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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70화 (70/172)

#070.

꽃 그리고 반지 2

균열을 자욱하게 가린 시커먼 먹구름을 떠올린 지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해가 크지 않아야 할 텐데…….”

“징후가 워낙 나빠 낙관적으로 보긴 힘들 것 같다더군요. 민간인들이 대피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정말 평범한 징후는 아니란 거네요…….”

“예. 그렇다 보니 현아도 반쯤 포기한 것 같습니다. 이미 재건팀에도 협조 요청을 보낸 상태입니다.”

“그 정도로…….”

재건팀.

정식 명칭은 붕괴 지역 재건 및 재개발 팀이지만, 사람들은 이를 줄여 ‘재건팀’이라고 부르곤 했다. 재건팀은 각성자 협회 소속의 건축 전문가, 도시 개발 전문가와 다양한 능력의 에스퍼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대격변 당시 붕괴한 도시를 복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역시 대격변 이후 인력이 부족해 방치된 폐허가 아직도 너무 많았다. 수도인 서울조차 아직 모든 지역을 완벽하게 복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덕분에 서울 외곽을 비롯 각 지역의 중심지를 제외한 외각은 거의 폐허 상태로 수습되지 않은 곳이 많았다.

이런 지역은 대부분 무너진 건물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기에 위험한 건 고사하고 노숙자나 범죄 조직도 많아 치안도 문제였다. 여러 문제가 들끓는 지역이기도 하고, 복구할 곳은 많은데 팀원은 한정되어 있으니, 인력은 언제나 부족했다.

물론 사설 외주 업체도 다수 존재했다. 그리고 김현아라면 이미 사설 쪽 인력은 끌어모을 만큼 끌어모았을 게 분명했다. 그러고도 부족하다 파악해 재건팀에게 협조 요청까지 한 걸 보면 사안이 심각한 것 같았다. 어쩜 평화 길드 건물이 완전하게 붕괴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지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재건 팀을 미리 섭외할 정도면……. 피해 규모도 규모지만, 던전 예상 등급도 높게 나온 건가요?”

“……예.”

말하기 전 숨을 크게 삼킨 정하진이 조심스럽고도 짧게 대답했다. 그러곤 제 대답이 조금 부족했다고 생각했는지,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음, 그리고 균열의 징후가 워낙 안 좋아서 최악을 가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요……. 이런 말 하면 조금 그럴지 모르겠지만, 재윤이 형 집에서 중요한 건 다 챙겨서 다행이네요…….”

사실상 골라서 챙겼다기보다 나중엔 시간이 부족해 보이는 대로 쓸어 담아야 했다. 덕분에 늘 여유 있었던 인벤토리가 거의 차 버렸다. 정하진 역시 지수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 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지수가 준 꽃을 다 따먹은 토토는 팬케이크 접시로 다가가 정하진을 올려다봤다. 원하는 게 명확한 시선이었다. 계속 토마토수프만 공략하던 지수가 토토를 챙기려 하자 정하진이 먼저 나섰다.

“아, 제가…….”

“마저 드시죠. 토토, 이리 와라.”

“쮜!”

지수가 직접 챙기겠다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토토가 정하진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정하진은 팬케이크를 토토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내밀었다. 토토가 앞발로 팬케이크를 끌어안고 먹는 모습을 본 지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둘이 하루가 다르게 친해지네. 다행이다.’

하루하루 눈에 띄게 친해지는 정하진과 토토를 보고 있자니 안도감이 들었다. 지수는 나중에 토토 몰래 정하진과 양도 계약서를 써야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토토. 이거 다 먹고 운동해야 한다.”

“쮜, 쮜잇?”

“뭘 놀라는 거지? 지금 네 몸의 몇 배나 되는 양을 섭취하고 있으니, 당연히 운동을…….”

“쮜에엥!”

토토는 거의 다 먹어 남겼다고 보기도 민망한 팬케이크 부스러기를 정하진에게 던지더니, 토라진 얼굴로 뒤돌아 앉았다.

정하진은 토토의 토실토실한 등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도 반응이 없자, 딸기 하나를 토토의 옆에 내려 두었다.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지만, 앞발만 뻗어 딸기를 가져간 토토가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정말 토라졌다기보단 이 상황을 놀이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토토 덕분에 아침부터 웃은 지수가 정하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역시 이 상황이 퍽 즐거운지 부드러운 눈빛으로 토토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지수와 눈을 맞췄다. 지수는 그에게 하려던 말을 상기하며 먼저 운을 뗐다.

“정하진 에스퍼. 어제요…….”

“예.”

“어, 그게……. 약 기운 때문인지 솔직히 어디까지 대화하다 잠들었는지 기억이 좀 희미해서요.”

“그렇군요. 어디까지 기억합니까?”

정하진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들은 지수는 최대한 제 기억을 쥐어짜 대답했다.

“어, 제가…… 그…… 가이딩……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긴 한 것 같은데요……. 사실 제대로 사과한 게 맞는지부터 기억이 안 나요.”

즉 그 이후 정하진의 가슴과 허벅지를 찬양하고, 누가 날 고문하면 어쩌냐고, 얼마면 당신을 고용할 수 있냐고 물었던 대화는 싹 잊었다는 의미였다. 지수의 기억이 자신이 예측한 시점에 정확히 끊긴 것을 확인한 정하진은 평소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기억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제가 괜찮다고 했는데도 몇 번이고 사과하다 잠드셨죠. 참고로 잠들기 직전까지 사과하셨습니다.”

정하진은 뻔뻔하게 뒤의 대화를 생략하고 앞의 사실만 그럴싸하게 말했다. 한지수 성격에 자신이 약에 취해 그런 속내까지 털어놓았다는 걸 알면 오히려 심란해할 듯해 내린 결정이었다. 다행히 한지수는 작은 의심도 없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끄덕였다.

“아, 큼……. 네……. 제대로 사과했군요.”

“예.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하셨으니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전 정말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네에……. 그, 지금은 어때요? 혹시 지금도…….”

지수가 말끝을 흐리며 눈치 보기 시작하자 정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평범하게 방사하고 있습니다. 너무 신경 쓰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평소대로 편히 계시는 게 조절에 더 도움 될 겁니다.”

“으음, 네…….”

지수는 평소에 편히 있어서 그 사달이 난 게 못내 신경 쓰인다고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하진의 말이 맞았다. 오히려 너무 신경 쓰면 더 안 좋아질 수 있으니,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원래 무언가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온종일 그것만 신경 쓰게 되는 게 인간의 뇌였다.

‘제대로 조절하는지 아닌지 내가 알 길이 없으니…….’

만약 자신이 또 파렴치한 가이딩을 한다 해도 정하진 성격에 그냥 자가 조절이 어려워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것 같아 못내 신경 쓰였다. 지수가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 중인 것을 눈치챈 정하진은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해 제 인벤토리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한지수 가이드.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드릴 게 있습니다.”

“……네? 뭔데요?”

“이겁니다. 받으시죠.”

정하진이 내민 작은 상자를 반사적으로 받은 지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 크기의 상자라곤 반지 케이스밖에 본 적이 없었다.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지수의 예상대로 반지가 들어 있었다.

“……반지?”

지수가 중지에 착용한 웨딩 링 같은 은반지와 달리 넓적하고 면적이 넓은 검은색 반지였다. 반지 표면엔 넝쿨인지 파도 무늬인지 모를 곡선이 세공되어 있었다. 처음엔 그냥 무늬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음각으로 새겨진 곡선 사이로 은은한 마나가 흐르는 게 보였다.

“지금 바로 착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

지수는 습관대로 아이템 감정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눈앞에 푸르스름한 창과 함께 팝업이 생겼다.

[은하수의 염원이 깃든 반지 (L급)]

착용 시 귀속 / 1회 사용 시 마나 100 소모 / 재사용 시간 없음

밤의 길을 관장하는 은하수의 염원이 깃든 반지.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다면 사용해 보자.

페어 반지를 착용한 이에게 바로 이동할 수 있다.

단, 착용자와 같은 시간 선에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

설명을 읽은 지수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나눠 낀 상대에게 이동할 수 있는 반지. 강재윤과 자신이 하나씩 착용한 은반지도 똑같은 이동 스킬을 지니고 있었지만, 한 번 사용하면 쿨타임이 24시간 있었다.

그런데 이 반지는 설명을 아무리 읽어 봐도 재사용 시간에 대한 제약이 없었다. 즉 마나 회복 물약만 먹는다면 서로에게 제한 없이 이동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저기, 정하진 에스퍼…….”

“예.”

“이건……. 이건 너무…….”

듣도 보도 못한 희귀 옵션이었다. 애초에 L급 아이템 자체가 흔한 게 아니지만, 옵션만 봐도 절대 가볍게 받을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어떻게 거절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정하진이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더니 지수의 왼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건 제가 한지수 가이드에게 제시하는 조건입니다.”

“……무, 무슨, 아니, 뭐에 대한 조건인데요?”

놀란 탓에 말까지 더듬은 지수는 그가 제 손가락에 반지를 끼울까 봐 주먹을 쥐고 물었다. 그 하찮은 반항을 본 정하진은 억지로 손을 펴 끼우는 대신 반지를 집은 채 설명했다.

“한지수 가이드가 이 반지를 받지 않으면, 저 균열이 게이트화 되더라도 입장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다른 던전도 마찬가지입니다.”

“……!!”

정하진에게 손을 잡힌 채 주먹을 쥐고 있던 지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 남자가 저 위험해 보이는 던전에 진입하려는 자신을 말리지 않는 게 의아하긴 했었다. 당분간 보호자를 자처한 본인이 SS급이라서, 또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러나 싶긴 했지만, L급 아이템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건 진짜 L급 희귀템이잖아요…….”

“한지수 가이드도 어제 제게 L급 포션을 막 꺼내 주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죠. 이게, 옵션이, 이게, 어, 옵션이 너무…….”

“똑같이 귀한 아이템인데 크게 다를 거 없습니다.”

그래도 도저히 주먹 쥔 손을 펼 수가 없어 정하진의 눈치만 보고 있을 때, 그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참고로 이건 그냥 드리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다른 조건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은 한지수 가이드에게 다소 강압적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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