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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63화 (63/172)

#063.

별이 빛나는 밤 3

“손 말입니까?”

잔뜩 고양된 목소리로 외친 지수가 급히 인벤토리를 뒤지더니, 곧 뭔가 꺼내 불쑥 내밀었다. 정하진은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일단 제 손바닥에 올려진 작고 예쁜 유리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건…….”

“아이템이에요! 감정해 보세요!”

“…….”

지수답지 않게 자신감 넘치는 힘찬 목소리 때문일까.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만 정하진이 판별 스킬로 제 손바닥에 놓인 작은 병을 감정했다.

[완벽한 회복의 포션 (L급)]

등급에 관계없이 대상에게 부여된 저주, 중독, 석화, 세뇌, 변신 및 버프 등 존재하는 모든 효과를 무(無)로 돌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주의: 모든 상태 이상과 버프 효과가 해제되니, 좋은 버프를 적용 중이라면 신중하게 사용하자!

“…….”

“…….”

설명을 다 읽은 정하진은 아이템 설명이 적힌 스탯 창을 치웠다. 그러자 반투명한 창에 가려져 흐릿하게 보이던 지수의 얼굴이 선명히 드러났다. 지수는 정하진의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다. 마치 이게 뭔지 모르냐고 묻는 듯한 해맑은 눈빛을 본 정하진이 조심스럽게 지수의 손을 잡았다.

“?”

혹시라도 세게 쥐어 상대가 아플까 봐 그런 건지 몰라도,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는 받은 유리병을 다시 지수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직접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주먹을 쥐여 주었다.

“……?”

“한지수 가이드.”

“네?”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어서 인벤토리에 넣으세요.”

“아? 괜찮아요! 제가 선물로 드리는 거예요! 정하진 에스퍼가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하시잖아요. 동생분께 한번 써 보세요.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써 보면 결과도 알겠죠.”

“…….”

지수는 여전히 제 주먹을 감싸 잡은 정하진의 손을 내려다보다 그대로 쓱 밀었다.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B급 가이드의 힘에 밀릴 리도 없는데, 정하진은 지수가 미는 대로 움직였다. 손을 그의 가슴까지 밀어붙인 지수가 옅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 참고로 절대 수상한 아이템은 아니에요. 출처도 정확해요. 제가 사실 저번에 뇌수면 치료받다가 안식…….”

“한지수 가이드.”

“어, 네?”

지수의 말을 끊은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TV를 왜 그리 열심히 보냐고 놀리던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어쩐지 단단하게 굳은 것 같다고 느껴질 만큼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다소 비장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지수의 눈이 동그래지고, 옅게 머금었던 웃음기도 싹 사라졌다. 정하진은 여전히 지수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은 채 제 가슴 부근에 대고 있었다. 더없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지만 지수는 그로 인해 주먹 쥔 손을 펼 수 없었다.

“…….”

“어, 저기…….”

“이건 받지 않겠습니다.”

“……!!”

지수는 제 손을 내려다보는 그의 굳은 얼굴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어 괜히 더 긴장됐다. 분명 좋은 아이템이었다. 그것도 L급.

SS급 이상은 아직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이 없어 그 이상 등급을 모두 L급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일단 세상에 알려진 아이템 중 굉장히 좋고 희귀한 아이템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또한 상태 이상 해제 포션 중 L급 아이템이 있다는 소린 듣지 못했다.

아마 있다고 해도 굉장히 그 수가 적을 게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정하진은 기뻐하지 않았다. 아니, 기뻐하긴커녕 이런 선물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괜한 참견을 한 건가?’

처음엔 왜 받지 않는 걸까? 하고 단순히 궁금했던 마음이 점차 걱정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혹시 저 때문에 정하진이 기분이 상한 건 아닐까 싶었다.

만약 이미 같은 포션을 사용해 봤지만, 효력이 없었던 거라면?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이 대뜸 써 보라고 이런 걸 준다면……. 어쩜 속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지수 본인이라면 누군가 제 사정을 생각해 준 것만으로도 기쁘고 고맙다고 느꼈겠지만, 사람은 똑같은 일을 겪어도 각자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게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침 정하진이 제게 뭔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입을 굳게 다무는 모습을 본 지수는 기분이 더 가라앉는 걸 느꼈다.

‘……조금 더…… 생각하고 줬어야 했나…….’

옛날에도 간혹 이런 경우가 있었다. 지수 본인은 분명 좋은 의도로 상대를 생각해서 한 일이었는데, 그게 상대에겐 무신경하게 들쑤신 일로 받아들여져서 서로 얼굴 붉혔던 일이.

물론 대부분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종종 네가 뭔데 내 일에 참견하냐고 화를 냈었다. 또 지금 네가 잘나간다고 과시하는 거냐고, 날 무시하는 거냐며 제 처지를 비관한 이도 있었다.

과거에 겪은 안 좋은 기억이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괜히 나서서 예전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섣불리 판단한 지수는 정하진의 손에서 제 손을 쓱 꺼냈다. 부드러우면서도 굳게 잡고 있던 것치고 손을 빼내는 데에는 아무런 힘도 들일 필요가 없었다. 고개 든 지수는 저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제 손만 내려다보는 정하진을 향해 사과했다.

“저기……, 정하진 에스퍼. 혹시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예? 어째서 사과하시는 겁니까?”

사과를 들은 정하진의 눈이 커졌다. 직전과 달리 지수와 똑바로 눈을 맞추는 그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기분 상한 건 아닌가?’

당황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인 정하진 덕분에 오히려 차분해진 지수가 용기를 내 조곤조곤 말했다.

“그게, 어쩌면 이미 사용해 보셨을 수도 있는데, 제가 너무 막무가내로 받으라고 한 것 같아서요……. 음, 그러니까. 제 말은……. 저 때문에 속상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예? 그게 무슨……, 아니. 아닙니다. 아뇨.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놀랐는지, 몇 번이고 반복하며 부정하는 그를 지켜보던 지수는 오히려 머쓱해져 옅게 웃어 버렸다. 다행히도 정말 기분이 상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안도감을 느낀 지수가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 제가 좋은 의도로 말한 건 맞는데, 가끔 제 의도랑 상관없이 안 좋게 받아들이는 일도 있었거든요, 각자 속사정은 모르는 거니까…….”

“…….”

“아, 그, 정하진 에스퍼가 그런 거라는 건 아니고요, 그게, 사람은 다 같을 수 없으니까…….”

“…….”

말을 하면 할수록 횡설수설 쓸데없는 이야기만 덧붙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제대로 해명하고 싶었다. 정말 그럴 의도는 아니지만, 만약 내 말이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표현하고 싶었다.

말주변이 없어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과거엔 제 진심이 왜곡되지 않도록 대신 변호해 주고, 설명해 주고, 상황을 정리해 주었던 이가 있었다. 지수와 마찰이 생긴 상대는 강재윤이 중재를 자처하며 나서 침착하게 대화하고 좋은 말로 어르고 달래 준 덕분에 뒤늦게라도 지수의 진심을 알아주었다.

그럴 때면 오히려 화내서 미안했다며 지수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었다. 하지만 이제 제 본심이 왜곡된 오해를 받아도 그걸 대신 바로 잡아 줄 사람은 곁에 없었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다 의지하고 있었구나…….’

상대에게 제 의견이나 진심을 전하는 건 언제나 어려웠다. 그래도 정하진이 차분하게 들어 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이라도 더 말하고 싶었다. 구구절절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결과 다행스럽게도 진심이 통한 것 같았다.

다만 조금 과하게 통한 것 같았다. 그가 제게 미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더 정확히는 미안하다 못해 어딘가 조금 아파 보이는 얼굴이었다. 예상 밖의 반응에 놀란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정하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일단. 제가 한지수 가이드의 성의를 거절한 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귀한 아이템을 선뜻 주시려는 마음이 감사하다고 먼저 말씀드려야 했는데, 저야말로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 전 괜찮아요.”

지수가 고개까지 도리질하며 대답하자 그는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제가 거절한 이유는. 예전에 이미 똑같은 포션을 사용해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

역시 그랬구나. 지수가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정하진이 설명을 덧붙였다.

“제대로 설명도 안 하고 거절부터 한 건, 한지수 가이드가 이런 전설급 아이템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셔서, 당황해서 그랬습니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아, 그런 거라면 정말 다행이에요. 그리고 아이템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하진 에스퍼니까 보여 드린 거예요.”

“예. 저야 한지수 가이드를 절대 해치지 않고 지키겠다고 목숨을 담보로 맹약을 한 몸이니 괜찮습니다만.”

“네?”

갑작스러운 고백에 식겁한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지만, 정하진은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절대로. 절대로 다른 이에게 이런 전설급 아이템을 쉽게 꺼내면 안 됩니다. 한지수 가이드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아…….”

담보의 내용에 놀랐던 지수는 정하진의 진지한 당부를 듣고 저도 모르게 작은 탄식을 뱉었다.

위험.

생각도 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몇 년간 지수는 제 안위를 고려해 행동한 적이 없었다. 한지수를 건드리는 자는 절대 무사할 수 없다는 인식을 지구 전체에 각인시킨 이가 늘 곁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으니까.

사소한 것부터 중대한 것까지 전부 다 저를 위해 주는 이가 언제나 함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없다는 사실을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알고 있었다.

‘그걸 나만 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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