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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62화 (62/172)

#062.

별이 빛나는 밤 2

‘……기분 탓인가?’

넘겨짚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정하진은 마치 여의도가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고 안전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물론 근거는 없었기에 그저 기분 탓이라 여긴 지수는 정하진의 품에 조금 더 편히 기댔다.

처음 안길 땐 민망했던 공주님 안기는 이제 편하기만 했다. 정하진의 넓은 가슴과 어깨에 고개를 기댄 지수는 줄지어 날아가는 셔틀이 만든 인공 은하수와 그 너머의 진짜 밤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은 평소보다 별이 많이 보이네.’

대격변 이후 인류가 절반가량 죽어 나가서였을까?

고작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구는 전 세계 인구가 체감할 만큼 빠르게 재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서울에서도 저런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던전만큼은 아니어도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멍하니 응시하는 지수에게 포포가 말을 걸어왔다.

“한지수 님.”

“응?”

“제가 노래 한 곡 틀어 드려도 될까요?”

“응. 그래.”

지수가 대답하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잔잔한 피아노곡이 나오기 시작했다.

‘달빛…….’

드뷔시 달빛.

강재윤과 한지수 두 사람이 강재윤의 집 거실 전면 창 앞에 앉아 별을 구경할 때마다 포포가 틀어 주었던 음악이었다. 강재윤이나 한지수가 시킨 것도 아닌데, 포포는 두 사람의 뒷모습과 별이 만천한 밤을 보면 이 음악이 필요할 것 같다며 은근히 다가와 틀곤 했다.

“…….”

잔잔하고 감미로운 선율에 물막이 덧씌워져 밤하늘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한지수는 별을 온전하게 보고 싶어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반짝이는 도심의 야경과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창문에 비쳐 흐릿하게 보이는 책상다리하고 앉은 제 모습과 곁에서 어깨를 빌려주는 강재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넓은 어깨에 편히 기대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지수는 창문에 비친 잔상이 아니라 고개를 돌려 강재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더 욕심부리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아른거리는 그와 눈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대신, 기억 속 창밖에 흩날리기 시작한 눈송이를 응시하며 일부러 잔상을 모른 척했다.

제 뇌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반짝이는 이 순간이 가짜라며 현실로 저를 끄집어내지 못하도록. 그렇게 모른 척하며 어느 겨울밤을 덧그려 나갔다. 언제인지 구체적으로 기억나진 않지만, 아름다웠던 밤을.

* * *

[……지역은 과천 대피소로 지정하였으며, 자정이 넘은 현재는 1급 대피 기준에 해당하는 지역이 모두 외곽으로 대피를 마쳤습니다. 한편 평화 길드는 건축계 에스퍼를 미리 섭외하는 등…….]

지수는 오랜만에 보는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정하진에게 안겨 도착한 곳은 지하 벙커가 아닌 평화 길드 소유의 호텔이었다. 정하진이 벙커를 놔두고 지상 건물을 선택한 부분이 의아했지만, 딱히 이유를 물을 생각도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하진과 함께 있으니,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은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게다가 걱정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차분한 그를 보고 있자니, 이 지역은 안전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신뢰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토토 님. 저기 보세요. 하늘에 아직도 셔틀이 있어요.”

“쮜! 쮜이이!”

토토가 짧은 앞발로 가리킨 방향엔 드문드문 날아가는 대피 셔틀이 몇 대 보였다. 너무 멀어서 지수의 눈엔 작은 빛처럼 보였지만, S급 햄스터의 시력과 인공지능 로봇의 시력으론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뉴스에서 발표한 것처럼 어느 정도 대피를 마친 덕분에 한강과 하늘을 줄지어 가던 셔틀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확인한 지수는 안도감을 느꼈다. 어쩜 이 안도감은 정하진이 타 준 따뜻한 코코아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직 새로 발표할 만한 소식이 없는지, TV에 보이는 아나운서들은 시간 때우기용 멘트를 주고받고 있었다. 한 아나운서가 대격변 전이라면 서울 인구를 몇 시간 만에 다른 지역으로 대피시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는 발언을 하자, 다른 아나운서가 호응하는 모습이 보였다.

대격변으로 각국 인구가 적게는 30%부터 많게는 45%까지 줄었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은 인구 감소율이 58%로 유독 크게 타격을 입은 국가였다. 이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하나에 인구가 밀집해 있는 탓이 컸다.

대격변 이후 5년간 지구상에 발생한 균열을 봤을 때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경우보단 어느 정도 유동 인구가 있는 지역, 또는 도심 주변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초창기엔 지금처럼 균열을 감지하는 시스템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사람이 없는 지역에 나타났다가 공략하지 않아 그대로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키며 사라진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던전이 그렇듯, 균열이 게이트화 되고 아무런 공략 없이 방치되어 사라졌다면 그 주변에 흔적이 남았어야 맞았다. 그러나 아직 그런 흔적을 발견 못 한 걸 봐선 아마 가능성이 낮을 거라는 게 현 학계의 다수설이었다.

아직 균열이 왜 생기는지, 게이트화 된 이후 클리어해 사라지게 된 던전은 어떻게 되는 건지 등등 무엇 하나 밝혀진 바는 없었다. 가설만 난무할 뿐.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지구가 살기 위해 해충 같은 존재인 인간을 박멸하려고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키는 게 아니냐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하곤 했다.

‘실제로도 인구가 감소한 후 지구가 급격하게 좋아지고 있고…….’

인류가 절반가량 사라지고 나서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회복 중인 지구를 떠올리고 있을 때, 아나운서들 뒤로 방송국 드론에 촬영된 균열이 나오기 시작했다. 균열로 몰려든 먹구름 때문에 균열이 얼마나 벌어졌는지 잘 보이지 않는 상태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번엔 화면이 지상을 비췄는데 균열을 지켜보는 김현아와 그 곁에 바짝 붙어 있는 남자가 보였다.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주변에 둥둥 떠다닐 것처럼 생긴 남자의 탄탄한 가슴 아래로 <평화 길드 김현아 에스퍼와 바티칸 소속 에스퍼 프리스트 조슈아>라는 자막이 지나갔다.

‘와, 눈이 어떻게 저렇게 반짝거리지? 꼭 보석 같아.’

백금발 머리카락도 아름다웠지만, 깊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마치 보석처럼 보였다. 지상에 천사가 내려온다면 저런 모습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린 지수가 뉴스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잠시 다른 방에서 통화를 마친 정하진은 거실로 나오다 멈칫했다. 지수의 열렬한 시선이 닿은 지점을 향해 고개 돌린 정하진은 잘생긴 바티칸 프리스트를 발견했다.

“…….”

“…….”

정하진이 나왔음에도 지수는 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TV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멍한 얼굴로 김현아 옆에 선 남자를 계속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정하진이 소파로 다가와 옆자리에 앉자 그제야 눈치챈 듯 움찔 몸을 떨었다.

“뭔가 중요한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

넌지시 묻는 정하진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했는데, 기분 탓인지 몰라도 목소리에 장난기가 약간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놀림받은 기분에 얼굴이 확 붉어진 지수는 바로 대응하지 못하고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한 후에 대답했다.

“크, 큼! 아뇨. 그냥, 그냥 보고 있었어요. 아직 별다른 소식은 없대요.”

“그렇습니까? 굉장히 집중하고 계셔서 새로운 소식이라도 생긴 건가 했습니다.”

“……크흠. 그, 통화는 다 하셨어요? 동생분은 괜찮은 거죠?”

“예. 하율이는 괜찮습니다. 병원을 옮기는 건 계속 고민했었는데, 타이밍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정말 다행이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당연한걸요.”

그렇게 대답한 지수는 진심으로 타이밍이 좋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은 어떤 치료를 받는지 모르지만, 그때 봤을 땐 온갖 장치를 달고 있었으니까……. 그대로 대피하려면 큰일이었을 텐데, 미리 옮겨서 다행이야.’

지수는 몇 년 전 정하진의 동생 정하율을 본 적이 있었다. 실제로 본 것은 아니고 한 방송사에서 병원에 잠입해 몰래 촬영한 내용이 뉴스를 통해 나와 원치 않게 보게 된 거였다. 방송에서 정하율은 온갖 의료 기기와 높은 등급의 생명 유지 수정에 둘러싸여 있었다.

당시 뉴스에서는 한국대 병원 최성원 교수가 진찰했으나 여전히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고 떠들었다. 그리고 이 불법 촬영된 뉴스를 본 사람들은 우습게도 정하율이라는 사람의 신상을 무참히 털었던 방송사의 행태보다 침대 주변에 주렁주렁 매달아 둔 아름다운 수정에 더 반응을 보였다. 저 수정이 어떤 던전에서 나오는 최상급 아이템인지, 기능은 뭔지, 또 가격은 얼마나 하는지에 대해 인터넷이 시끄러울 정도로 떠들어 댔었다.

원치 않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앳된 소년의 안타까운 모습을 떠올리던 지수는 문득 습관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정하진의 막냇동생에 대해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지?’

지수는 자신이 왜 이런 찝찝함이 드는지 알 수가 없어 눈을 감고 생각에 집중했다. 정하진도 아니고 정하율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분명 저와는 인연이 전혀 없는 사람인데, 대체 뭘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알 수 없는 의문에서 파생된 답답함에 잠시 끙끙거리던 지수가 일순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쳐들었다.

“……헉!! 맞다!”

“쮜엑?!”

“한지수 가이드? 왜 그러십니까?”

“저, 정하진 에스퍼! 손 내밀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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