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
별이 빛나는 밤 7
조금 전만 해도 농담처럼 날 고용할 거냐고 물었던 남자의 얼굴이 대번 심각함으로 물들었다. 지수는 그런 정하진을 지그시 바라보며 어눌한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전 겁도 많고, 아픈 건 딱 질색이라……. 누가 고문하려고 도구만 들어도 아는 정보 줄줄이 다 불고 아이템도 다 꺼내 줄걸요?”
“…….”
“그러면 원하는 걸 다 얻은 납치범들이 절 살려 두겠어요?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죽긴 싫어요. 제가 원하는 날, 원하는 순간에 안 아프게 한 번에 죽고 싶지……. 뉴스에 그런 식으로 부고 소식 알리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요…….”
“…….”
“제가 그런 식으로 가 버리면 토토도 충격받을 거고……. 자기 집사가 그렇게 가는 꼴을 보면 안 되잖아요……. 우리 애는 엄청 똑똑해서 그거 다 기억할 텐데…….”
“…….”
한지수의 말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눈도 반쯤 감고 있는 모습을 본 정하진은 입술을 달싹였다. 딱 봐도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이, 거의 잠든 상태나 마찬가지인 지수도 눈치챌 만큼 노골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저한테 할 말 있어요?”
“예.”
“뭔데요?”
“……말해도 될지 고민 중입니다.”
“해요……. 괜찮아요…….”
정하진은 잠들기 직전인 지수를 바라봤다. 상태를 보니 자신이 1분만 더 버텨도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다. 어차피 지금 말해 봤자 지수는 이 대화를 나눈 기억조차 떠올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수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고 정하진이라는 남자를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정하진은 지수가 조금이라도 좋은 꿈을 꿀 수 있길 바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지수 가이드가 가이딩을 자가 조절 하게 된다고 해도……. 전 계속 한지수 가이드 곁에 있을 계획입니다. 한지수 가이드에게…… 제가 필요 없어질 날까지 말입니다.”
“……?”
거의 실눈 상태로 겨우 뜨고 있던 지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하진은 놀라 눈을 껌뻑이는 지수를 향해 확고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때까지 제가 한지수 가이드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누가 잡아갈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
정하진은 제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휘둥그레진 눈을 한 지수가 꼭,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처럼 보여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사락사락.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자, 멍한 얼굴로 입을 살짝 벌리고 있던 지수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이후로도 초점을 맞추려는 듯이 눈을 연신 깜빡인 지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
“왜 그렇게까지 해요……? 솔직히 까놓고 팬이라는 말 말고요. 진짜 이유가 알고 싶어요. 아까 말했던 목숨을 건 맹약은 뭔데요? 누구랑? 현아 누나랑 했어요?”
“그건 제가, ……큽! 쿨럭!”
무언가 말하려던 정하진이 돌연 기침을 터뜨리며 일어나 앉았다. 구역질이라도 난 건지 그의 목울대가 눈에 띄게 움직였다.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두어 번 크게 기침한 정하진은 이후로도 여러 번 잔기침을 한 후에야 조금 진정한 듯이 제 목을 연신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정하진 에스퍼, 괜찮아요?”
지수 역시 그를 따라 일어나 앉으려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상체를 다 들기도 전에 풀썩 쓰러져 누웠다. 저 때문에 놀란 지수가 맥없이 늘어지는 모습을 본 정하진이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후우……. 죄송합니다. 침을 잘못 삼켰나 봅니다.”
“…….”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꽤 아프게 들렸다. 그렇지만 당사자가 단순히 침을 잘못 삼켰을 뿐이라며 단호하게 말한 탓에 지수는 더 묻지도 못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목을 가다듬은 정하진은 입 안에서 혀를 굴리더니 다소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한지수 가이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냥 단순하게 말해 봐요.”
“단순하게…… 말입니까.”
“네. 단순하게요.”
단순하게……. 저 짧은 말을 곱씹은 정하진이 지수를 지그시 바라봤다. 머릿속으로 대답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곧 결론 내린 듯이 입을 움직였지만, 금세 멈칫거리며 제 목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이 지수의 눈엔 마치 목이 또 아플까 봐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기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먼저 권하려 했지만, 정하진이 조금 더 빨리 입을 열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제가……, 제가 당신을 지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
“현재로서는 이보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긴 힘들군요. 지금은 의문스러운 점도 많겠지만,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전부 제대로 설명하겠습니다.”
“…….”
나지막하게 말한 정하진은 지수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만 봐도 지금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정하진은 더 설명하는 대신 일단 자라며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어차피 내일이 되면 기억도 못 하실 텐데, 우선 주무시죠.”
“……제가 기억을 못 해요?”
“예. 한지수 가이드는 약에 취해 있으니까요.”
“……그럼 나중에…… 제가 정신이 멀쩡할 때…… 다시 말해 줄래요?”
“예. 그러겠습니다.”
“약속해요?”
“약속하겠습니다.”
“언제? 이따 아침에요?”
“음……. 아뇨. 아침엔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왜요?”
“말씀드린 것처럼, 한지수 가이드가 궁금해하는 이야기는 당장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도 더 자세히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만……, 지금은 어렵군요.”
당장은 어렵다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들은 지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카메라 앞에 서던 시절의 습관인지, 20대 중반의 남자가 지을 법한 표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깜찍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귀엽게 쳐다보셔도 지금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귀……, 크흠. 큼. 귀엽게 본 거 아니거든요.”
“흠.”
정하진이 진짜냐는 듯이 눈썹을 또 한쪽만 쓱 올렸다. 지수는 제발 그 느끼한 표정은 짓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푸흐흐 작게 웃어 버리며 힘없이 대답했다.
“……알았어요. 솔직히…… 이해는 안 가지만……. 약속했으니까, 나중에라도 꼭 말해 줘야 해요…….”
“예. 그러니 우선 주무시죠.”
“네에…….”
현저히 느려진 목소리로 잊으면 안 된다고 웅얼거린 지수의 숨소리가 점점 더 느려졌다. 정하진은 드디어 잠든 한지수를 지켜보며 연신 목을 가다듬었다. 지수는 정신도 몸도 깊은 잠에 빠진 사람치고 표정이 퍽 불편해 보였다.
미간을 찌푸린 채 이를 꽉 물고 자는 모습을 본 정하진은 제 인벤토리에서 숙면에 도움을 주는 수정을 하나 꺼내 지수의 베개 밑에 넣어 주었다. 이불도 제대로 덮어 정리해 주고 있으니, 토토를 정수리에 올린 포포가 침대로 스르르 다가왔다.
정하진은 침대로 뛰어내린 토토가 지수의 머리 위로 올라가 찌푸린 미간을 앞발로 찹찹 두드리며 펴 주는 모습을 지켜보다 포포에게 시선을 돌렸다. 친근하게 생긴 아델리 펭귄 로봇 포포는 패널에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정하진을 향해 입을 벌렸다 닫는 모션을 보여 주었다. 마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네. 포포는 손님1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 말에 정하진이 포포와 시선을 맞추자, 지수의 이마에 엎드려 미간을 찹찹 펴 주던 토토 역시 멈칫하고 둘을 주시했다.
“현 위치가 무조건적인 1급 대피령이 내려진 지역이라 계속해서 대피 경고 알림이 도착하고 있어요. 당장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야 하지 않을까요?”
“……괜찮다. 만약 위험해진다고 해도 한지수 가이드는 안전하게 지켜낼 거다. 내가 보장하지.”
자신감 넘치는 대답을 들은 포포는 가느다란 작대기 모양으로 실눈 뜨고 다소 불경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눈을 고이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션을 취했다. 그리곤 몸을 돌려 소리 없이 거실로 미끄러져 나갔다.
“인공 지능이 주인을 닮았나 보군.”
“쮜?”
토토는 정하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지만, 상관없다는 듯이 다시 제 집사의 얼굴을 살폈다. 토토가 열심히 마사지해 미간을 펴 준 덕분인지, 수정의 효과인지 몰라도 표정이 한결 편해 보였다. 이마에서 내려온 토토는 지수의 목과 어깨 사이로 파고들어 배를 드러내고 누운 채 문밖을 가리켰다.
“쮜잇!”
“……나간다. 나가.”
* * *
“하아…….”
한지수는 눈을 뜨기도 전에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유는 현실에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고요함 때문이었다. 조금 전까지 가슴과 허벅지에 파렴치한 가이딩해 죄송하다고 정하진에게 싹싹 빌고 있었는데, 대체 언제 잠든 건지 당황스러웠다.
‘사과하다 잠든 것 같은데…… 제대로 사과한 거 맞겠지?’
자괴감을 느끼며 부스스 눈을 뜨자 이전에 안식의 신을 만났던 날처럼 순백의 공간에 제 몸뚱이 하나만 달랑 있었다. 당황하지 않고 몸을 뒤척인 지수는 허공에 깜빡거리는 편지 봉투 모양을 확인했다. 저번처럼 금빛 반짝이가 은은하게 맴돌았다.
“……또 골드야?”
다른 각성자라면 그저 기뻐하겠지만, 한지수는 영 미덥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봉투를 열었다. 그러자 저번처럼 폭죽 이펙트가 터지며 편지지가 팝업됐다.
안식의 신으로부터 다이렉트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귀가 짧은 사랑스러운 토끼가 은근히 버린 얇은 리본 (S)
-귀가 짧은 사랑스러운 토끼가 대마법사 몰래 버린 커프스 (SS)
아이템 이름을 먼저 읽은 지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선물이라며, 뭘 다 남이 버린 걸 주냐……. 이건 그냥 나한테 버리는 거 아냐?”
툴툴대면서도 일단 아이템을 받은 지수는 감정 스킬을 사용해 아이템 설명을 읽다 기함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안식! 귀 짧은 토끼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거 완전 버릴 만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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