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귀중품 3
‘진짜 게이트화 되면서 토네이도라도 불었다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진 이후 시간이 한참 지나 이 집에 왔을 때 바닥에 떨어져 깨진 병을 발견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런 재난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단순히 가정만 했을 뿐인데, 유리병은 지금 제 품에 안전하게 있는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사무치게 슬퍼서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지수는 제 안에 굳게 잠가 두었던 슬픔의 댐이 터져 감정이 거세게 밀려올 때에, 휘말리지 않고 버텨 낼 수 있는 방법을 아직 몰랐다. 그래서 같은 공간에 정하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간단하게 한 손을 들어 닦으면 될 일인데, 품에 안은 유리병에서 잠깐이라도 손을 떼면 놓칠 것 같아서, 그대로 깨져 버릴 것 같아서 그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방치할 뿐이었다.
어떻게든 눈물을 참아 보려고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인 순간, 상처가 많아 거친 손이 볼에 천천히 닿아 왔다. 지수는 차마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의 주인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살필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울음이 더 크게 번지지 않도록 참는 게 고작이었다. 이젠 정말 그만 울고 싶었다.
“한지수 가이드. 중요해 보이는 물품은 제가 알아서 챙길 테니, 밖에 앉아 추스르는 게 좋겠습니다.”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를 들은 지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은 고갯짓에 이미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괘,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재윤이 형 물건이니까…….”
강재윤의 중요한 물건을 어떻게 타인에게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정하진이 아무리 능력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강재윤이 아꼈던 물건이 뭔지, 애착을 가졌던 물건이 뭔지까진 정확하게 챙기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훌쩍이며 품에 안은 유리병을 인벤토리에 곱게 모셔 둔 지수는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비벼 닦은 후 정하진을 올려다봤다. 그는 성하진의 모습으로 지수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핏 보면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지만, 지수는 그의 눈동자에 깃든 걱정을 이젠 파악할 수 있었다.
금세 고인 눈물을 다시 비벼 닦은 지수가 자기는 괜찮다며 짧게 웃어 보였다. 그리곤 조금 전 애처롭게 울었던 일은 잊어 달라는 듯이 본격적으로 물건을 인벤토리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처음엔 아무거나 손에 닿는 대로 인벤토리에 넣는 것 같던 지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얼추 추리는 기색이 보이자 묵묵히 곁에서 다른 물건들을 챙겼다. 내내 곁을 지킨 토토 역시 익숙한 물건이 보인다 싶으면 입에 쑤셔 넣었다.
볼 주머니 인벤토리에 온갖 아이템을 삼키던 토토는 서재 입구로 다가온 물체에 고개를 휙 돌렸다. 펭귄 로봇 포포였다. 지수가 쉬라고 했기에 별다른 일이 없다면 충전 거치대에 앉아 쉬고 있었을 텐데, 서재까지 다가온 걸 보니 용무가 있는 것 같았다.
“쮜?”
“한지수 님. 바쁘신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아셔야 할 것 같은 소식이 있어요.”
그 말에 책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제일 아래 서랍을 뒤지던 지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위이잉 희미한 소리를 내며 다가온 포포가 입 모양 패널에 출력되는 그래픽을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각각 바꿔 가며 먼저 운을 뗐다.
“현재 모든 언론 매체와 SNS상에서 이 지역을 벗어나라는 뉴스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응. 근처 상공에 균열이 생겼거든. 게이트화 될 예정인데 피해가 생길지도 몰라서 대피 중이야.”
“주인님의 집 주소는 즉시 대피가 필요한 구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바로 대피하셔야 할 것 같아요.”
즉시 대피라는 말에 지수와 정하진, 토토의 시선이 모두 책장 옆 전면 창 밖으로 향했다. 평화 길드 건물 바로 옆 상공에 벌어진 균열로 먹구름이 몰려들어 균열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정하진 에스퍼, 저거……, 원래 징후를 보여 주는 구름 색이 저렇게 시커먼가요?”
“아뇨. 하지만 심상치 않으니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껏 지수가 봤던 토네이도 징후는 희미한 구름이 모여드는 정도였다. 그것도 구름이라기보단 안개 같은 모양새라고 봐야 더 어울리는 그런 미약한 징후였었다. 반면에 저 시커먼 먹구름은 던전에 대해 잘 모르는 이가 봐도 어마어마한 토네이도가 발생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창가로 다가간 지수는 균열이 아닌 지상을 바라봤다. 차 지붕에 녹색 잎사귀 마크가 크게 그려진 평화 길드 셔틀이 연이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민간인 대피를 돕는 푸른색 잎사귀 마크가 그려진 셔틀도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민간인용 셔틀까지 쓸 정도면…….’
이는 정부에서 각 지역마다 마련해 둔 대피 셔틀로는 부족해 길드에 지원을 요청했다는 것을 뜻했다. 셔틀이 부족할 정도면 한마디로 주변 지역에 ‘대피 권고’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대피령’이 내려졌다는 뜻이었다.
하늘길을 오가는 헬기들도 각 길드 마크가 또렷하게 보였다. 모두 대격변 이후 신기술로 만든 다인용 대형 헬기들이었다. 투다다다다다 소리를 내며 서재 전면 창 앞을 지나간 엑자일 길드 헬기 안엔 어린이와 노약자가 가득했다. 지수는 그 헬기에서 시선도 떼지 못한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포포를 불렀다.
“……포포야.”
“네. 지수 님.”
“가서……, 가서 네 충전기 챙겨 와.”
“저도 데려가 주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포포 너도 아끼는 물건 있으면 다 가져와. 빨리.”
그 명령에 패널 눈을 반달로 접어 웃은 피로로~ 피로로~ 노래를 부르며 서재를 나섰다. 기분 좋아 보이는 멜로디가 거실로 나가며 작아진 순간.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국영 재난 알림 장치에서 1급 경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 * *
“으어어, 죽겠다아아~~~!”
둥근 안경을 벗어 협탁에 올려 둔 임세주가 기지개를 켜며 그대로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며칠 내내 모니터 화면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더니 골이 지끈거렸다. 눈에 피로를 풀 겸 힘을 빼고 멍하니 기숙사 개인실 천장을 올려다보던 임세주는 협탁에 올려 둔 워치로 시선을 돌렸다.
사용자의 시선을 인식한 워치가 액정에 불을 켜더니 날짜와 시간을 팝업해 보여 주었다. 안경을 벗어 둔 터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전에 이미 시간을 확인했기에 윤곽으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1월 26일 20:44]
“시간 참 빠르네.”
21일 자로 평화 길드 연구원으로 취직한 임세주는 김현아의 지시에 따라 지금껏 던전 파장을 검토하고 있었다. 지난 6일에 사라진 태종대 던전을 포함해 평화 길드가 보유한 자료와 김현아가 따로 모아 준 온갖 측정 불가 던전 자료 영상을 보며 정리하고 구분하길 벌써 며칠째였지만, 아직 이렇다 할 특이점을 발견하진 못했다.
일반적인 던전 주변에 일렁이는 파장은 보통 연기가 나는 것처럼 보이거나, 넝쿨 가지가 뻗어 나가는 것처럼 밖으로 퍼지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태종대와 김현아의 큰오빠 김현우가 실종된 날 보인 파장은 버드나무잎이 춤추는 것 같은 형태였다.
단 한 번만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독특한 파장이었기에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같은 파장은 고사하고 비슷한 파장조차 보이지 않아 주간 보고서조차 쓰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직속 보고 받는 김현아가 실적을 독촉하는 것도 아니고, 제 성격도 괜한 일에 전전긍긍하는 타입은 아닌 터라, 진전이 없다고 하여 초조함을 느끼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신경 쓰이는 건 주변에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관심이었다. 대체 연락처는 어떻게 알아낸 건지 온갖 언론 매체와 너튜브 운영자 등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는 연락이 쇄도했다. 빗발치는 연락에 배터리가 버티지 못할 지경이 돼서 결국 김현아를 통해 새로운 휴대폰을 개통해야 했다.
거기에 내색은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길드원들도 내심 강재윤 에스퍼를 삼킨 채 소멸한 던전이 또 나타날 확률이 있는지 조용하고도 집요하게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 결과 임세주는 제 연구실과 기숙사 방 외엔 외출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감자 마켓에서 변신 아이템이라도 사야겠어…….’
그동안 인지도가 전혀 없는 정신계 에스퍼로 살아왔던 임세주는 인터넷상에 탈탈 털린 제 신상이 나도는 걸 보고 더욱더 결심을 굳혔다. 안경을 쓰고 감자 마켓에서 외형 변경 아이템을 검색하려는 순간, 희미한 스피커 잡음과 함께 안내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평화 길드 본관 근처 상공에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게이트화 전까지 보호막 스킬을 가동 예정이니…….」
“헉?!”
방송을 듣자마자 안경을 쓰고 벌떡 일어난 임세주가 방 커튼을 열어젖혔다. 66층인 방 바로 앞에 거대한 균열이 검붉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뭐야……?”
벌컥-
“임세주 에스퍼!”
“엄마야!”
갑자기 들이닥친 이의 부름에 놀라 제자리에 주저앉은 임세주가 자세를 다잡기도 전, 성큼성큼 다가온 김현아가 임세주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고 무 뽑듯 일으켜 주며 다짜고짜 물었다.
“똑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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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
별이 빛나는 밤 1
주어가 생략된 물음이었지만, 철석같이 알아들은 임세주가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아뇨! 그런데, 저기서 뭐가 나오려 해요! 일단 제 손 잡아요!”
김현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대신 임세주가 박력 있게 내민 손을 망설임 없이 덥석 잡았다.
“눈 감으세요!”
시키는 대로 눈을 감자 임세주가 김현아에게 자신의 시야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눈은 감은 채 임세주의 시야로 바로 옆 창밖을 보게 된 순간, 김현아는 가까스로 힘을 조절해 임세주의 손을 간신히 지켜 냈다.
“임세주 에스퍼. 지금 저게……. 저게 뭐죠? 혹시 이런 게 더 있었나요?”
“아뇨. 저도 이런 건 처음 봐요. 이건 태종대 때도 못 본 거예요.”
김현아의 눈으로 봤을 땐 보이지 않았던 끔찍한 무언가가 거대한 균열을 비집고 나오려고 몸을 비틀고 있었다. 눈, 코 없이 입만 달린 거대한 얼굴이 입을 크게 벌리며 얼굴을 반쯤 균열에서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생전 처음 보는 기괴하게 생긴 괴물이 균열 밖으로 겨우 내민 손가락에선 시커먼 연기가 피처럼 뚝뚝 떨어져 내렸고, 턱을 덜덜 떨며 괴로운 듯이 몸을 비틀어 댔다. 입을 크게 벌리고 비명을 내지르는 듯이 보였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김현아는 만약 저것이 소리를 낸다면, 부산 태종대 던전이 소멸 직전에 낸 비명과 똑같은 굉음을 낼 거라는 것에 제 눈썹을 걸 수 있었다. 그만큼 끔찍하게 생긴 모양새였고, 어마어마하게 컸다.
“1급 대피령을 내려야겠군요. 임세주 에스퍼, 이제 손을…….”
“헉, 잠시만요! 김현아 에스퍼! 저, 저기! 저기 위를 보세요!”
임세주의 시선에 어떻게든 균열을 비집고 나오려는 괴물의 정수리를 움켜잡은 빛이 보였다. 새하얗게 발광하는 빛이 너무 밝아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빛을 이룬 골격이 마치 사람의 손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머리채 잡힌 괴물이 입을 크게 벌리고 괴로워하며 고개를 마구 저었지만, 빛나는 손의 힘이 우악스러운지 괴물을 다시 균열 안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임세주의 눈을 통해 기괴한 모습을 지켜보던 김현아가 눈을 감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명했다.
“……피스. 안재일 국방부 장관에게 연결해. ……장관님. 김현아입니다. 예. 지금 바로 코앞에 있습니다. 예. 예,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1급 대피령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평화 길드 공문 협조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우선 다른 길드에 연락하세요. 최소한 마포구 일대는 즉시 대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임세주의 손을 놓아 시야 공유를 해제한 김현아가 재차 강조하며 말했다.
“예. 지금도 코앞에 있습니다. 서울시 전역에 설치한 피스 시스템 즉각 가동하고 셔틀도 바로 지원할 테니 당장 1급 대피령 경보를 울려야 합니다.”
안재일 장관이 혼자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전화 연결 상태만으로도 파악한 김현아는 자세히 언급하는 대신 1급 대피령을 힘줘서 말하며 현 상황이 절대 평범하지 않음을 알렸다.
김현아가 통화하는 동안 임세주는 턱이 떨려 이가 딱딱 부딪힐지언정 균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신이 보는 이 모든 것이 뇌에 정확히 기록되는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벌어진 균열에서 나오려고 애쓰던 거대한 괴물의 머리는 이제 보이지 않는 수준까지 뒤로 끌려 들어간 상태였다. 하지만 균열 틈새를 비집고 버티는 손은 여전히 밖으로 조금 삐져나온 채 시커먼 연기를 뚝뚝 흘려 댔다. 저 연기의 정체가 뭔지 몰라도, 만약 현실화하게 된다면 접촉하는 모든 게 녹아내릴 것처럼 불길해 보였다.
빛나는 손이 여전히 괴물을 안으로 계속 끌어당기는 중이었는지, 부들거리며 버티던 한쪽 손이 결국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다른 손은 균열에 손가락 끝마디를 겨우 걸친 채였는데, 이번엔 아예 균열 밖까지 비집고 나온 새하얀 빛이 괴물의 손을 잡고 강제로 떼어내기 시작했다.
임세주가 두려움을 삼키며 입을 틀어막은 채 눈을 크게 뜨고 균열을 지켜보고 있을 때, 국방부 장관과 통화를 마친 김현아가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임세주 에스퍼.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 지금……, 빛나는 손이 그게 못 나오게 막고 있어요. 얼굴은 안 보이고, 지금은 한쪽 손만 조금 보이고 나머진 다 안으로 끌려 들어갔어요.”
“그렇군요. 지금 국방부에서 무인 드론을 띄웠으니 나중에 영상으로 살펴보고 일단 우린 나갑시다. 혹시 고소공포증 있습니까?”
“네, 네? 아, 아뇨. 딱히 없는……. 잠깐. 그건 왜 물어보시는, 끼야아아아악!”
질문이 끝나기도 전, 거실 창을 열어젖힌 김현아가 임세주를 품에 안은 채 밖으로 뛰어내렸다.
* * *
정하진에게 안겨 건물을 빠져나온 지수는 토토와 포포를 품에 안은 채 비행하는 내내 지상을 보느라 고개를 쭉 빼고 있었다. 지상엔 구역마다 대형 길드 대피 셔틀에 오르기 위해 줄 서 있는 민간인들이 보였다. 대부분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몸을 움츠리고 있었지만, 파견 나온 각성자들의 지시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며 침착하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는 대격변 이후 정부가 갖춰지고 다시 세상이 온전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최소 열흘에 한 번은 필수로 대규모 대피 훈련을 반복한 덕분이었다.
‘매번 대피 연습에 들어가는 비용 문제로 말이 많았는데, 역시 헛된 게 아니었어.’
지수는 몇 년 전,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된 대규모 대피 훈련을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밀어붙였던 남자를 바라봤다. 정하진이 이 부분을 매번 강하게 이야기하고 정부를 설득하지 않았다면, 심지어 이 훈련을 시행하지 않으면 자신은 외국으로 나가 계약할 거라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처럼 체계적인 대피는 어려웠을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정하영 에스퍼랑 현아 누나랑 재윤이 형도 정하진 에스퍼 의견에 동의한다고 같이 설득했었지.’
정하영과 김현아, 강재윤 역시 꼭 필요한 일이라며 뜻을 모았었다. 지수는 당시 참모 회의에서 나와 유명해진 강재윤과 김현아의 발언을 떠올렸다.
‘대격변으로 인구가 절반이나 줄었는데, 여기서 더 줄이고 싶은 거라면 성명 발표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국민이 괴물한테 잡아먹히든 말든 안전한 벙커에서 숨죽인 채 연명하다가 부활한 정부가, 그 지옥에서 자력으로 생존한 국민조차 제대로 지킬 의지도 없고, 애초에 그럴 능력도 없다고 말입니다.’
강재윤이 고저 없이 차분하게 사실만 짚어 가며 고집 센 정치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참고로 아무런 대비도 없는 상태에서 큰일이 터졌을 때, 우리가 높으신 분들을 우선 대피시켜 드릴 거란 기대는 하지 마시죠. 적어도 평화 길드에서 개발하는 모든 대피 시스템은 국민을 위한 시스템이 될 겁니다. 당신들이 죽든 말든 솔직히 난 신경 안 써. 그러니까 찬성표나 던져요. 좋은 말로 할 때.’
김현아가 좋은 말을 보태며 설득에 마침표를 찍었다. 당시 지수는 그저 웃어넘겼지만, 지금은 저런 과정이 있었기에 원활한 대피가 가능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 흐리게 웃었다. 패딩으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는 터라 눈밖에 보이지 않을 텐데, 웃는 것을 눈치챈 건지 정하진이 고개를 숙여 지수를 바라봤다.
“…….”
“…….”
잠시 시선을 맞췄지만, 두 사람 모두 별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정하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지수를 바라보다 다시 정면을 응시했고, 지수는 그에게 더 편히 안기고자 넓은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잠깐의 눈 맞춤 이후 여전히 조용한 비행이 이어졌다. 발아래로 보이는 한강엔 물살을 타고 줄지어 내려가는 유람선과 수륙 양용 대피 셔틀이 잔뜩 보였다. 어두운 강을 비추는 각 셔틀의 조명 덕분에 마치 한강이 자체 발광하는 것처럼 반짝반짝했다. 재앙을 피해 달아나는 중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퍽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 감상은 지수뿐만이 아니라 인공지능 펭귄에게도 통했는지, 포포가 먼저 운을 뗐다.
“정말 멋져요. 저 셔틀은 처음부터 한강 이용을 염두에 두고 만든 건가요?”
“응? 아. 응. 맞아. 도로가 막히거나 망가지면 대피가 늦어지니까 대피 셔틀을 전부 수륙 양용으로 개발했거든.”
도로와 수로 그리고 하늘길까지 전부 서울을 벗어나는 반짝임의 행렬로 가득했다. 두 사람 곁을 지나쳐 날아가는 대피용 대형 헬기도 많았는데, 모두 지정된 구역으로 가는 중인지 같은 방향으로 날고 있었다.
마침 두 사람의 옆을 지나치는 헬기로 시선을 돌린 지수는 창가에 아이들을 발견했다. 보호자의 무릎에 앉은 아이들은 비행 중인 각성자를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소극적으로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지수는 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미소를 머금고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평소라면 토토도 나서서 인사해 주었을 텐데, 지금은 패딩 모자 안에 얌전히 앉아 지수의 턱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아마 너무 유명한 멋쟁이 햄스터를 알아볼까 봐 그러는 것 같았다.
정하진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지수는 문득 그가 오직 저 하나만 챙기고 있다는 걸 깨닫고 조금 당황해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동공이 자신을 향한 것을 눈치챈 정하진은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이 지수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어, 저기…….”
“예.”
“……그, 지금 와서 묻는 것도 좀 웃기긴 한데요……, 동생분은 괜찮아요? 서울 지역 병원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예. 연초까진 서울에 있었지만, 지금은 대전에 있는 평화 길드 의료 시설에 있습니다.”
“아아……. 네. 다행이네요. 그럼, 우린 어디로 가나요?”
“일단 여의도에 있는 평화 길드 건물로 갈 예정입니다. 대피 지역이라 지금은 아무도 없을 테니 게이트화 될 때까지 지내기 편할 겁니다.”
“아, 네…….”
현재 서울과 인근 지역 모두 무조건적인 1급 대피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필수 대피 지역엔 영등포구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목적지를 들은 지수는 내심 놀랐다. 정하진의 성격이라면 무조건 서울을 피해 외곽으로 빠져나갈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그가 동생이 있는 대전으로 가자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동생 정하율은 여전히 깊은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시국에 가족의 곁을 지키고 싶을 테니까. 그런데 굳이 마포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여의도를 택하다니,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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