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이기적인 부탁 1
한지수는 오늘 상담 시간만 낭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상담 태도를 보였다. 다만 상담 선생님에게 삐딱하거나 불량한 태도를 보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묻는 말에 거의 대답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다행스럽게도 상담 선생님 역시 지수에게 하고 싶지 않은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에 그나마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평범한 이야기에는 최대한 답을 하려고 노력했다.
밥은 꼬박꼬박 먹었다든가, 약 덕분에 잠도 잘 잤다거나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그 외엔 무기력하고 시도 때도 없이 졸리고 힘없이 멍하다는 증상 정도는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재윤에 대한 이야기. 그것만큼은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전문가고 그에게 말하는 게 맞을 텐데, 옥상에서 정하진과 나눈 대화가 더 편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상담 태도를 반성한 지수는 이후 기억이 기숙사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뒹군 것밖에 없어 조금 민망해졌다. 어차피 가이딩 자가 조절이 가능할 때까진 무기한 휴직이라지만, 이렇게 게으르게 살아도 되는 걸까 싶었다.
‘아냐. 그래도 오늘 가장 생산적으로 보냈어. 산책했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부산 던전 사태 이후 거의 20일이라는 시간 동안 병원에서 잠든 시간을 제외하면 폐인처럼 지내다가 자발적으로 나가 산책을 즐겼으니, 어찌 보면 이것도 큰 발전이라 볼 수 있었다. 누가 들으면 기함할 법한 생각을 하며 습관적으로 리모컨으로 뉴스를 틀려던 찰나, 한 남자와 한 햄스터의 시선이 느껴졌다.
“…….”
세상 돌아가는 소식 좀 알고 싶다고 항변해 보려던 지수는 저 둘의 눈초리에 시선을 흐리며 넷플러스를 틀었다. 마침 저번에 정하진과 보던 영화의 스핀오프 시리즈가 새로 개봉했다는 알림이 떴다.
‘저건……, 재윤이 형이랑 보기로 했던 영화네…….’
제목을 보자마자 자연스레 작년 여름쯤에 공개된 1차 예고편을 봤던 날이 떠올랐다.
박진감 넘치는 액션은 물론이고, 인기 많은 빌런이 부활하는 내용이 담긴 예고편을 본 팬들은 흥분했다. 영화의 팬이었던 지수도 그중 하나였다. 빨리 보고 싶다고 기대에 차 예고편을 몇 번이고 돌려 보던 제게, 나중에 꼭 같이 보자고 말하던 강재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강재윤은 늘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한지수에게 미래를 약속했다. 한지수 역시 강재윤이 말하는 모든 미래를 믿고 기다렸다. 한지수가 그리는 미래는 언제나 강재윤이 있었다. 그가 떠나고 없는 세상 따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S급 에스퍼니까, 그냥 S급 에스퍼도 아니고 강력한 염력계 에스퍼니까, 그렇게 강한 강재윤이 죽을 만한 일이 벌어진다면 자신 역시 세상에 없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너무 확신해서였을까…….
운명은 사람이 거만하게 무언가를 맹신하면 그걸 깨부숴야만 직성이 풀리는지, 한지수에게서 강재윤을 앗아 갔다. 그것도 제대로 배웅하지도 못하게 만들어서 결국 빈 관을 묻어야 했다.
“…….”
이루지 못하게 된 수많은 약속의 산물 중 하나를 차마 재생하지 못한 지수는 정하진의 도움으로 윗몸일으키기 중인 토토에게 시선을 옮겼다. 토토 역시 저처럼 와식을 즐기던 반려몬이었다. 물론 열정적으로 우다다를 하고 쳇바퀴를 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지수가 누우면 옆에 꼭 같이 눕곤 했다.
그랬던 반려몬에게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최근 운동에 몰두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귀엽고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토토의 운동을 진지하게 봐주는 저 남자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저 남자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 같았다.
‘진짜 잘생겼단 말이지…….’
본인도 연예인 출신이라 눈이 높은 편인데도 저 남자의 얼굴은 흔히 말하는 배우급 그 이상이었다. 웃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을 만큼 무뚝뚝하긴 하지만, 약자나 작은 동물에게도 자상한 걸 보면 인품은 좋은 것 같았다. 그가 토토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반려몬을 대하는 모습이라기보다 거의 인격체를 대하는 수준이었다.
‘재윤이 형도 나름대로 토토에게 잘하긴 했는데……. 초반엔 엄청나게 싸웠지만.’
당연하게도 대격변 초기엔 모든 사람이 날이 서 있었다. 강재윤도 점점 불어나는 생존자들 사이에서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리더가 된 상태였기에 누구보다 예민했던 터라 처음부터 토토를 받아 주진 않았다.
그는 지수와 다른 생존자들이 토토를 귀여워할 때 햄스터라고 하기엔 너무 똑똑하고 처신 잘하는 수상한 털 뭉치라며 경계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왜 지수를 쫓아다니는지 모를 토토를 쥐 새끼라고 부르고, 쥐한테 밥 주지 말고 지수 네가 한 입이라도 더 먹으라고 매정하게 군 적도 많긴 했다.
식량이 부족한 날엔 지수가 없는 곳에서 토토를 국에 넣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서슴없이 한 적도 있다고 했었고, 심지어 지수가 자는 동안 토토를 몰래 버리고 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토토는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온 토토는 보통 햄스터라면 하지 못할 일을 척척 해냈다.
몬스터를 피해 안전한 길 찾기, 며칠 묵을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한 쉘터 찾기, 먹을 수 있는 나물과 열매 군락 발견 등등. 능력을 입증할 때마다 강재윤도 토토를 조금씩 인정해 주고 나중엔 쥐돌이라고 취급이 올라가긴 했지만, 둘이 친해지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상이 안정되었을 땐 강재윤도 토토에게 미안했는지 나름대로 선물도 하고 토토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 오거나 하는 정성도 자주 보였다. 처음엔 강재윤에게 하악질하고 철벽 치던 토토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최근의 셋은 행복하게 잘 지냈다.
가끔 대격변 초기의 강재윤이 자길 몰래 갖다 버리는 악몽이라도 꾼 건지, 자다가 깬 토토가 울컥해 강재윤의 머리카락을 뽑으며 공격하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 대체로 잘 지낸 편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아.”
그 어떤 생각을 해도 자연스럽게 강재윤을 떠올리고 만다.
의식의 흐름이 무섭다는 사실을 재차 실감한 지수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위치상 자연스레 소파 근처 바닥에 앉아 있는 정하진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하진의 조각 같은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수는 순간 흠칫하며 시선을 내렸다.
워낙 눈길 끄는 외모라서 그런 걸까? 타인의 얼굴을 빤히 보는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틈도 없이 자꾸 눈이 갔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얼굴과 몸이 신이 공들여 빚은 것처럼 완벽하다 해도 실례는 실례이기에 애써 마음을 다잡고 토토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하진의 손가락 아래 발을 밀어 넣고 윗몸일으키기 하던 토토는 더 움직이기 힘든 듯 상체를 어정쩡하게 세운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작은 입에서 “쮜, 쮜잇!” 신음이 흘렀다. 어중간하게 상체를 든 덕분에 토실토실한 배가 살짝 접힌 걸 본 지수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토토. 포기하지 마라. 하나만 더. 할 수 있다. 배에 힘주고.”
“쮜잇!”
“옳지. 그렇지.”
“쮜, 쮜잇……! 쮝!!!”
부들부들 경련하듯 떨던 토토가 찰나 상체를 제대로 세운 후 털썩 널브러졌다.
“잘했다, 토토. 잠깐 쉬고 두 세트만 더 가자.”
“쮸!?”
늘어진 몸을 일으켜 앉은 지수가 대짜로 뻗은 토토를 격려해 주는 남자를 넌지시 불렀다.
“정하진 에스퍼.”
“예.”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함께 운동하실 거라면 일단 스트레칭을 도와…….”
“아뇨. 아뇨. 그거 아닙니다. 운동 아니에요.”
“…….”
바닥에 앉은 정하진이 소파 위의 지수를 올려다보며 자세를 고쳐 앉자 토토 역시 그 옆에 털푸덕 앉아 제 집사를 올려다봤다.
지수는 토토를 바라보며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따로 방에 둔다고 하더라도 S급 몬스터다 보니 청력이 발달해 어차피 둘의 대화를 쉽게 들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수상하게 숨기느니 다 공유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어, 그러니까, 늘 토토랑 잘 지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저야말로 토토가 저와 잘 지내 줘서 토토에게 매우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쮜!”
“음, 하하. 네. 그래서 말인데요……. 음…….”
지수가 옅게 웃으며 망설이는 모습을 본 정하진은 토토를 흘긋 내려다봤다. 옆에 사람처럼 털푸덕 앉아 있던 토토는 어느새 두 발로 일어나 앞발을 공손히 모으고 있었다.
“……음, 혹시요.”
“예.”
“……어, 그러니까. 음……. 나중에요.”
“예.”
“쮜?”
쉽게 운을 떼지 못하는 지수를 바라보던 토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발로 타박타박 걸어왔다.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을 크게 뜨곤 뭔가 불안함을 느꼈는지 “쮜이?” 하고 지수를 불렀다.
저 똑똑한 햄스터가 뭔가 눈치챈 게 분명했다. 토토에게 숨기지 말자고 마음을 먹었다지만, 막상 불안한 표정의 토토를 보니 단호하게 굴 수가 없었다. 굳이 토토 앞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보다 나중에 김현아에게 잠시 맡기고 정하진과 단둘이 대화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지수는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 별건 아니고요. 그냥 다음에 저랑 토토랑 같이 던전에 갈 일이 생기면, 그때 토토에게 전술 지도를 좀 해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혹시 제가……, 같이 들어가지 못해도요…….”
정하진은 지수가 꺼내려던 말이 이게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듯이 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말을 바꾼 이유 역시 알아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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