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별이 빛나는 밤 5
늘 차분하고 진중한 남자가 미리 양해를 구할 정도로 ‘조금 이상한 질문’이라니, 돈 주고도 못 듣는 질문일 것 같아 은근한 기대감마저 들었다.
그 탓인지 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평소 무기력하고 의욕 없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과할 정도로 열렬한 눈빛을 마주한 정하진은 흠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회피하는 듯한 반응을 본 지수는 괜찮으니까 빨리 물어보라고, 무슨 질문이든 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어필하듯 몸을 꿈틀거리더니 어느새 슬그머니 가까이 붙었다. 그러자 정하진은 지수에게 닿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몸을 옆으로 조금 옮겼다.
“…….”
“…….”
정하진은 이제 지수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괜히 방문을 보며 목 주변을 쓸어내렸다. 거리도 벌리고, 시선도 피하는 모습이 수상쩍게 느껴져 눈을 가늘게 뜬 지수가 다시 꿈틀꿈틀 몸을 움직였다. 그의 허리에 코라도 박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눕자 정하진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한지수 가이드.”
“네?”
“갑자기……, 왜 이렇게 가까이 오는 겁니까…….”
“……어? 아, 저도 모르게……. 조금 이상한 질문이 빨리 듣고 싶어서 그랬나 봐요.”
사실 저 이유보단 이 남자가 당황하는 얼굴이 너무 신선해서, 그리고 쑥스러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기해서 반은 무의식중에 붙은 거라고 말해야 맞는 상황이었지만.
어설픈 해명이 먹힌 건지, 그는 다른 대꾸를 하는 대신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쳐들었다. 지수는 신선한 반응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그가 불편하지 않게 몸을 조금 뒤로 물렀다. 둘 사이에 사람 한 명이 누울 수 있을 만큼 거리를 적당히 벌렸는데도 긴장되는지 침을 삼키는 정하진의 목울대가 선명히 움직였다.
‘아니, 뭐 얼마나 대단한 걸 물어보려고 저렇게 긴장하냐.’
지수가 정하진과 함께 지내며 이 남자에 대해 파악한 게 있다면, 바로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늘 진중하다는 거였다. 지수 본인과 대화할 땐 물론이고 토토와 대화할 때도 주제가 무엇이든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도로 시선을 맞추곤 했다.
내가 지금 네 말을 경청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 때문인지, 그와 대화할 때면 제 말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존중받는 기분도 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시선을 맞추긴커녕 무언가 참는 듯이 고개를 들고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누가 보면 괴롭힘이라도 당하는 줄 알겠네. 딱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정하진이 어렵게 운을 뗐다.
“혹시, 한지수 가이드는…….”
“네.”
“그…….”
“네.”
“……제…… 가슴을…… 좋아합니까?”
“……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지수가 눈을 크게 몇 번 깜빡였다. 대체 지금 자신이 뭘 들은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지수는 정하진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읊은 말의 뜻을 다시 뇌에 욱여넣고 되새김질하기 시작했다.
“…….”
“가슴……, 가슴이요?”
“……예.”
“…….”
“……그리고…… 제 허벅지도…… 좋아하는지 궁금합니다…….”
“……허벅지도요?”
이 정도면 조금 이상한 게 아니라, 많이 이상한 수준이었다.
그것도 꽤 많이.
옆으로 편히 누워 있던 지수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앉았다. 설마 농담일까 싶어 저 잘생긴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
“…….”
질문의 의미를 아직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지수의 시선이 정하진의 가슴과 허벅지로 차례차례 옮겨 갔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지금 이 훌륭한 가슴과 허벅지를 좋아하냐고 묻는 걸까?
아니면 그냥 누구든 관계없이 가슴과 허벅지라는 신체 부위를 좋아하냐고 묻는 걸까?
아니 애초에 이걸 왜 묻는 건데?
설마 지금 내 성적 취향을 묻는 건가?
이런 건 현아 누나도 안 물어본 수위인데?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고 있을 때,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정하진이 제 가슴을 꾹 누르며 문질렀다.
갑자기 가슴은 왜 그렇게 만지시는 거죠. 설마 저를 유혹하시는 건가요.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날 뻔했다. 하지만 이내 그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재빨리 파악한 지수는 저 남자가 이러는 이유를 추측하다 흠칫 몸을 떨었다.
“……정하진 에스퍼.”
“……예.”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니어야 하지만…….”
“…….”
“혹시 제가…….”
“…….”
중간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 약을 먹느라 물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목구멍까지 건조해진 기분으로 작게 헛기침한 지수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이었다.
“……제가 혹시……, 가이딩을…….”
“…….”
“……트, 특정, 특정 신체 부위에…… 집중해서 하나요?”
“…….”
정하진의 목울대가 다시 크게 움직이더니 이내 귀와 목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가슴이 간지러운 듯이 연신 제 가슴을 눌러 비비던 그가 이번엔 긴 다리를 꽜다. 저 반응만으로도 지금 제 가이딩이 어떤 상태인지 눈치챈 지수는 차마 시선을 내릴 수 없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침대에 털썩 쓰러져 엎드렸다.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
“제가……, 제가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제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지금 가이딩 조절을 못 하고 계신 상태니, 고의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으흐흡.”
“혹시 무의식이 작용한 거라면, 신경 쓰기 시작하면 바뀔 수도 있으니……. 그래서 여쭤봤습니다.”
“어흑!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정하진의 말대로 지금 한지수가 가이딩을 조절하지 못하고 마구 뿌려 대는 상태긴 했지만, 이는 한지수의 무의식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결과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 오히려 무의식이라 그랬다는 게 더 가능성 있었다. 한지수 본인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정하진의 신체 중 특정 부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의식하고 있다면 신경은 자연스레 그쪽으로 기울 터였다. 그럼 정신력에 영향받는 가이딩 역시 당연히 해당 부위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지수는 자신이 특출난 것 없이 흔한 B급 가이드지만, 김현아나 다른 친한 에스퍼들을 가이딩할 때도 늘 그럭저럭 밥값은 한다고 자부해 왔다. 모두 제 가이딩이 편하다고 입 모아 칭찬해 주곤 했으니까.
왜 그런지는 몰라도 일단 주변 에스퍼들에게 칭찬을 밥 먹듯이 받다 보니, 제 가이딩 실력만큼은 나름대로 자부심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가슴과 허벅지에 집중된 가이딩이라니……. 엎드려 끙끙대던 지수는 문득 이게 자신의 가이딩 습관인가 싶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정하진 에스퍼.”
“예.”
드디어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뜬 정하진이 지수를 바라봤다. 지수는 제발 아니길 바라며 허옇게 질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저……. 혹시 평소에도…… 그랬어요?”
“…….”
그의 입에서 긍정하는 답변이 나온 건 아니지만, 침묵이라는 대답을 들은 지수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재차 물었다.
“가, 가슴이랑…… 허벅지만 말씀하신 건 설마……”
“…….”
“딱…… 거기만?”
“……얼굴도 포함이긴 합니다.”
“…….”
짧은 대답에 겨우 일어나 앉은 몸이 스르르 무너졌다.
‘그래……. 얼굴도 좋아했겠지……. 근데 이건 내가 얼굴을 밝혀서 그런 게 아냐. 사람이라면 누가 저 얼굴을 안 좋아하겠어…….’
정하진은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지수를 똑바로 눕히고 베개 높이를 조절해 주었다. 이불까지 제대로 덮어 준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슬슬 주무시죠. 가이딩이 흐려지는 걸 보니 약 기운이 도는 것 같습니다.”
“그거……. 지금은 제가 가이딩으로 추행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추행이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한지수 가이드 본인 의지로 벌어진 일이 아니니까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게 굳이 언급한 것은, 무의식이라고 하더라도 가이딩을 분산해 주길 바라서였을 게 분명했다. 멍한 얼굴로 정하진을 올려다보던 지수는 눈을 질끈 감고 끙끙댔다.
평소 같으면 벌써 약에 취해 기절하듯 잠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몸만 축 늘어져 가누기 힘들지, 정신은 매우 또렷했다. 아무래도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서 그런 것 같았다. 입술을 달싹인 지수가 힘겹게 다시 사과했다.
“정말 죄송해요…….”
“저도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빨리 조절해야 할 텐데…….”
“조급해지면 잘될 것도 안 되는 법입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어떻게 그래요. 제가……. 제가 그런 파렴치한 가이딩을 한다는데…….”
“조급해서 더 안 되는 것보다야 낫잖습니까. 제가 못 견딜 정도로 격해지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제발……. 못 견딜 때까지 참지 마시고 바로 말해 주세요…….”
“그럼 슬슬 본격적으로 변한다 싶어지면 그때 말하겠습니다.”
“어흑…….”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차분한 목소리를 들은 지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당황하면 오히려 될 일도 그르치기 마련이니 차분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인 건 맞았다. 그래서 지수는 내가 지금 당신 가슴과 허벅지를 마구 희롱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조급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말하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미치겠다. 얼굴을 못 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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