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꽃 그리고 반지 1
엄밀히 말해서 사이가 안 좋다기보다 서로를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라고 해야 더 맞는 말이었다. 강재윤도 평소라면 정하진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지수가 관심 있는 척할 때만 신경 썼으니까.
‘그래도 눈에 띄게 서먹해진 느낌이 들기 시작한 건 제주도 던전 공략부터였나?’
시기상 대략 제주도에 터졌던 대형 던전을 같이 공략한 후였던 것 같은데,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 지수는 평소 정하진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도 종종 정하진 관련 뉴스나 영상을 찾아본 이유는 강재윤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일부러 그런 거였다.
강재윤이 정하진에 대해 반응하던 당시의 표정이나 말투, 그리고 질투심 뚝뚝 묻어나는 행동 따위를 떠올린 지수는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강재윤은 눈치가 귀신같이 빠른 사람이니, 어쩜 자신의 유치한 마음을 눈치채고도 모른 척하며 반응해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혼자 차분하게 과거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다. 따로 시계를 확인한 건 아니지만 졸음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분명 자신은 잠든 상태로 이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 온 것일 텐데, 왜 졸음이 쏟아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혹시 이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잠드는 걸까?’
꿈속에서의 수면이라니……. 이상한 소리같이 들리겠지만, 어떻게든 지수의 정신을 재우려는 듯이 졸음이 강하게 밀려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깨고 나면 정하진 에스퍼한테 제대로 사과부터 하자. 민망해도 할 건 해야지…….’
이 공간에 오기 전, 약에 취한 탓인지 그간 무의식으로 저지른 파렴치한 가이딩에 대해 정하진에게 제대로 사과했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았다. 깨자마자 꼭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생각한 지수는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부디 현실로 돌아갔을 때 이 다짐을 잊지 않길 바라며.
* * *
꿈에서 깼을 때 가장 처음 보이는 게 반려동물의 주둥이라면, 더없이 행복한 기상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지수는 오늘의 기상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게 바로 앞발로 제 코를 짚고 서서 내려다보는 토토의 멍~한 얼굴이었으니까. 오늘 일기에 쓸 내용이 벌써 생겼다는 생각에 작게 웃은 지수가 토토의 푸짐한 궁둥이를 톡톡 두드렸다.
“……토토야……. 잘 잤어?”
“쮜!”
“으음? 토토야, 머리에 뭘 쓴 거야?”
“쮜이!”
아직 눈이 침침한 탓도 있지만, 토토가 너무 가까워 정수리에 올라간 작고 하얀 덩어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토토를 잡아 침대 옆에 내려 두고 일어난 지수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내렸다가 푸흡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만 해도 조금 삐뚤어졌던 리본을 다시 곱게 묶은 토토의 정수리에 작은 꽃 한 송이가 올려져 있었다.
“토토야, 이 꽃은 뭐야? 어디서 났어?”
“쮜이~!”
정수리에 올려 둔 꽃을 입에 넣은 토토가 따라오라는 듯이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거실로 달려 나갔다. 지수는 내심 더 누워 있고 싶었지만, 토토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비실비실 일어나 푹신한 슬리퍼를 신고 거실로 나갔다.
평소라면 높은 곳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며 전경부터 즐겼을 텐데, 출출해서 그런지 긴 테이블 위에 차려진 온갖 음식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하진이 사 온 듯한 포장 음식이 잔뜩 있었지만, 토토가 머리에 달고 왔던 꽃은 보이지 않았다.
호텔 거실을 두리번거리던 지수는 토토가 정하진의 침실로 쏙 들어가는 걸 보고 멈칫했다. 정하진이 사용한 침실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혹시 그가 옷을 갈아입는 중이거나 씻는 중이면 어쩌나 싶어 괜히 초조해졌다.
여전히 어젯밤 알게 된 파렴치한 가이딩 희롱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터라 쉽사리 열려 있는 방문 근처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지수는 거실과 방문 사이 복도에 서서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저, 안에 계세요?”
“쮜잇~!”
“아, 아니. 토토 말고. 정하진 에스퍼, 계세요?”
“예.”
간결한 대답과 동시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침부터 신난 토토가 정하진의 침실에서 와다닥 뛰어나왔다. 그리고 포포가 그 뒤를 따랐다. 지수는 토토야 그렇다 쳐도 포포까지 정하진의 방에서 나오는 게 다소 의아했지만, 일단 인사부터 했다.
“포포야, 좋은 아침.”
“한지수 님. 좋은 아침이에요.”
가까이 다가온 포포의 머리를 쓰다듬던 지수는 시야에 들어온 정하진의 다리를 보고 인사하려 고개를 들다 흠칫 굳었다. 정하진의 허리 위로 상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대한 꽃다발을 안고 나온 탓에 가려진 거였지만, 저런 큰 꽃다발을 안고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한 탓에 퍽 놀라 버렸다.
‘와, 식물형 인외 몬스터인 줄…….’
예전에 식생 던전에서 마주쳤던 식인 꽃 몬스터가 떠오른 지수는 짐짓 놀라지 않은 척하며 옆으로 다가가 정하진에게 인사했다.
“정하진 에스퍼, 안녕히 주무셨어요?”
“예. 한지수 가이드도 좋은 꿈 꾸셨습니까?”
“네. 괜찮았던 것 같아요. 어, 그런데……. 이건 언제 사 오신 거예요?”
“제가 나가긴 조금 그래서, 하영이에게 아침 식사 배달을 부탁하며 겸사겸사 꽃도 샀습니다.”
“……!!!”
저 테이블 다리 휘도록 차려진 음식과 이 거대한 꽃다발이 정하진의 쌍둥이 동생 정하영의 배달이었다니……. 국가 소속 S급 에스퍼를 그렇게 부려 먹어도 되는 거냐고 물으려던 지수는 제게 내밀어진 꽃다발을 반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이거…… 혹시 저 주시는 거예요?”
“예. 한지수 가이드와 토토를 위해 샀습니다.”
“……고맙습니다. 향기가 엄청 좋네요. 근데 이거 방울꽃 아닌가요? 원래 이런 향인가? 특이하네요.”
방울꽃처럼 작은 꽃으로 만들어진 꽃다발도, 이렇게까지 거대한 꽃다발을 보는 것도 전부 처음이지만, 무엇보다 향기가 독특했다. 꽃향기라기보단 마치 사탕처럼 달콤한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꽃들이 아주 희미하게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거…… 던전산 꽃인가요?”
“예. 식용 꽃입니다. 감정해 보시죠.”
지수가 감정 스킬을 사용하자 바로 앞에 아이템 설명이 떴다.
[솜사탕 품은 은방울꽃]
단맛이 강하게 나는 식용 은방울꽃.
필■■ 루■■ ■■ 북부에 주로 피는 평범한 은방울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설탕 중독인 ■■를 위해 ■■후작이 직접 개량한 식용 꽃이다. 마법으로 단맛을 느낄 수 있게 개량하여 섭취 시 혈당이 오르지 않는다.
단! 과한 섭취 시에는 복통을 유발할 수 있으니 하루 100송이 이상은 먹지 말자!
“제로 슈거 음식 개념인가……. 던전 꽃은 나름대로 많이 봤는데, 이런 개량된 꽃은 처음 봐요. 신기한 꽃이네요.”
거대한 꽃다발을 안고 뒤뚱뒤뚱 걸으며 아이템 설명을 읽은 지수는 은방울꽃 무더기를 소파 끝자리에 내려 두었다. 꽃다발이 어찌나 큰지 소파 한 자리를 꽉 채웠다.
‘이 정도 양이면 엄청 비쌌을 텐데, 아침부터 구하기도 힘들었을 거고…….’
던전산 꽃으로 만든 꽃다발은 손바닥만큼 작은 크기도 굉장히 비싼 편이었다. 물론 정하진에게 돈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가 제게 구하기 어렵고 귀한 선물을 해 준 것을 실감해 다시 한번 인사했다.
“정하진 에스퍼, 고맙습니다. 정하영 에스퍼에게도 고맙다고 꼭 전해 주세요.”
“예. 그러겠습니다. 설명은 보셔서 아시겠지만,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토토, 너도. 적당히 먹어라.”
“쮜잇!”
어느새 소파로 올라와 꽃을 한 송이 뜯어 먹은 토토가 허겁지겁 또 다른 꽃을 땄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콩알처럼 작은 눈동자가 눈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토토가 눈시울까지 적셔 가며 먹는 모습은 예전에 강재윤이 사 준 +++SS급 드래곤 뒷다리 스테이크 이후 처음이었다. 토토의 격한 반응을 본 지수는 내심 놀랐지만, 제법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토토야, 이거 100송이 이상 먹으면 안 된다? 알았지? 더 먹으면 배 아야~ 한다?”
“쮜!”
벌써 열 송이는 먹었으면서 대답은 잘했다. 토토에게 이만큼만 먹으라고 가지 하나만 쑥 뽑아 준 지수는 저 역시 한 송이를 똑 떼어 내 입에 넣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이 확 깰 정도로 달콤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마치 신선한 과일처럼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것이 아는 맛 같았는데, 이리저리 혀를 굴려 봐도 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지수가 아리송한 얼굴로 두 송이를 더 따 입에 넣고 우물대고 있으니, 정하진이 음식 뚜껑을 열며 말했다.
“식사부터 하시죠.”
“……!”
저도 모르게 식사 전 간식에 열 올린 게 머쓱해진 지수가 꽃을 삼켜 내고 소파에 앉았다. 정하진 역시 지수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새빨간 수프가 든 그릇 뚜껑을 직접 열어 주며 말했다.
“이것저것 종류별로 사 봤습니다.”
“와, 저 이런 토마토수프 좋아하는데……! 감사해요. 잘 먹겠습니다.”
“예. 저도 잘 먹겠습니다.”
편히 먹으라는 듯이 정하진이 먼저 샐러드를 퍼 먹기 시작했다. 지수는 드레싱 없이 야채만 씹는 그를 흘긋 보며 토마토수프를 한입 떠먹었다. 새빨간 색에 비해 부담되지 않는 담백한 맛이었다.
아직 따뜻한 수프를 천천히 식혀 먹으며 어제 일에 대해 사과할 타이밍을 재던 지수의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순식간에 샐러드 한 그릇을 해치운 정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균열은 대략 저녁 전엔 게이트화 될 것 같다고 합니다.”
“……!”
저가 꺼내려던 주제는 아니었지만, 마침 궁금했던 이야기였기에 지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수프를 오물거리며 제게 집중하는 지수를 본 정하진은 이어 설명했다.
“그리고 안 좋은 소식이지만, 균열 주변에 몰려든 구름이 평화 길드 본관을 가릴 정도로 커진 걸 보면 징후도 나쁠 것으로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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