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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59화 (59/172)

#058.

귀중품 1

강재윤이 없는데도 그럭저럭 괜찮았던 순간을 적고 싶지 않은 마음과 강재윤과 한 약속을 위해 일기장을 끝까지 채우고 싶은 마음이 뒤섞였다. 일기장의 공백을 보며 잠시 머뭇거린 지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오늘 그래도 산책한 건 좋았어. 토토가 운동하는 걸 보는 것도 귀여워서 좋고. 정하진 에스퍼가 친절한 것도 좋아.’

사소한 거라도 일단 기록하자고 결심한 지수가 다시 펜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이었다.

삐이이익-! 삐이이이이이익-!

“……!”

“…….”

“쮜?!”

한지수와 정하진의 워치에서 동시에 삐이익-! 경보가 울리며 시뻘건 텍스트가 팝업됐다.

<긴급 재난 알림 - 서울 마포구 균열 확인>

서울 마포구 상공 균열 발생

게이트화 및 등급 확정 전까지 각 구역 지정 대피 시설로 대피 권고

알림을 읽은 정하진은 급히 워치를 조작해 날짜를 확인하곤 바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파 위에 엎드린 지수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제 워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지수 가이드.”

“…….”

지수는 정하진의 목소리 따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제 손목 워치 액정만 보고 있었다. 정하진이 청각에 집중하자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거센 심장 고동이 들렸다. 그리고 창밖에서 기이한 소리도 들렸다. 정하진은 저 소리가 뭔지 파악하는 대신 한지수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뻗어 등을 보듬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안전하게 대피시켜 드리겠습니다.”

짧게 지수를 토닥인 그는 토토를 집어 들어 소파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곤 재빨리 지수의 방으로 들어가 새하얀 패딩을 챙겨 나왔다. 물리 방어와 냉기 방어 옵션이 적용된 패딩이었다. 어느새 소파에 일어나 앉은 한지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워치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한지수 가이드. 일단 이거 입으세요. 나갑시다.”

정하진이 패딩 품을 벌려 보이며 침착한 어조로 재촉했지만, 한지수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이 균열……, 여기, 여기 건물 근처인가 봐요. 바로 근처 같은…….”

그때, 한지수의 말을 잘라먹듯 길드 건물 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평화 길드 본관 근처 상공에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게이트화 전까지 보호막 스킬을 가동 예정이니, 비상 대응 인력을 제외한 길드원들은 보안팀의 안내에 따라 침착하게 지상 주차장 셔틀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현재 평화 길드 본관 근처 상공에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이 건물 근처에 균열이 생겼으니, 등급 측정 및 입장 가능한 게이트화 될 때까지 즉각 대피하라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잠시 멍하니 방송을 듣던 한지수가 별안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현관이 아닌 거실 전면 창을 향해 달려갔다.

“한지수 가이드! 위험합니다!”

패딩을 팽개친 정하진 역시 기민하게 움직였다. 한지수보다 훨씬 민첩하게 움직인 그는 당장 거실 창을 열어젖히려는 지수의 허리를 다급하게 감싸 안았다. 기숙사 침실 창문은 2M 높이의 투명한 보호막이 가동 중이지만, 거실 창문의 경우 비상 상황 발생 시 비행 스킬을 가진 각성자가 창문을 통해 나갈 수 있도록 보호막이 1M 높이로 낮게 설계되어 있었다. 정하진이 뭘 걱정하는지 아는 한지수는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움직이는 대신 그대로 달랑 안긴 채 창밖을 확인했다.

“정하진 에스퍼, 저기, 바로 앞에……!”

“……!”

왼팔로 한지수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오른손으로 창틀을 움켜잡은 정하진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65층인 두 사람의 방 바로 코앞에 세로로 길게 찢어진 균열이 보였다. 마치 허공에 흉터가 난 것처럼 벌어진 틈새로 검붉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때 연기랑 똑같아요……. 저거, 저거 태종대 게이트에서 나왔던 그 연기랑 똑같아요!”

“한지수 가이드, 일단 나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정하진 에스, 읍!”

정하진은 한지수에게 패딩을 입히고 번쩍 안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공주님 안기에 당황한 지수가 이거 놓으라고, 내려 달라고 외치려는 찰나, 정하진의 바짓단을 타고 올라온 토토가 한지수의 가슴팍에 납작 엎드렸다.

“쮜잇!”

“잠시만요! 정하진 에스퍼, 잠깐만! 아직 게이트화 되지도 않았어요! 균열 상태잖아요! 잠깐만 좀 놔줘요!”

“한지수 가이드 말대로 열리지도 않은 균열을 봐서 뭐 합니까.”

“이렇게 가까운데 촬영이라도 해요! 대응팀에 보여 주면 뭔가, 커헉! 토토야, 아빠 가슴 누르지 마, 으흡!”

집사의 가슴을 짓누르고 엎드린 토토가 가만히 있으라는 듯이 단호한 얼굴로 버텼다. 정하진은 토토의 서포트 덕분에 품에 얌전히 안긴 지수를 향해 속사포로 대답했다.

“곧 온갖 길드와 방송국 드론이 날아올 테니 촬영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단 우린 여기서 당장 나가는 게 더 시급합니다. 토토, 꽉 잡아라.”

“쮜!”

지수의 셔츠 자락을 꽉 움켜쥔 토토는 용맹한 표정으로 제 집사를 바라봤다. 지수는 부산 던전에서 토토가 제 바짓단을 잡고 끌어당겼던 기억을 떠올리며 토토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토토야, 일단 토토는 안전하게 주머니에 들어가 있어.”

“쮜엣!”

평소 토토라면 시키는 대로 셔츠 주머니에 들어갔을 텐데, 지금은 도리질하며 지수의 셔츠를 잡고 놓지 않았다. 그럴 리 없지만, 만에 하나 지수가 정하진의 품에서 빠져나왔을 때를 대비한 듯 가슴팍에 매달린 채 비장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정하진의 품에 안긴 상태로 지수는 균열을 보기 위해 목을 힘껏 젖혔다. 갈라진 틈새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안개 같은 기운은 분명 태종대 던전 게이트에 이상이 생겼을 때 봤던 검붉은 기운과 흡사했다.

비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같은 기운이 분명했다. 이토록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기운은 그날 태종대에서 본 연기가 처음이었으니까. 눈앞에 보이는 균열이 그 위험한 게이트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정하진 말대로 당장 피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똑같은 게이트라면, 저게 정말 그 위험한 게이트라면 아직 저 안에 누군가 남아 있다면…….

“비행해서 나갈 겁니다. 혹시 모르니 지금 김지수 가이드 모습으로 변하십시오.”

“…….”

정하진이 먼저 성하진으로 변했지만 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서 김지수의 모습으로 변신하라고 다시 권하려던 정하진은 한지수의 얼굴을 본 순간 입술을 더 움직이지 못했다.

“…….”

“…….”

처참한 얼굴을 길게 마주하지 못한 정하진이 시선을 내리자, 반지를 연신 보듬으며 덜덜 떠는 손이 보였다. 정하진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곧 입을 굳게 다물고 지수를 내려 주었다. 그리곤 직접 패딩 지퍼를 채워 주었다. 지퍼를 끝까지 끌어 올린 덕분에 얼추 지수의 코까지 가려졌다.

그 상태에서 패딩 모자까지 씌우고 나니 눈 빼고 꽁꽁 싸맨 모양새가 되었다. 여기서 강제로 안고 날아갈 수도 있겠지만, 정하진은 그러는 대신 형편없이 덜덜 떨고 있는 지수의 양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잡으며 말했다.

“한지수 가이드.”

“…….”

“게이트화 되기 전에 어떤 현상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지금으로선 진입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갑시다.”

“…….”

“나중에 게이트화 되면. 그때 다시 옵시다.”

“……!”

“저런 빛의 균열을 띤 게이트는, 큽!”

잠시 말을 멈춘 정하진이 이를 꽉 깨물었다. 까드득 소리에 놀란 토토가 지수의 패딩 밖으로 기어 나와 정하진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희미하게 퍼진 비릿한 냄새를 맡은 토토가 걱정스레 그를 바라봤지만, 정하진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듯이 침을 크게 삼켜 내고 한지수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균열이 심상치 않으니 일단 피해야 합니다.”

“……진짜……, 다시 올 거예요?”

“예. 그러니 지금은 일단 저와 갑시다. 지금 당장 진입할 수도 없는 균열을 보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

급한 일? 대피를 말하는 건가? 지수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제어하지 못해 이를 꾹 다물고 바라보자, 정하진이 지수의 패딩 턱 칼라 단추를 똑딱 채워 주며 말했다.

“강재윤 에스퍼의 집에 들렀다가 안전한 곳으로 갑시다.”

“……네? 갑자기 재윤이 형 집은 왜…….”

강재윤의 집은 평화 길드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거리상 가까우니 들렀다 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급히 자리를 뜨려는 정하진이 굳이 지금 거기에 가려는 의도를 조금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지수의 패딩 후드 양쪽 끈까지 꽉 조인 정하진은 눈도 거의 가려져 콧등만 살짝 보일 정도로 가려진 지수를 향해 무언가 말하려다 멈칫했다. 지수는 제 앞머리와 후드에 80% 이상 가려진 시야 때문에 정하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말을 고르느라 난감해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일단, 제게 안기시죠.”

“…….”

방금 냅다 공주님 안기부터 할 땐 언제고 지금 와서 삐걱삐걱 양팔을 벌리며 무릎 꿇는 그를 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했다. 알아서 비행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제 푸른 우산은 이미 너무 유명한 아이템인지라 얌전히 다가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삐걱거린 것과 별개로 그는 지수의 몸을 순식간에 안아 들었다. 그대로 거실 창을 열고 빠져나온 정하진은 불길한 연기를 뿜어 대는 균열을 지나쳐 정확히 강재윤의 집 방향으로 비행했다.

지수는 정하진의 목을 안은 채 비좁은 시야로 균열을 지켜봤다. 정하진 말대로 어차피 지금은 균열 상태라 게이트화 되기 전까진 누구도 입장할 수 없으니,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게 맞았다. 다만 어떻게든 1차 공략에 들어가고 싶었다. 문제는 김현아가 허락해 줄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지수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 정하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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