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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68화 (68/172)

#068.

별이 빛나는 밤 8

버럭 외쳤으나, 애석하게도 지난번처럼 안식의 신이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없었다. 잠깐 허공에 떠 있는 설명을 외면하던 지수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안식은 여기에 없나? 진짜 바쁜가 보네…….’

아이템 설명으로 고개 돌린 지수는 두 개의 창을 나란히 두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읽었다.

귀가 짧은 사랑스러운 토끼가 은근히 버린 얇은 리본

등급: S

스탯 추가 옵션 없음 (착용 시 귀속)

귀가 짧고 연약한 토끼를 끔찍하게 아끼는 대마법사가 만든 수천 개의 리본 중 하나.

하지만, 귀가 짧은 토끼는 이 리본의 옵션이 마음에 들지 않아 침대 밑에 숨겨 버렸다.

악의를 가지고 착용자의 등 뒤를 습격하는 S급 이하 존재의 척추를 역으로 꺾어 버린다.

단! 척추만 역으로 꺾는 기능이므로, 상대의 숨은 아직 붙어 있을 확률이 크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습격당했다면 주의하자!

※활용 팁※ 리본을 장식하기 여의찮다면 신발 끈 대용으로 사용해 보자.

‘유용하긴 하겠지만…… 척추가 반대로 꺾인다니, 호러잖아.’

사람이든 몬스터든 뭐든 간에, 척추가 반대로 꺾이는 광경이 보기 좋을 리 없었다. 너무 끔찍한 설명에 부르르 떨며 고개를 가로저은 지수가 이번엔 옆에 띄워 둔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귀가 짧은 사랑스러운 토끼가 대마법사 몰래 버린 커프스

등급: SS

스탯 추가 옵션 없음 (착용 시 귀속)

귀가 짧고 사랑스러운 토끼가 대마법사 몰래 울면서 버린 커프스.

악의를 가지고 착용자를 힘으로 제압하려는 SS급 이하 존재의 눈 or 생식기 or 발 중 랜덤하게 한 가지 부위를 터뜨려 도망갈 시간을 확보해 준다.

단! 한 가지 부위만 랜덤하게 터뜨리는 기능이므로, 상대의 숨은 붙어 있으니 재빨리 도망치자!

“……환장하겠네.”

힘으로 자신을 제압하려는 이가 갑자기 눈알이 터져 나가거나, 생식기가 터지거나, 발이 터진다면 누구라도 까무러치게 놀라겠지. 지수는 대체 저 귀 짧은 토끼가 누군지 몰라도 이 아이템을 버린 것도 이해가 된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옵션만 두고 보면 분명 좋은 아이템이었다. 좋아도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귀한 아이템을 많이 가진 한지수조차 이렇게 좋은 옵션의 반격 아이템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비슷한 계열로 강재윤이 선물해 주었던 피격 시 방어 스킬 발동 아이템이 있긴 했다.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S급 쉴드가 자동으로 펼쳐지는 아이템으로 3회 사용 후 소멸하는 소모성 아이템이었다.

그에 비해 이 아이템들은 소모성도 아니고, 귀속형이었다. 가장 좋은 방어는 공격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제 안전을 지킴과 동시에 적을 무력화 시킬 아이템이니 착용하긴 해야 했다. 이 두 개만 있어도 당분간 저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 가이딩 자가 조절이 가능해지면 정하진 에스퍼도 곁에 없을 텐데, 쓰자. 써. 이건 날 지키기 위해서 써야지.’

설명 창을 다 끄고 일단 인벤토리를 치운 지수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저 끔찍한 옵션이 발동되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혹시라도 발동된다면 절대 그 결과로 발생한 현장은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 다짐하며 편지지에 적힌 메시지로 시선을 돌렸다.

안식의 신 매우 바쁨.

선물은 즉시 착용 바람.

당분간 답장 불가.

때가 되면 이 장소로 부를 것.

삼시 세끼 챙겨 먹고 충분히 잘 것.

“…….”

어찌 보면 성의 없는 메시지였다. 그만큼 바빠서 그런가 보다 생각한 지수는 일단 창을 치웠다. 그리고 옵션 때문에 질색하며 인벤토리에 넣어 둔 아이템을 도로 꺼냈다. 리본은 딱히 두를 곳이 없어 설명에 쓰인 것처럼 운동화 끈 대신 묶었고, 커프스 역시 끼울 곳이 없어 양쪽 운동화에 남는 신발 끈 구멍에 하나씩 끼워 넣었다.

아이템이 귀속되었다는 메시지를 확인한 후 발라당 누운 지수는 눈을 깜빡이며 한숨을 쉬었다. 전엔 그래도 안식의 신이랑 대화라도 나누며 시간을 보냈는데, 지금은 여기서 혼자 뭘 하고, 또 어떻게 나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번처럼 때가 되면 알아서 나가지겠지?’

막연한 불안감을 버린 지수는 허공인지 바닥인지 모를 곳에서 데굴데굴 뒹굴다가 위를 보고 누웠다.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공간은 처음엔 신기했지만, 빛도 그림자도 아무것도 없는 공간인지라, 마치 시력이 상실된 듯 느껴져 무섭기도 했다.

원초적인 두려움을 느낀 지수가 옆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뭐라도 움직이는 게 보여야 안심할 것 같은 기분에 쭉 뻗은 팔을 바라보다 손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다행히 조금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계속 의미 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자니, 자연스레 중지에 낀 은색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

지수는 별다른 기대 없이 반지를 보듬으며 스킬을 시전했다.

[지정 타겟 ‘재윤이 형’에게 이동을 시도합니다.]

……

[지정 타겟 ‘재윤이 형’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스킬 사용이 취소됩니다.]

“……그럼 그렇지.”

딱히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재차 한숨을 푹 내쉰 지수는 반지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최근 정신을 반쯤 놓고 지내서 깊게 생각을 못 했는데, 이 장소에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맑아졌다.

‘은퇴할까…….’

어차피 벌어 둔 돈은 많았다. 이것도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러비스 활동 정산금은 대격변이 일어나기 직전에 받은 데다가 다행히 지수가 거래하던 은행은 대격변 이후에 영업을 재개했다. 한국에 존재하는 은행의 절반 이상이 망하고 그대로 역사 속에 파묻힌 걸 생각해 보면 운이 좋은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산금이 아니더라도 평화 길드에서 과할 정도로 많은 연봉을 받고 있었기에 애초에 통장 잔고를 안 보고 산 지도 꽤 됐다.

‘꿈에서 깨면 오랜만에 잔액이나 확인해 봐야겠다.’

은퇴하고 변신 아이템을 사용해 모습을 숨기고 비각성자 신분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직업은 뭐가 좋을지 도통 생각나는 바가 없었지만, 막상 닥치면 뭐든 하겠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안식의 신이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죽어서 그만큼 보상받는다고 했으니, 남은 시간 동안 착한 일을 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재윤이 형이 늘 말했던 것처럼 유기 동물 보호소에서 일하는 것도 괜찮을지도…….’

지수는 러비스 시절부터 지금껏 별생각 없는 선행을 이어 왔다. 그저 강재윤이 데려가면 같이 봉사 활동을 하고, 강재윤이 기부하자고 하면 같이 기부하는 식으로 말이다. 팬들은 그런 지수를 보고 착하다고, 역시 천사라고 주접을 떨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지만, 그런 칭찬을 들을 때면 늘 부끄러웠다.

난 그냥 형이 같이하자고 했으니까 하는 건데……. 하면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 내가 먹고사는 데 지장 없는 수준만큼만 하는 건데…….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강재윤은 늘 웃으며 말했었다. 착한 척하려고 기부하는 것도 결과만 두고 보면 착한 일이라고. 네 착한 척으로 아무도 피해 보지 않고 누군가는 득을 보는 거니까 괜한 고민하지 말고 쉽게 생각하라고. 넌 그냥 앞으로도 형이랑 같이 착한 척하며 살면 된다고 말이다.

‘……형 몫까지 두 배로 착한 척하고 살아야겠네.’

앞으로 할 일 목록에 착한 일을 추가한 지수는 당장 처리할 일도 고민했다. 빠르면 자고 일어났을 때 균열이 벌어져 게이트화 됐을 수도 있었다. 딱 봐도 검은 연기를 뿜는 게 지난번 태종대처럼 측정 불가 느낌이긴 했지만, 던전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거였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 근데 김지수 신분은 아직 1차 공략 허가 안 날 텐데……. 당분간 또 언론에서 난리 치겠다. 근데 정하진 에스퍼가 어쩐 일로 허락한 거지?’

균열을 처음 봤던 당시엔 너무 놀라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나중에라도 던전에 입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던 게 걸렸다. 상공 던전은 대부분 위험하다는 핑계로 근처에도 못 가게 할 것 같았으니까.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고 흥분한 저를 진정시키려고 했다기엔 그 약속의 무게가 묵직했다. 여의도에서 머무는 것도 의외였는데, 던전 입장까지 막지 않고 함께 하겠다니, 의아했다. 그렇다고 입장을 반대하길 바란 건 절대 아니지만, 정하진이라는 사람이 하지 않을 법한 약속과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목숨까지 걸 정도로 강한 맹약은 대체 누구랑 한 거고?’

이건 잠에서 깨어나면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한지수’라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맹약을 했다는데, 정하진이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일단 현아 누나는 아닐 거야.’

애초에 김현아는 누군가와 계약할 때 보통 시력이나 청력, 신체의 치명적인 영구적 손상을 걸긴 해도 목숨은 절대 걸지 않았다. 사실 김현아 본인은 하고 싶어 했지만, 평화 길드의 길드장, 부길드장이자 김현아의 부모님인 두 분이 금기했기 때문이었다.

제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해 줄 법한 사람은 이제 토토와 김현아와 팬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 세 후보 중에 정하진과 저런 맹약을 걸 만한 사람은 김현아밖에 떠오르지 않았기에 더 의아했다.

‘그렇다고 재윤이 형이랑 했을 리는 없고…….’

강재윤이라면 아마 상대에게 목숨을 걸라고 했을 것 같긴 했지만, 두 사람이 서로 말을 섞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지수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애초에 강재윤은 정하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대놓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지수가 정하진에 대한 기사를 보거나 영상을 보고 있으면 꼭 다가와서 은근히 채널을 돌리거나 휴대폰을 내려 두고 다른 거나 하자고 꼬시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근데 재윤이 형이랑 정하진 에스퍼 사이가 안 좋아진 계기가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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