알고 지낸 데다가, 사적인 자리에선 언니 동생 하는 사이니 친하긴 했다. 그러나 굳이 언급하지 않고 그런 건 왜 묻냐는 듯이 눈을 크게 뜨자 두 직원 모두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외쳤다.

“제발! 제발 마포 던전 공략 포기하라고 해 주세요! 내 집 터져도 좋으니까!”

“!?”

“제 집, 아니! 마포구 다 터져도 좋으니까! 제발! 현장에 있는 각성자들 다 철수하라고 해 주세요! 어차피 공중 던전은 방치하면 폭발형으로 소멸하잖아요!? 몬스터 웨이브 아니잖아요!?”

“아니, 그건 100%는 아닌……데…….”

둘의 반응을 본 진보라는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뉴스 하단에 지나가는 속보 문구를 보고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마포구 상공 던전 게이트화 완료.

전례 없이 빠른 게이트 형성.

던전 외부 측정 시 L등급 이상으로 확인.

정확한 등급 측정 불가.

L등급 이상 던전은 세계 최초.

외부에서 지형 및 속성 측정 불가.

김현아 에스퍼와 정하진 에스퍼 직접 내부 측정 위해 선발 진입 준비 중.

내부 측정 후 공략 여부 결정 예정.

“……허어?”

* * *

“이야, TVH도 왔네.”

김현아 일행이 있는 빌딩에서 꽤 떨어진 상공엔 방송국에서 사용하는 고성능 드론 다섯 대가 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두 대였던 드론은 허리케인이 소멸한 후 더 늘어났다.

“오늘내일한다고 징징대더니, 태종대 팔아서 돈 많이 벌었나 봐.”

“현아야. 조심.”

“어엉. 알아. 알아.”

저 정도로 먼 거리라도 화면을 확대하면 입술을 깔끔하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성능 좋은 드론이었다. 현장 인원은 정하진이 원래부터 공략에 참여하기로 했던 것처럼 의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대화를 나눠야 했다. 괜한 꼬투리를 잡히면 피곤하다는 이유에서이기도 했고, 지금 이 장소에 몰래 와 있는 한지수 때문이기도 했다.

“하……. 내가 벌써 다섯 번은 말한 것 같은데, 지수야. 저거 측정 불가 던전 아니다. 근데도 꼭 들어가야겠니?”

“으응……. 그런데 누나, 진짜 균열에서 시커먼 연기 나오는 거 봤어. 정하진 에스퍼도 봤어. 그쵸? 정하진 에스퍼?”

“예.”

“태종대처럼 시커먼 연기였죠?”

“분명 새카만 연기였습니다.”

“그 연기는 나도 봤어. 근데 지금 중요한 건 연기가 아니잖아……. 어휴. 아니다. 아냐. 일단…… 하영 언니. 협회에선 뭐래?”

“일단 진입하지 말고 기다리래. 대놓고 철수하라고 발표 못 하는 거 보니 지들도 눈치 보고 있는 것 같아. 각협에선 내부 측정 꼭 해야겠냐는 분위기고, 바깥 높으신 것들은 그럼 마포구 터지게 놔둘 거냐는 분위기 같은데.”

“차암나. 그럼 지들이 쳐들어가 보시든가.”

“내 말이 그거다. 아, 잠시만. 또 연락 왔네.”

정하영이 드론에게서 등을 돌려 협회와 통화하는 동안 지수는 정하진의 목을 더 꽉 끌어안았다. 정하진에게 빌린 도깨비감투 덕분에 모습이 보이진 않지만, 쌓인 눈 때문에 누군가 있다는 걸 들킬 수도 있었기에 내내 업혀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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