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꽃 그리고 반지 3
‘강압적인 조건이라니…….’
다른 에스퍼가 만약 이런 아이템을 내밀며 똑같은 말을 했더라면 당연히 헛소리하지 말라며 밀어 냈겠지만, 상대는 정하진이었다. 대체 이 점잖은 남자가 제게 강압적으로 굴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 강압적인 조건이 뭔데요?”
“한지수 가이드는 앞으로 항시 이 반지를 착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던전에서만큼은 무조건 제 말을 따라야 합니다.”
“……무조건?”
“예. 제가 눈을 감으라면 바로 감아야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면 단 한 마디도 해선 안 됩니다. 무언가 먹으라고 드리면 그게 뭐든 의심하지 말고 바로 씹어 삼켜야 하고, 만지지 말라고 하면 그 어떤 것에도 손을 대선 안 됩니다.”
“…….”
“만약 그럴 자신이 없다면……, 죄송하지만 던전 입장은 도울 수 없습니다. 제겐 한지수 가이드의 안전이 최우선이니까요.”
“……어, 네. 근데 딱히 강압적이진 않은데요……?”
그가 말한 내용은 던전에서 공략팀 리더가 흔히 갖는 권한이었다. 던전 안에선 리더가 절대자였기에, 일부 특수 상황을 제외하면 무조건 공략팀 리더의 말을 따라야 했다.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던전에서 팀의 생존에 직결되는 부분이다 보니, 리더의 절대적인 명령은 모든 길드에서 당연하게 적용하는 부분이었다.
정하진이 요구한 조건을 들은 지수는 오히려 더 심란해졌다. 저 보편적인 조건을 전제로 받기엔 값어치를 헤아릴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한지수의 떨리는 눈동자가 정하진의 중지에 낀 반지와 손에 들고 있는 반지를 바쁘게 오갔다. 주먹 쥔 손의 힘도 조금 풀렸다. 하지만 여전히 손가락을 펼치진 않았다.
정하진은 다른 사람 같으면 앞뒤 잴 것 없이 덥석 받았을 아이템을 보고도 망설이는 지수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며 기다렸다.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고민한 지수가 마음을 굳혔는지 주먹에서 손을 완전히 풀고 고개를 들었다.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 눈빛을 본 정하진이 반지를 끼워도 괜찮겠냐는 듯이 바라보자 입술을 달싹이더니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정하진 에스퍼.”
“예.”
“저 조건은 너무 당연하잖아요. 역시 그냥 받긴 너무 과해요. 그러니까…… 정하진 에스퍼도 제가 드리는 아이템을 받으셨으면 해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정하진은 지수가 제게 줄 아이템이 뭔지 묻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당신이 이 반지만 받으면 뭘 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지수는 제 안전에 맹목적인 그를 보며 쓰게 웃어 버리며 슬그머니 손가락을 폈다.
“여기, 중지에 낄게요.”
아이템 장착을 허락받은 정하진은 지수가 살짝 까딱인 왼손 중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반지가 지수의 손가락에 맞춰 줄어들더니, 아이템이 귀속되었다는 메시지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지수는 한 손가락에 낀 두 개의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지수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손을 놓아도 될 것 같은데……, 싶은 생각이 들 때쯤, 여전히 지수의 왼손을 살포시 잡은 정하진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지수 가이드. 제겐 한지수 가이드의 안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니 미리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한지수 가이드를 지키기 위해 제가 강압적으로 구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
“제 결정이 납득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지수 가이드의 의견을 무시하고 한지수 가이드의 의사와 관계없이 여러 일을 강행할 수도 있습니다. 저의 그런 행동이 한지수 가이드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
“하지만 앞으로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전부 한지수 가이드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훗날 이런 제가 원망스러워진다고 하더라도 부디 이 말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정하진이 고개를 들어 지수와 눈을 맞추고 말을 이었다.
“저로 인해 속상하거나 슬픈 일이 생긴다면, 한지수 가이드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제가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 반지는 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반지는 한지수 가이드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언제든지라는 부분에 유독 힘이 들어간 것처럼 들렸다.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뜬 지수는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언제든지요?”
“예.”
정하진은 단 1초도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비록 대답은 ‘예’ 한 마디였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제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듯 지수와 내내 맞추고 있던 눈을 잠시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이 진지함을 넘어서 다소 과하게 느껴진 지수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입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입술을 살짝 핥은 지수가 다시 정하진을 향해 시선을 돌려 재차 물었다.
“……몇 달 뒤에도요?”
“몇 년 뒤라도, 몇십 년 뒤라도 괜찮습니다. 저도 지금, 이 순간부턴 반지를 절대 빼지 않을 겁니다.”
“…….”
“더 이상 제 보호가 필요하지 않은 시기가 와도, 한지수 가이드가 원한다면 언제든 제 곁으로 와도 됩니다.”
“……제가 가이딩 조절을 혼자 할 수 있어도요?”
“예. 그리고 일어나선 안 될 일이지만,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는 당연히 사용하셔야 합니다. 그게 언제든 말입니다.”
“…….”
평소의 한지수였다면 제게 헌신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구는 이 남자를 향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물었을 텐데, 지금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고, 약간은 미묘하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한데, 결정적으로 큰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런 지수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하진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한결 편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꼭 위험한 일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혼자 밥 먹기 싫고, 잠도 오지 않고, 심심하고 지루할 때 저를 찾아도 괜찮습니다.”
이 남자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다정하게 들린 탓인지, 귀가 간질간질하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아마 저를 향한 정하진의 눈빛이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우면서 깊은 걱정을 담고 있어서 그런 거라 여긴 지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그것도 아니면 어쩜 저 잘생긴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지수는 도저히 정하진과 눈을 더 맞추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슬그머니 시선을 옆으로 흐렸다. 그리고 저 다정한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작은 고갯짓을 보고 원하는 답을 얻었다는 듯이 만족스러워하는 정하진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에 새로운 정보를 욱여넣고 싶지도 않았고, 괜한 고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저 언제라도 자신을 찾아도 된다는 다정한 말이 주는 안도감에 취해 있고 싶었다.
‘오늘은 시작이 좋네.’
아침부터 예쁘고 달콤한 꽃도 받고, 그럭저럭 맛있는 식사도 했고, 훗날 걱정거리였던 것 중 하나인 안위 문제도 얼추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안식의 신이 보내 주었던 귀속 아이템이 잘 귀속됐는지 재차 상태 창을 확인한 지수는 오래간만에 마음의 평온을 느꼈다.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든다면 이 아이템들이 지켜 줄 것이다. 그리고 일전에 강재윤이 제게 주었던 수많은 소모성 아이템들도 잘 조합하면 충분할 것 같았다. 혼자 마음속으로 긍정적인 미래를 그리던 지수는 옆자리 정하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정하진 에스퍼?”
자리에서 일어난 정하진의 시선은 지수가 아닌 창밖을 향해 있었다. 블루베리와 청포도를 계속 입에 넣던 토토도 벌떡 일어나더니 소파로 점프해 정하진의 옷을 타고 올라가 어깨 위에 섰다.
얼떨결에 따라 일어난 지수도 정하진과 토토처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바깥이 흐릿한 건지 눈이 침침한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창가로 다가간 지수는 제 시력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안도하는 대신 충격으로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저 멀리 강 건너로 보이는 하늘만 색이 전혀 달랐다.
“정하진 에스퍼……. 뉴스에 나온 예측이 틀린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습니다. 벌써 게이트화가 시작됐군요.”
작은 중얼거림이지만, 전부 선명하게 들은 정하진은 지수의 바로 곁으로 다가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애초에 균열이라는 게 워낙 불규칙하게 생기고 예측 자체가 어려운 미지의 현상이라 그런지 그는 딱히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곁에 있는 이가 저리 담담한 반응을 보여서인지 지수 역시 불안해지려던 마음이 가라앉아 차분하게 밖을 살필 수 있었다. 균열이 생긴 부근 하늘에 몰려든 시커먼 구름에서 용오름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지상을 쓸어 버리기 위해 내려온 것처럼 보이는 용오름은 연신 스파크를 튀겨 댔다. 번개와 전혀 다른 느낌의 날카로운 번쩍임을 본 지수는 제 옆으로 다가온 포포의 정수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포포야. 지금 게이트화 관련해서 소식 있나 찾아봐 줄래?”
“네, 한지수 님. 지금 막 등록된 소식이 있어요. 1급 던전 재해 경보가 떴어요. 강한 토네이도가 예상되니 지하 대피소로 대피해 튼튼한 기둥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게 좋다고 해요.”
그 말에 지수는 저도 모르게 정하진의 왼쪽 팔뚝을 잡았고, 정하진의 어깨 위에 서 있던 토토는 정수리로 올라가더니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지수와 토토의 반응을 본 포포는 정하진의 오른편으로 다가가 슬그머니 제 날개를 들어 올렸다. 정하진은 포포가 들어 올린 날개 끝을 손가락으로 잡아 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쮜…….”
용오름이 세 개가 합쳐지더니 대형 토네이도가 되었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한 대형 토네이도가 강변 고층 빌딩 하나를 통과했는데, 그 몇 초 사이에 빌딩이 사라져 버렸다.
“…….”
“…….”
“…….”
정하진의 팔뚝을 잡은 손과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앞발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강 건너 용오름은 어느새 일곱 개로 늘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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